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통권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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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우리 동화/동시 깊이 들여다보기]
가볍다, 심각하다, 웃는다

오인태 | 2008년 11월

1. 동시의 자질

아동문학을 바라보는 데는 문학성을 우선하는 관점과 교육성을 더욱 중요하게 보는 관점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아동문학의 특징 탓에 생긴 마땅한 현상이겠으나 결국은 아동문학의 독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관련된 문제로 보인다. 우선 창작자들은 주로 앞의 입장에, 문학교사나 학부모들은 뒤의 자리에 설 수 있음 직하다.

아동문학도 문학의 한 갈래인 바에야 마땅히 문학 텍스트로서 ‘문학성’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아동문학 작품은 어린이들에게 읽히거나 들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써진 것인 데다, 그 읽기 행위가 주로 가정과 교실에서 부모나 교사의 읽기 지도, 곧 가르치는 행위를 동반하는 일이라서 ‘교육성’을 요구받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문학성과 교육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아동문학 작품이라면 모름지기 갖추어야 할 조건이자 자질에 해당하는 문제다.

흔히 시의 자질로 ‘리듬’, ‘메시지’, ‘이미지’를 꼽는다. 물론 시는 이 자질들을 두루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시인들마다 이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시의 주요 자질로 삼음으로써 자신의 시적 성향을 이루기 마련이다. 전통적인 시의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시를 노래나 놀이 형식으로 여기는 시인은 아무래도 리듬 자질을, 시의 의미를 중시하는 시인은 메시지 자질을, 언어의 미적 구조를 중요시하는 시인은 이미지 자질을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할 것인가에 시 창작의 초점을 둘 터다.

동시의 경우, 교육성은 시의 여러 자질 가운데 주로 ‘메시지’ 자질을 통해 나타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동시가 잠언이나 훈화 자료가 아닌 바에야 그 메시지는 마땅히 시적 장치, 또는 시적 언어를 통해 시적으로 교감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동시의 교육성은 시의 모든 자질과 원리를 충족하는, 즉 온전한 시성을 통해 총체적으로 구현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이 시성의 원리가 바로 아동성의 원리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밝힌 바 있다.

시성과 교육성은 적어도 동시에서만은 ‘아동성’에서 비롯되어 ‘아동성’으로 귀결된다. 동시의 독자도 어린이, 동시를 통한 교육 대상도 어린이라는 사실을 되새긴다면, 아동성이 이루는 정서적, 심리적 상태, 즉 ‘동심’은 동시의 필요충분조건이라 할 만하다. ‘동심’이 빠진 ‘동시’는 생각할 수가 없다. 새삼, 동시가 가져야 할 동시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리하여 어떤 동시가 좋은 동시인가를 곰곰이 되짚어보게 한, 요즘 내가 읽은 동시집 세 권이 있다. 바로 오규원이 쓴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와 서정홍이 쓴 동시집 『닳지 않는 손』, 그리고 김용택이 쓴 동시집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이다. 이 세 권의 동시집은 모두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냈다는 공통점과 함께 주목할 만한 차이점이 있다. 책을 낸 출판사도 눈여겨볼 만하다.

2. 감각적 이미지 ― 오규원, 『나무 속의 자동차』

이미 작고하신 분의, 그것도 평생 달랑 한 권의 동시집만을 남긴 시인의 동시를 들어 시가 아닌 동시의 관점에서 왈가왈부하기란 좀 켕기는 일이지만, 오규원의 첫 동시집이자 마지막 동시집인 『나무 속의 자동차』는 우리 동시의 한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오규원은 일찌감치 서울예술대학을 둥지로 하여 ‘감각적 인식과 언어를 통한 이미지 형상화’라는 우리시의 한 경향을 주도해 왔던 시인이다.

