2008년 04월 통권 제65호
속 깊은 책 이야기
사진과 시
책 세상 나들이
즐거운 책 읽기
열린어린이 서평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열린어린이 서평

[이 달의 서평]
여자도 사람이외다

정순심 | 2008년 04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처음으로 개인전 개최, 시대를 앞서간 여성, 독립운동가, 이혼 고백서 발표 및 위자료 청구 소송 사건……. 이 모든 것은 정월 나혜석 앞에 따라 붙는 수식어들입니다. 요즘엔 그리 주목을 받을 일도 아니지만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그녀의 행보를 곱게 받아들여 주지 못했습니다. 여자의 삶이란 그저 삼종지도를 잘 따르는 것, 그리고 남존여비 사상이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여자도 사람이라는 외침을 들고 일어섰던 나혜석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나혜석은 1896년 수원 시흥군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가정 형편과 오빠의 적극적인 권유로 신식 교육을 받았지만, 어린 시절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듯합니다. 당시에는 남자들이 정식 결혼을 한 아내 말고도 소위 첩을 두던 시대였고 나혜석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내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뭐라 말을 하지 못했고, 나혜석의 어머니 역시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겠지요.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나혜석은 이때부터 여성의 삶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뒤,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열여덟 살의 나이로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하면서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의 길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미술 공부에 몰두하면서 소설과 시를 발표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5개월 동안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그녀 개인의 삶을 살펴보면 첫사랑 최승구를 폐결핵으로 잃은 후, 최우영과 결혼합니다. 평생 변치 않는 사랑을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는 함께 살지 않을 것을 결혼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고 말이지요. 신혼여행은 첫사랑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지금과 비교해 보아도 참으로 대담한 결혼 조건이며, 쉽게 할 수 없는 당찬 걸음입니다. 1927년에 남편과 함께, 당시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던 세계 일주를 떠납니다. 당시 신문들이 나혜석 부부의 일정을 속속들이 보도했다니 그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 중에 파리에서 독립운동가 최린과의 연애 사건이 벌어지고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맙니다. 돈 한 푼 없이, 아이들을 뒤로 한 채 이혼녀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를 얻게 된 것이지요. 그 후, 생활비 청구 소송을 내고 이혼고백서를 발표했으니 당시에 얼마나 사회적 지탄을 받았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지요.

집도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 결국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나혜석은 시대가 수용할 수 없는 앞선 여성이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재능을 인정해 주기보다는 잘못된 관습의 잣대로 그녀를 평가해 버린 것이지요.

나혜석은 2000년에 여성 최초로 문화 인물에 선정되었습니다. 화재로 그녀의 많은 작품들이 불타 없어져 현재 확인되는 그림은 30여 점에 불과하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회적 편견이 빗어 낸 과거의 평가를 뒤로 하고 이 책을 통해 나혜석을 새로이 바라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면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을 만큼 글은 딱딱하지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녀가 걸어온 길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들려주고 있습니다. 나혜석과 주변 인물들,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실제 사진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그녀가 여러 잡지나 신문 등에 발표했던 다양한 글과 그림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했던 미술 작품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녀의 예술혼과 의식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남녀 차별이 없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곳곳에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는 지금, 어린이들이 책을 통해 그녀를 알게 되는 일은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 나혜석 소설 「경희」  중에서.

정순심│오픈키드 도서컨텐츠 팀장. 아이들 책을 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세상이 환한 미소로 가득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