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통권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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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책 이야기]
내가 행복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이선주 | 2008년 11월

여름이 끝날 무렵 가족 여행을 떠났습니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보성 녹차 밭은 낯선 여행지에서의 달콤한 휴식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40여 년이 넘게 기른 그림 같은 차나무, 바람을 막기 위해 심었다는 삼나무는 어찌나 아름답게 쭉쭉 뻗어 자랐던지, 문득 베란다 햇빛에 가둬 기른 우리 집 나무들에게 미안해지더군요.

도시에서는 회색빛이었을 것만 같은 지친 내 영혼에 초록빛을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여행길, 피곤에 지친 몸은 한시바삐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힘든 길인데, 사람 마음은 참 이상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일상을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여행을 떠나서 이런저런 새로운 세상과 만나고 싶어지고, 그렇게 떠난 여행길에서 몸이 피곤해지면 다시 집 향기가 그리워지니 말입니다. “떠날 때도 설레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도 설레지!” 하는 딸아이 말이 꼭 맞습니다. 내가 떠날 곳이 있어서 다행이고, 내가 돌아오고 싶은 곳이 있어서 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를 처음 만났을 때, 문득 어린 시절 처음 본 바다가 떠오르더군요. 예닐곱 살 때였나 봅니다. 오리가 둥둥 떠 있는 그림을 색칠하라는 일일공부 문제를 보고, 혼자서 여러 생각을 하다 오리는 문제없이 칠했는데, 물을 어떤 색으로 칠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물은 투명한 색인데, 투명한 색은 없으니 안 칠하면 문제를 안 푼 것 같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나름 투명한 색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진 하얀색을 칠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이걸 보신 부모님께서 물은 파란색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제가 본 물은 파란색이 아닌 투명색인데 왜 파란색이라 하시는지…….

그 일을 계기로 우리 가족은 그 해 여름에 처음으로 바다로 여행을 갔던 것 같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고 푸른 바다! 푸른색 바닷물이 쏟아내는 눈부시게 하얀 파도, 모래알로 반짝이는 백사장. 내가 살던 곳을 조금만 떠나도 이렇게 크고 넓은 세상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차했던 기억이 이렇게 아이 엄마가 되어서도 잊히지 않고 남아 있네요.

개구리 앨리스는 연못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뒷다리로 스물여덟 번 발길질하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헤엄쳐 갈 수 있는 바로 그 연못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갈매기가 말하는 ‘바다’라는 게 보고 싶어 무작정 길을 떠납니다. 험한 여정과 모험을 거쳐 동경하던 바다와 만난 앨리스! 힘겨운 여정에 지친 앨리스는 달빛에 의지해 다시 자신이 살던 연못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바다를 경험한 앨리스가 다시 바다를 그리워하다 결국 바다로 떠난다는 반전이 재밌습니다.

처음에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 ‘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라는 제목에 갸우뚱했습니다. ‘바다가 보고 싶은 개구리’가 아니라, 왜 과거형 제목일까 궁금했었지요. 그래서 원제목을 확인해 보니 ‘The Frog Who Wanted to See the Sea’이군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아하! 하고 웃었답니다. 늘 제자리로 돌아와야만 하는 우리 현실과는 다르게 자신이 원하는 곳을 찾아 새로운 세상에서 즐기고 있는 개구리 앨리스의 모습 덕에, 가슴 속 물꼬가 트이는 듯 왠지 모를 통쾌함이 느껴집니다.

앨리스는 바다에서 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까? 아님 바다에서 계속 살고 있을까? 그것도 아님 집과 바다를 오가며 살고 있을까? 아마도 앨리스는 바다에서 또 다른 호기심을 찾아, 나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지 않았을까?

앨리스, 앨리스 하니 또 한 권의 그림책이 떠오르네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아니구요, 바로 『미스 럼피우스』. 이 그림책을 본 어른들은 대부분 “와우~!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이 이렇게 멋지다니!” 하는 놀랍다는 반응인 데 비해, 보통 서점에서 권하는 대상 연령대로 아이들에게 보여 주면 조금 지루해 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아마 이 책의 그림 너머, 내용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깨닫기엔 대상 연령이 너무 낮게 잡혀 있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꼬마 앨리스는 어른이 되면 먼 곳을 여행을 하다가 나이가 들면 바닷가 집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 앨리스 곁에서 앨리스의 할아버지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죠. 하지만 꼬마 소녀 앨리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앨리스는 어릴 적 소원처럼 먼 곳을 여행하며 자신의 첫 번째 꿈을 이룹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바닷가 마을로 돌아오면서 두 번째 꿈도 이루지요. 이제는 할머니가 된 앨리스(미스 럼피우스)는 일 년간 아팠던 사이에 마당에 심었던 루핀 꽃이 언덕 위까지 번진 것을 보고는 문득 어린 시절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라던 할아버지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그녀는 루핀 꽃씨를 주문해서 주머니 가득 꽃씨를 담고 마을 곳곳을 누비며 꽃씨를 뿌리고 다니지요. 이듬 해 봄, 온 마을에 피어난 눈부시게 아름다운 루핀 꽃들! 어린 시절의 약속을 기억하고 가슴속 깊이 품었던 꿈을 이루어 가는 긴 과정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그림책입니다.

제 딸아이인 겨레는 대여섯 살 무렵 이 책을 처음 접했는데, 처음 반응이 아주 열광적이었습니다. 사실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인데 어떤 부분이 이토록 좋았을까 하고 보니, 예술가인 할아버지 곁에서 그림에 하늘 색깔을 칠하는 모습,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장면, 먼 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럼피우스 곁을 따라다니는 작은 얼룩 고양이……. 요런 그림들을 재밌어 했어요. 조금 더 자라서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나기 시작해서 그런지 럼피우스가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있는 장면을 좋아했고요.

이제 열한 살 된 딸아이는 아직도 이 그림책을 좋아하는데요. 얼마 전 제게 이렇게 묻더군요.

“엄마, 엄마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엄만 네가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그걸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는데.”
“내가 가장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글쎄, 그게 뭘까? 엄만 네가 그걸 꼭 찾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덧붙입니다.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이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일이면 좋겠다고요. 그런데, 이 말을 하면서 저도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이제 열한 살 아이에게 너무 어려운 말이 아닐까? 나 자신도 아직 그걸 찾지 못했으면서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냐, 자꾸 자꾸 듣고 새기다보면 아이도 언젠가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고, 그 길을 찾아가려고 좀 더 노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몇 년 전 이 그림책을 사 주면서, 책 속에 작은 메모로 적어 준 편지가 눈에 띕니다. ‘미스 럼피우스가 뿌린 것이 단순히 꽃씨뿐이었을까? 그건 이웃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을 뿌린 거라 엄만 생각한단다. 우리 딸, 사랑 많은 사람으로 자라렴!’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 그러면서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은 나를 찾아 떠나는 가장 진지한 물음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일 것도 같습니다.
이선주 | 아이와 함께 오늘은 뭘 하고 놀까 궁리하다 그림책 놀이를 시작했고, 이 이야기들을 월간 『열린어린이』에 연재해 큰 호응을 얻어 『그림책과 놀아요』(열린어린이, 2007)로 펴냈습니다. 아이 이름을 딴 사이트 ‘겨레한가온빛’에 겨레가 커 가는 이야기, 그리고 아이와 함께 만나는 책 이야기를 꾸준히 담고 있습니다. 아이와 그림책을 함께 고르고 읽고 놀이한 이야기들이 많은 엄마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