우선 그의 시 가운데 많은 독자들의 눈과 입에 익었을 듯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한 잎의 女子 1」 첫 연)를 보더라도, 그의 시는 사물의 직관적 관찰을 통해 그 속성을 은유적 이미지로 바꿔내는 데 빼어나다. 그러나 은유된 이미지일지라도 이미지 자체는 직관적이다. 오규원의 시를 “은유를 거부하고 직관적 인식을 직관적 언어로 드러낸 ‘날 이미지’의 시”로 규정하는 시각도 그래서 나올 법한 것이긴 하지만, 나는 그의 시의 이미지를 직관적 이미지라기보다는 은유적 이미지로 읽어 왔다. 참으로 아리송하기 짝이 없는 ‘여자’의 속성을 ‘물푸레나무 잎’의 이미지로 그려 내고 있는 이 시에서도 실상 ‘여자’는 ‘시’의 은유적 이미지로 곧잘 해석되곤 하는 걸 보면, 이런 시각이 나만의 독특한 ‘오규원 시 읽기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그의 시가 들머리에서 언급한 대로, 시의 세 자질 가운데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인 것만은 분명하다. 해서 그의 시에서 메시지는 모호하거나 아예 무의미시에 가까우리만치 찾기 힘들다. 동시에서도 이미지 중시의 그의 시관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데, 다음 동시를 읽어 보자.

뿌리 끝에서 지하수를 퍼 올려
물탱크 가득 채우고
줄기로 줄기로
마지막 잎까지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는
나무 속의
그 작고작은
식수 공급차들

그 작은 차 한 대의
물탱크 속에는
몇 방울의 물
몇 방울의 물이
실려 있을까
실려서 출렁거리며
가고 있을까

그 작은 식수 공급차를
기다리며
가지와 잎들이 들고 있는
물통은 또 얼마만 할까
(「나무 속의 자동차」 일부)


생물학적으로 식물에서 물을 공급하는 기관은 물관이다. 이 물관을 따라 뿌리에서 흡수된 수분이 식물의 체내에 공급되는데, 시인은 이를 식수 공급차가 있어 가지와 잎들에게 배급하는 광경, 즉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아주 작은 식수 공급차들이 아주 작은 물통에 물을 나눠주고 있는 풍경은 자못 동화적이다. 이런 동화적 상상력이 어른들에게는 시를 재미있게 읽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식물의 체내에서 물이 어떻게 이동하는가를 이미 과학을 통해 학습한 아이들의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여 시적 교감을 가질지는 알 수 없다. 시인의 시와 마찬가지로 이 동시 또한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분명치 않다. 다만, ‘작음’을 줄곧 강조한 것으로 보아 ‘작음의 미학’을 말하려는 것일까, 짐작을 해보기는 한다.

그는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시 쓰기를 스스로 강조한 바가 있다. 2004년, 어느 시인과 한 대담에서 “예술이란 중도라든지 타협이라든지 모범이라든지 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극단에 있다. 대중도 없고 환호도 없고 독자도 없는 곳으로 가라. 그곳에 자리 잡으면 당신의 독자가 새로 창조될 것이다.”라고 말하셨으니 말이다. 물론 ‘전위’의 자리는 ‘극단’에 있음을 강조한 말이겠지만, 그 자신도 그렇고, 오규원은 한국 시단에서 ‘아방가르드’, 혹은 ‘전위’의 성향을 지닌, 흔히 ‘문지’로 불리는 문학과지성사 쪽 시인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치며,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독자를 외면하면서도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독자는 주로 일반 독자보다 시인, 혹은 시인 지망생 독자가 많겠지만. 이번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동시에 대한 그의 입장은 무엇일까. 그는 이 동시집 끝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저는 동시를 동심을 노래하는 것으로도, 동심으로 노래하는 것으로도 보지 않습니다. 저는 동시를 동심으로 볼 수 있는 시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이 차이가 제 작품의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동심을 노래하는 것은 시의 세계가 동심으로 한정될 염려가 있고, 동심으로 노래하는 것은 시의 세계가 노래라는 말에 간섭을 받을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시적인 시각으로 동시의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동시에게 훨씬 큰 세계를 마련해 주는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동시를 동심으로 볼 수 있는 시의 세계”, 즉 시인으로서 ‘시’를 쓴 것이지, 딱히 동시를 독립된 장르로 인식하거나 어린이 독자를 의식하고서 ‘동시’를 쓴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동시 연구자의 입장에서 좋게 보더라도, 동시를 시의 한 파생 갈래쯤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그의 동시는 그의 시의 연장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의 동시는 우리 동시에서 괄호 밖으로 내몰거나 이단으로 치부해도 좋은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의외로 많은 우리 동시 작가들이 오규원과 같은 인식을 가지고 동시를 쓰고 있는 사람이 많은 탓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미지 자질과 언어미학적 구조가 취약한 우리 동시를 시적으로 온전한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시인 오규원의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도 그의 바람대로 “동시에게 훨씬 큰 세계를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시적 상상력이 부족해 보이는 우리 동시 작가들이 그의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과 언어에 대한 치열한 탐구 정신만은 크게 보아 본받을 일이다.

