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통권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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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지독한 하루, 그리고 서러움

윤석연 | 2008년 11월

『오늘의 일기』는 어제도 오늘도 매일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날들의 이야기다. 한 아이가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뜨고 옷을 입고 책가방을 챙겨서 아래층으로 아침을 먹으러 내려간다. 삶은 달걀과 토스트로 아침을 먹고 동네 할머니 차를 타고 학교로 간다. 오전에는 실험 수업을 하고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사먹고 운동장으로 나가 새로 온 친구의 고향 이야기를 듣는다.

오후에는 도서관에서 해적이 나오는 책을 읽고, 학교가 끝나자 엄마가 데리러 온다. 집에 도착한 아이는 엄마와 샤워를 하고 아빠가 만든 저녁을 먹은 뒤 난로 옆에서 책을 읽다 깜빡 잠이 든다. 아빠가 아이를 안아 위층 방으로 데려다 준다.

그렇게 또 하루가 끝났다. 여느 날과 똑같은 피곤한 하루가.

그렇지만 이 책에서 아이의 하루는 아주 특별하다. 아이의 잠을 깨우는 건 자명종이 아니라 아라비안 나이트의 거인 아저씨가 시끄럽게 두들기는 쇠망치 소리이고,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새 모양의 갑옷을 입고 날갯짓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웨이터 아저씨의 시중을 받으며 점심식사를 하고, 도서관에서는 해적 모자를 쓴 선생님이 선장이 되어 책으로 만든 배를 타고 모험을 떠난다. 아이는 사자 한 마리를 끌어안고 책을 읽는다. 이렇게 아이의 하루는 상상력으로 가득차 있다.

이 책에서 특히 재미있는 건, 표현의 과장이다. 아침 식사는 삶은 달걀 한 개와 토스트 두 조각 정도였다. 그러나 그림에는 어른보다 더 큰 달걀이 식탁을 차지한다. 동네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학교까지 데려다주는데,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할머니가 아니라 공룡이다. 이 할머니의 나이는 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 아빠가 만든 저녁 카레는 늘 그렇듯 그냥 조금 매웠지만, 이 카레는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고 있고, 어느새 소방관 아저씨까지 출동했다.

매일 매일 똑같은 하루지만 이 아이의 하루는 얼마나 특별한가? (아이는 그저 어른들이 짜 놓은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마음이 놓이고,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내는 아이를 착하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꿈꿀 수 없는 하루 아닌가?)

『하루』는 하루 동안의 고된 노동을 고스란히 헛수고로 되돌려야 했던 이주 노동자 이야기이다.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고 살아야 하는 멕시코 출신 할아버지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손자의 손을 잡고 아침 일찍 일자리를 구하러 나선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하루 일자리로 구한 건, 어느 개발 지역에 새로 들어선 집들 한 켠에 있는 정원에서 잡초를 뽑는 일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손자는 하루 종일 잡초들을 남기고 꽃나무를 전부 뽑아 버리고 말았다.

정원 일이 처음이었던 할아버지는 뒤늦게 손자가 용역회사 직원에게 할아버지가 정원 일을 아주 잘한다고 거짓말 했다는 걸 알게 된다.

“프란시스코, 일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거란다.”(……)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어 보렴. 그리고 괜찮다면 내일 다시 와서 일하겠다고 전하렴. 잡초들을 다 뽑고 꽃나무 싹들을 다시 옮겨 심겠다고 말이다.”(……)
“내일 다시 완전하게 일을 한 다음에 돈을 받겠다고 말하렴.” (『하루』 22~28쪽)


매일 매일 고단한 하루를 살아가지만 일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완전하게 일을 한 다음에 노동의 대가를 받겠다는 이 늙은 노동자의 하루는 또 얼마나 특별한가? (노동자는,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는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고, 일한 만큼의 대가보다 더 많은 걸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야 골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도 못할 노동자의 하루가 아닌가?)

하루의 노동을 헛수고로 돌린 하루지만 손자에게는 아주 특별한 하루였다.

『스무 살, 도쿄』는 열여덟 살의 청춘이 무작정 도쿄로 상경하여 10년 동안 겪었던 일을 하루의 이야기로 그려 낸다. 하루의 이야기가 한 해가 되고, 6일 동안의 이야기가 모아져 10년이 된다. 열여덟 살 청춘은 삼시 세끼 밥보다 음악이 좋다. 어서 빨리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해서 레코드 백여 장을 싸들고 재수를 한답시고 무작정 도쿄로 상경한 나고야 출신이다.

재수 학원을 다니는 동안 여자 친구를 만나지 못해 공부밖에 달리 할 일이 없어 대학에 입학을 하고, 대학 연극반에서 만난 여학생 때문에 어찌어찌 고단한 하루를 헤매다 여학생과 서투른 키스를 한다. 하루가 저물고 그 날의 감상을 이렇게 말한다. “오늘 밤의 일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라고, 분명 중년의 아저씨가 되는 날이 오더라도.”

대학을 다니다 어느 작은 광고 대행사의 말단 직원이 되고, 광고 대행사를 차려 직원을 거느린 사장이 되고, 서른을 눈앞에 두었지만 결혼은 생각이 없는 그저 그런 하루를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그 하루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하루이다. 그 하루 속에는 역사가 기억하는 하루가 흐르고 있다. 어느 날은 존 레논이 죽고, 또 어느 날엔 88올림픽 예정지가 느닷없이 나고야에서 서울로 바뀌고, 또 어떤 하루엔 동독과 서독이 통일된다.

이렇게 역사가 기억하는 하루가 슬그머니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하루 속 삽화로 들어와 있다. 이 또한 얼마나 특별한 하루인가? (마치, 오늘의 하루가 역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굴러간다는 착각에 빠져, 지난날의 기억을 뭉개버리기에 여념이 없는 분들에게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특별한 하루는 아닌가?)

나는 오늘, 두 달치 아르바이트 비용을 잃어버린 학생을 만났다. 그 학생의 하루는 또 얼마나 고단하던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나도 주인은 학생이 일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고, 두 달이 지나도 또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바빠서 잊었거니 했는데 두 번째는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이야기할까 말까 수백 번을 망설이다 말을 꺼냈는데 두 달치 아르바이트 비용을 주면서 그만두란다.

그런데 그 돈을 잃어 버렸다. 도대체 이런 하루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 이 지독한 하루 속에 스며들어 있는 88만 원 세대의 서러움은 어찌 달래야 하는가?

그래도 스무 살 도쿄 청춘이 외치고 있는 ‘젊다는 건 특권이야, 얼마든지 실패해도 괜찮다는 특권을 가졌어.’라고 위로해야 하는 건가? (아니, 이건 실패가 아니잖아!)

그러니 제발 ‘오늘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특별히 새기는 수밖에. 그래도 겨우 힘을 내, 상상하시라! 어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할 수 없는 하루와 여전히 일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믿는 노동자들의 건강한 하루와 또, 그 하루들에 겹쳐진 역사가 기억하는 하루를.
윤석연 | 세상의 많은 작은 것들을 좋아하고, 좋은 이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고, 격식이나 예절, 서열, 질서 따위를 싫어합니다. 늘 싫고 좋음을 분명하게 말해 버려 가끔 미움도 받지만, 언제나 씩씩하고 즐겁게 살고자 애씁니다. 그리고…… 혹시 글 쓰는 걸로 이 세상 선한 일들에 보탬이 된다면 꾸역꾸역 하겠다고 맡고 나서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