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통권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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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서평]
‘어른’은 없다

주진우 | 2008년 11월

난 이른바 ‘마지막 교복세대’이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내리 까마귀 교복을 입고 다녔다. 물론 머리도 짧게 깎아야 했다. ‘범생이’ 축에 속했던 난 이런 규제에 대해서 사실 별 문제의식이 없었다. 내 몸처럼 완전히 붙어 아예 의식 자체를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소풍 때 학교에서 인심을 쓰려고 그랬는지 사복을 입고 오라고 했다. 그때의 난감함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복이라고는 당최 입고 갈 옷도 없었으려니와 있었다 해도 어떤 걸 골라 입어야 할지 몰라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 옷을 이것저것 맞춰서 입고 가긴 했는데, 그때 생각으로도 그 촌스러움이란.

『열일곱 살의 털』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어떤 기대와는 달리 두발, 그러니까 머리카락 이야기이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두발 규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청소년 소설이 두발 규제를 다루고 있다면, 끝까지 읽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두발 규제의 부당성을 다룰 것이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얘기하자고 뭐 한 권의 소설까지 필요할까. 그것만이 아니라면 왜 이 소설은 씌었을까.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일호는 3대째 이발사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일호의 아버지는 이십 년째 세상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다.

일호가 입학한 고등학교는 엄격한 두발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앞머리 오 센티, 뒷머리와 옆머리는 삼 센티 이내로 잘라야 한다는 공포의 ‘오삼삼’. 이를 어기면 등굣길 교문 앞에서 학생부장 선생한테 바리캉으로 머리를 강제로 밀린다. 엄격한 이발사 할아버지를 둔 일호는 그 규정을 너끈히 만족하고도 남을 짧은 머리로 선생들의 칭찬을 받는다. 그 일로 다른 학생들에게 ‘범생이’라고 비아냥을 듣는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 시간, ‘매독’이라 불리는 체육 선생이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한 아이의 뒷머리에 라이터를 갖다 대는 순간, 일호가 달려들어 라이터를 빼앗는다. 화가 나서 일호를 때리려던 선생의 손목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사고’를 친다. 그 일로 사흘 동안 상담실로 ‘등교’하며 반성문을 쓰게 되지만 오히려 일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머리칼 길이로 인간을 평가하는 불합리한 잣대”에 항의하는 두발 규제 폐지 시위를 계획하고 유인물을 준비한다.

그러나 시위 계획이 체육 선생에게 사전에 발각되고 일호와 친구들은 선생들에게 닦달을 당한다. 학생부장 선생이 ‘주동자’ 아이들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학교로 호출하는데, 일호 집에서 전화를 받은 것은 글쎄, 오래전 집을 나갔던 일호의 아버지이다.

할아버지에게 이발 기술을 배우던 일호 아버지는 이십 년 전 갑자기 집을 나가고, 가출 길에 만났던 일호 엄마는 일호를 밴 채로 할아버지 이발소를 찾아와 일호를 낳고 길렀던 것이다.

그런데 학생부장 선생에게 불려온 일호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빌기는커녕 아들의 두발 규제 폐지 주장의 정당성을 옹호하면서 아들을 집으로 데려온다. 그 사이 시위를 준비했던 아이들에게 징계가 내려지고, 일호도 한 달 정학 처분이 내려진다. 그러나 일호는 굴하지 않고 교문 앞에서 ‘두발 규제 폐지’ 피켓을 들고 1인시위에 나선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는 일호가 아니라 일호 아버지에게, 이십 년 동안 가슴에 묻어 온 가출한 아들에 대한 원망과 회한을 쏟아내고, 일호 아버지도 할아버지에게 눈물의 사죄를 한다. 그 다음날 할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깎아주면서 ‘용서와 화해’의 의식을 치른 뒤, 아들과 손자를 앞세우고 일호 학교로 향한다.

학교 입구에서 여전히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리고 있던 아이들을 본 할아버지는 교장 선생을 만나 바리캉으로 밀린 아이들 머리를 이발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뒷머리를 별 모양으로 다듬어 놓는다. 두발 규제를 폐지하라는 뜻을 담아…….