3. 착한 메시지 ― 서정홍, 『닳지 않는 손』

서정홍은 나와 한 지역에 살며,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시인이다. 경남작가회의를 함께 뜻을 모아 세우기도 했고, 시인으로 시와 동시를 나란히 쓰며 동병상련하는 처지이기도 하니 이래저래 인연이 깊다면 깊은 사이랄 수 있겠다. 그의 시나 동시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온몸으로 ‘개념 있는’ 삶을 실천하며 주위에 감화를 주는 그를 나는 마음으로 존경하여 문학과 삶의 거울로 삼고 있다.

그는 지금 합천의 한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척박한 농촌 현실 한가운데서, 거기 깃들어 사는 모든 생명과 사물들조차도 더불어 두레 삶을 실천하며 산다. ‘시처럼 살며, 시를 쓰는 시인’이 바로 서정홍이다. 세상에 시를 쓰는 시인은 많지만, 시처럼 사는 시인은 드물다. 그래서일까. ‘언행일치’를 장담할 수 없는, 나같이 색깔만 ‘시인’인 사람은 그이 앞에 서면 괜히 주눅이 들고, 함부로 먹물 묻은 논리를 내세워 잘난 체할 수가 없다. 그만큼 그는 생각과 행동이 반듯하다. 착하다.

이번에 그가 동시집 『닳지 않은 손』과 함께 펴낸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의 표제시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전문은 이렇다. “이랑을 만들고 // 흙을 만지며 // 씨를 뿌릴 때 //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이처럼 그의 시도 착하기 그지없다. 반듯한 생각을 가지고 착한 삶을 살고 있으니 착한 시가 빚어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다. 그의 동시는 어떨까?

날마다 논밭에서 일하는
아버지, 어머니 손.

무슨 물건이든
쓰면 쓸수록
닳고 작아지는 법인데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도 닳고
쇠로 만든
괭이와 호미도 닳는데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보다 쇠보다 강한
아버지, 어머니 손.
(「닳지 않는 손」 전문)


앞서 소개한 시와 이 동시를 견주어 읽어 봐도 그의 동시는 시와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마치 임길택 시인의 그것처럼. 그러고 보니 그는 여러모로 임길택 시인과 닮았다. 시나, 착한 삶이나. 어찌 보면 고지식할 정도다.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된 임길택 시인이나 서정홍 시인은 아마도 교사 독자가 가장 많은 시인일 것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시는 다분히 ‘교육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서정홍의 동시집들이 교육 관련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에서 출간됐다는 사실은 서정홍 동시의 성향을 일러 준다. 이번 『닳지 않는 손』도 교육 전문 출판사인 우리교육 사에서 펴냈다.

읽다시피, 서정홍 동시의 화자들은 세상의 이치, 사람의 도리를 너무 환히 꿰뚫고 있어서 여느 동시들이 시인의 자아를 숨기고 대리 화자격인 어린이 화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마치 시인 자신이 직접 시의 화자가 된 듯하다. 너무 어른스럽다는 말이다. 미리 서정홍의 동시는 시와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고 했는데, 이런 까닭이리라.

시인 자신의 자아가 어린이 화자를 빌지 않고, 시에 직접 개입하다 보니 서정홍 동시의 메시지는 너무도 뚜렷하다. 해서 오규원의 동시가 시의 미학적 구조와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라면, 서정홍의 동시는 의미, 즉 메시지 중시의 시로 읽히게 된다. 그런데 이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 그의 동시의 무게를 지탱하는 버팀목, 또는 미덕이라 할 만하지만, “너무 어른스럽다”거나 “무겁다”거나 “상투적인 착함”이라고 지적할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 싶다. 게다가 그의 동시의 화자들은 대개가 불우한 처지에 있는, 우리 사회 ‘약자’의 아이들이다. 농사일이나 막노동하는 부모를 둔 아이,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아이, 이혼한 부모를 둔 아이 따위, 이런 시의 화자들이 전하는 삶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코끝을 찡하게 하기도 하지만, 자못 심각하게 하기도 하고,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루 일 마치고 돌아온 / 어머니, 아버지는 / 밤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 서로 발톱을 깎아 주고 / 서로 어깨를 주물러 줍니다. // 그 모습 / 가만히 보고 있으면 / 나도 빨리 장가들고 싶습니다. (「어른이 되면」 일부)”라거나, “우리 집 앞 / 시멘트 틈 사이 / 민들레 한 포기. // 쇳덩어리도 아니고 / 돌덩어리도 아닌데 // 승용차가 지나가도 / 죽지 않고 /짐차가 지나가도 / 죽지 않고. (「민들레」 전문)”이라는, 사뭇 정감 깊고 희망어린 메시지는 그의 동시를 환하게 하고, 미더움을 갖게 한다.

4. 천연한 동심 ― 김용택,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앞의 두 시인, 오규원과 서정홍은 직접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다. 해서 그들의 동시의 화자들은 시인의 머릿속에 그려진, 이를테면 시인에 의해 ‘창조된 어린이상’, 즉 ‘대리 화자’일 수가 있다. 물론 동시의 화자들은 대개가 시인에 의해 만들어진 대리 화자다. 이것이 동시에 있어서 시의 화자의 특징이다. 시는 시인이 직접 시의 화자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동시는 대리 화자인 ‘어린이 화자’를 내세우기 마련이다. 동시의 대상 독자는 바로 어린이인 데다, 어른 독자를 겨냥해서 쓴다 할지라도 ‘어른 속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탓이다. 동시가 ‘동심’, 즉 아동성을 고려하고, 배려해야 할 또 하나의 까닭이다.

김용택 시인의 경우, 시의 화자, 즉 대리 화자를 일부러 가공할 필요도 없이 그의 주위엔 실재하는 ‘어린이 화자’가 즐비하다. 그는 어린이들을 직접 가르치고 함께 살아온 초등학교 교사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정년퇴직을 했지만, 그는 고향 마을 임실 덕치초등학교에서 40여 년을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곳에서 『섬진강』을 비롯한 숱한 시와 동시를 써 왔다.

이번 동시집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도 시인의 말대로 “그곳에서 만난 대길이, 태성이, 성민이, 소희, 현아 같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실재하는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관찰하며, 이들이 “자연 속에서 지내며 자연을 품은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김용택은 동시를 쓸 수 있는 온갖 조건과 환경을 갖춘, ‘복 받은 시인’이 아닐 수 없다.