이야기는 결국 두발 규제 폐지를 위한 학교운영위원회가 소집되는 것으로 끝난다. 예정되어 있던 결말이다. 두발 규제라니 지금이 어느 시댄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아 이건 시대의 문제가 아닌데, 라고 머리를 쳤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어른들의 보호와 통제, 그 경계에 있는 청소년들의 주체 선언이었던 것이다. 두발 규제 폐지 시위에 나선 일호의 행동은 “학생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생각’만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른바, ‘행위’의 문제인 것이다. 일호와 체육 선생과의 사건 뒤에 학교에서 두발 규제를 더 강화한다고 하자, 한 학생이 내뱉는다. “두발 규제 반대를 제대로 했어야 해. 건의가 뭐냐? 다른 학교에서는 수업 거부도 했다잖아. 우리가 무섭다는 걸 보여줬어야 하는데……. 우릴 물로 보니까 이러는 거야. 다 틀렸지 뭐.” 일호는 그 학생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다 틀리다니!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식’이 ‘상식’인 만큼 그것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일호의 행동은 그러나, ‘의협심’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기 존엄’에 가깝다. 첫 사건 이후로 “단단해”져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이고, 학생부장 앞에서의 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내가 시작한 싸움은 내가 끝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자신의 문제, 자기 존엄에 대한 집중은 그의 ‘어른 되기’ 과정과 겹쳐 있다. 여기에서 이 작품은 ‘성장 소설’이 된다. 아버지 없는 아이로서 겪어야 하는 시선들과 만나는 괴로움들은 합창대회 입상이나 이어달리기 우승 뒤 아버지와의 감격적인 해후를 상상하면서 ‘보상’받을 수 있었지만, 결코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아버지와의 싸움을 통해서 크는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크는 것을 확인해 줄 아버지가 없어 영영 어른이 되지 못할까 봐 겁”나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것은 우선 자신을 바짝 태우는 것이다. 친구 정진이 생일 선물로 준 담배를 피우고 나서 일호는 생각한다. “어쩌면 더는 제 속을 태울 것이 없이 바짝 말라비틀어진 사람들이 담배를 대신 태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 번도 나를 태워 본 적이 없다.”

다음은 ‘단단해지는 것’이다. 머리를 항상 짧게 깎고 다니는 바람에 규율 잘 지키는 ‘범생이’로 비웃음을 받던 그는 어느 순간 “열일곱 살이 되도록 군소리 한번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머리를 깎이고, 오광두(학생부장 선생)에게 끌려 다니”는 자신의 물컹함이 혐오스러워지고, 스스로에게 단단해지자고 마음먹는다.

그 다음은 ‘행위’이다. 매독이 머리 긴 아이의 뒤통수에 라이터를 갖다 댈 때, 그는 이발사 할아버지가 입이 닳도록 얘기해 온 말을 떠올린다. “머리칼은 네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머리칼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네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다.” ‘이건 말도 안 돼!’라고 속 외침이 들리는 순간 그는 바로 매독에게 달려들어 라이터를 낚아챈다. 그 뒤로 교내 시위 계획을 세우고, 정학을 당하고도 1인시위에 나서는 것은 모두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위인 것이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그의 행위는 또한 주변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더욱 단단하게 한다. 그의 ‘두발 규제 반대 행동’을 중심으로 친구 정진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고, 자신을 비웃었던 재현과는 새로운 신뢰 관계가 시작된다. 기구한 사연만큼 깊은 상처를 가진 일호네 가족들끼리의 관계도 화해와 믿음의 단서가 생긴다.

너무 술술 잘 풀린 건가? 현실에는 엄청나게 두터운 벽과 그 앞에서 쓰러지는 수많은 좌절이 있다. “규율이 없는 자유는 결코 날개가 되지 못한다.”든지, “세상은 금메달만 기억한다.”는 선생들의 말은 이 소설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있지만, 사실 이 말들과 그 동료들은 ‘어른’들이 만든 세상의 두터운 불문율이다. 문제는 그런 세상에서는 아이들도 어른들도 불행하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일호처럼 무엇보다 자기를 존엄하게 여기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욕망을 긍정하는 일, 그것으로부터 남의 욕망을 이해하는 일, 욕망 사이에 권력 관계나 우선 순위를 두지 않는 일, 이것이 어찌 청소년들의 성장에만 관계 있는 문제들일 수 있을까. 하여 ‘어른’은 없다. 우리 모두는 성장통을 앓는 열일곱 살일 뿐.
주진우│어린이 책 속에서 삶의 소중한 단서를 발견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어린이와 책과 평화를 좋아합니다.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에서 일하며 ‘어린이 평화책 순회전시회’ 같은 일을 벌이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