태성이가 엄마 빨래하는 데 따라와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뛰어다닙니다.
태성아 그러다가 물에 빠질라
태성아 그러지 마 그러다가 물에 빠질라
그래도 태성이는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뛰어 건너다닙니다.
그때 비행기가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갑니다.
태성이가 하늘을 쳐다보며
징검돌을 뛰어 건너다가
풍덩 물로 빠집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전문)


이처럼 “태성아” 하고 호명만 해도 시가 되니 말이다. 이 동시 속의 태성이도 거기, 시인과 함께 살고 있는 아이다. 그럼 시의 화자는 누구인가? 태성이인가? 아니다. 태성이는 시의 화자의 눈에 포착된 시의 대상일 뿐이다. 시의 화자는 바로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이다. 시인일 수도 있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어린이 화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용택의 동시에서는 시의 화자가 시인 자신이든, 어린이 화자이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누구든 천연스런 동심을 가짐으로써 동시의 화자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김용택은 그만큼 그 자신이 동심으로 살며, 동심으로 동시를 쓰는 시인이다.


천연한 동심, 나는 이 점이 바로 김용택 동시를 빛나게 하는, 동시답게 하는 가장 큰 힘이자 미덕이라 여기고 있다. 그래서 그의 동시는, 시어는 억지가 없다. 무슨 대단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조급함도 없다. 그래서 편하다. 그냥 웃게 된다. 새삼 떠올려 보는 “콩타작을 하였다. /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 또르르 또르르 굴러간다. / 콩 잡아라 콩 잡아라 /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 콩 잡으러 가는데 / 어, 어, 저 콩 좀 봐라. /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 콩, 너는 죽었다.”는 동시도 김용택이 아니면 도무지 쓸 수 없는 시다. 물론 그의 동심의 원천은 그의 아이들이다.

김용택의 동시집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는 작가정신과 문학성을 동시에 갖춘 시들을 수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창비 사에서 펴냈다. 아무튼, 그는 이제 그의 아이들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동시가 오래도록 늙지 않기를 빈다.

5. 꿈

아동성을 탐구하여 시에 도달하든지, 시를 탐구하여 결국 아동에 다가가든지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여 나는 시에서 일가를 이룬 시인이 늦바람(?)이 나서 왕성하게 동시집을 내는 요즘의 추세나 아동문학 창작자, 특히 동시 작가들 가운데 현장 교사들이 유달리 많은 현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다만, ‘아동문학’은 바로 ‘아동’에게 읽힐 목적으로 쓴 ‘문학’이라는 사실만은 아동문학 창작자들이 창작의 원칙으로 늘 가슴속에 새겨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어린이는 모두 그 자체로서 시성을 가진 훌륭한 시인이니만큼 결코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요컨대, 동시의 거울, 즉 동시의 독자는 어린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동시든, 동화든 써달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 어른 독자?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시나 동화라면, 그리고 동심을 여전히 간직한 어른이라면 이를 싫어할 까닭이 없다.

시는 ‘시’만 알면 쓸 수 있는 일이지만, 동시는 ‘어린이’와 ‘시’를 모두 알아야 쓸 수 있는 것이니, 참 어려운 일이다. 나도 이십대 초반에는 동화와 동시를 멋모르고 쓰다가 너무 어려워 중단하고, 시 쓰기 이십여 년, 초등학교 교사 경력 이십여 년이 지나서야, 그리고 본격적으로 ‘어린이’와 ‘어린이문학’을 공부하고서야 겨우 엄두를 내어 ‘동시’의 흉내나 내고 있을 뿐이다. 동시다운 동시를 쓰는 일은 내게 아직 까마득하다.

그래서, 요즘 온갖 허황되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 내려놓고, 김용택 시인처럼 어디 조용한 시골학교로 들어가 다시, 아이들과 함께 동화처럼 살며, 동시를 쓰고 싶은 꿈을, 꾸고, 있다.
오인태 | 『그곳인들 바람불지 않겠나』『혼자 먹는 밥』『등뒤의 사랑』『아버지의 집』 등, 몇 권의 시집을 펴냈습니다. 진주교대와 진주교대대학원을 졸업하고, 경상대학교대학원에서 문학교육을 전공하여 논문 「어린이시의 생성심리와 표현상의 특징」으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진주 시내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동시·평론 들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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