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통권 제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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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깊이 들여다보기]
나의 아름다운 도서관

이상희 | 2009년 06월

한때 내 꿈은 사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살아도 되는’, ‘책을 마음껏 빌려가서, 실컷 읽을 수 있는’ 사서 선생님! 실제로 어린 시절, 내가 드나들던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들은 책 나라의 제왕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장’이나 ‘구청장’ 쯤은 되는 권력으로 나를 폐가식 서가에 들어가게 해주거나 반납 기일을 넘겨도 눈감아 주었고, 대출대를 지키게 하거나 책 정리 일을 거들게(톰소여 식 담장 칠하기!) 해주었지요. 책이 좋아서도 도서관을 드나들었지만,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서 선생님들이 내게 보여주는 관심이 따스했지요.

절대 행복에 속하는 그 기억들은 내 대뇌에 ‘나의 아름다운 도서관’이라는 제목을 달고 찬란히 아로새겨져 있습니다만, 사서가 되려면 사서 교육원이나 대학교의 관련 학과를 수료하고 관련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든가, 사서가 되면 오히려 책을 많이 읽을 수 없는 처지가 되기 쉽다거나, 때에 따라서는 책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런저런 사실을 다 알고 나서도 사서 선생님들을 만나면 어느새 몽롱한 눈빛을 하고 막무가내 동경을 표하곤 합니다. 동경할 뿐만 아니라, 시시때때 머릿속으로 소설 같은 걸 쓸 때도 주인공 내레이터로 떠올리곤 하는 캐릭터가 으레 소도시의 시립 도서관 사서였으니, 아마도 그이들을 경쟁 구도 바깥의 나른한 인문주의자로 입력해 둔 채 동일시하며 선망했던 모양입니다. 내가 만나온 사서 선생님들 대부분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는 하되, 책을 마음껏 빌려서 실컷 읽을 새는 없이, 이용객들과 인문주의자적 공감을 권유하거나 나눌 새도 없이, 도서관 규모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온갖 업무 부담에 시달리는 조직 구성원 처지였는데도 말입니다.

요컨대, 한 시절의 꿈은 못 이루었으되 ‘사서 선생님’은 여전히 선망하고 동경하는 존재라는 것, 나의 사서 캐릭터와는 무척 다른 분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도서관이 키운 아이』(원제 ‘사서들이 키운 아이’)와 같은 그림책은 마치 내가 예전에 써 둔 것이라 여겨질 만큼 낯익고도 친숙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런 책을 번역하라고 보내왔으니, 엔돌핀이 넘쳐흘러 울울창창 가로놓인 일들을 죄다 밀쳐놓고 덤벼들었었지요.)

멜빈은 리빙스턴 공립 도서관에서 살았어요. 흠…… 실제로 살았던 건 아니고요.
거기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첫 장면에서 사서 선생님인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 머리를 던져 놓고, 멜빈이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냈는지는 그림 작가의 솜씨로 얘기하게 합니다. 새내기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쬐끄만 안경 쓴 아이가 ‘밤에도 낮에도 책 읽는 기사’ 발치에 백 팩을 벗어던져 둔 채, 부럽고 부러워라, 아늑한 캐노피 아래 독서등 불빛 속 소파에 앉아 그림책 읽기에 빠져 있는 장면을 보세요! 이 꼬마가 도서관에서 행복하게 지낸 지도 벌써 한참 되었겠다는 걸 한눈에 보여줍니다. 그러고는 날마다 방과 후에 들르는 멜빈을 반기고 환영하는 사서 선생님들 모습을 통해 이 아이가 도서관에 오는 이유가 책 읽기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보여줍니다.

사실 멜빈으로 말하자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줄줄이 꼬리를 무는 호기심 박사요, 잡다하나마 자기 취향을 확실하게 드러낼 줄 아는 아이입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 대출대의 사서 선생님들을 올려다보는 멜빈의 백 팩에 뱀 지퍼 고리, 야구 지퍼 고리, 딱정벌레 배지가 달려 있지요. 게다가 좋아하는 책들과 사서 선생님들이 늘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까다롬쟁이……. 수더분한 아이는 아닌 거지요.

“안녕, 멜빈!” 마즈 선생님이 인사했어요.
“오늘 학교에선 재미있었니?” 베티 선생님이 물었지요.
 “바깥 날씨는 어때?” 리올라 선생님도 물었어요.


이러니 멜빈이 사서 선생님들과 도서관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지요. 어린 시절 나의 사서 선생님들 또한, 이처럼 열렬하진 않았지만, 바삐 일하다가도 어서 오라고 꼭 아는 척을 해주었고, 우리 도서관에서도 아이들이 들어오면 꼭 이름을 묻고 여러 번 불러주자고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 엄마가 아무한테나 이름 알려 주지 말랬어요.’ 이런 말로 무안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내 이름을 알려 줄 테니 너도 알려 달라고 떼를 쓰곤 하지요. (좀 엉뚱한 진단이랄 수도 있겠지만, 요즘 아이들 대부분이 연예인이나 유명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어디서도 자기 이름을 불러 주는 ‘열광적인 반김’을 받지 못한 정서적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사서 선생님들은 꼬마 이용객을 그처럼 반기고 환영한 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멜빈의 지적 욕구에 호응하고 부응합니다. 멜빈이 뱀에 대한 책을 찾으면, 뱀 사육 지침서와 뱀가죽 공예 책과 뱀에 관한 시집에다 인터넷 검색에서 찾아낸 뱀 관련 웹사이트까지 찾아줍니다. 야외 관찰 수업에서 잡은 곤충 표본 이름을 찾으러 왔다가 유리병을 놓치는 바람에 벌어진 벌레 대소동을 수습하자마자 ‘이 세상 바다와 강과 호수에 사는 물고기는 얼마나 돼요?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개랑 고양이랑 집이랑 또 자동차랑 트랙터를 다 합하면 얼마만큼 무거워요?’라는 비실용적이고 대책 없는 질문에도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대답합니다.

사서 선생님들이란 이런 분들이에요.
아이들을 도와주지 않고는 못 배긴답니다.


이제 작가들은 사서 선생님들과 함께한, 멜빈의 성장점으로 상징될 만한 에피소드를 차례차례 펼쳐놓습니다. 사서 선생님들 덕분에 멜빈은 남들이 하찮다고 여기는 ‘거대한 가지’ 역할도 열정을 다해 훌륭하게 해내면 자신의 기쁨은 물론 타인의 박수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도서관 행사를 마음 깊이 즐기게 되고, 취미에 열중하는 자신을 존중받고, 힘쓰고 노력하고 준비해서 거둔 성취감을 만끽하며 자라갑니다. 그러는 동안 멜빈은 도서관 일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등학생이 되고, 도서관이 키운 아이는 졸업식을 치릅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사서 선생님들과 기념사진을 찍지요.

멜빈이 졸업하던 날, 마즈 선생님과 베티 선생님과 리올라 선생님은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던지 울음을 터뜨렸어요.
“얘는 우리 아들이나 다름없어.”
“우린 멜빈이 책 읽는 걸 도왔지.”
“세상 모든 책을 말이야.”


멜빈은 대학교에 가서도 자기를 키워 준 리빙스턴 도서관과 사서 선생님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같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도서관으로 돌아오지요.

몇 년 뒤에 또 다른 아이가 리빙스턴 공립 도서관에 나타났어요. 이 아이도 도서관을 무척 좋아했지요.

“안녕, 스털링.”
마즈 선생님이 인사했어요.
 “야외 관찰 수업은 재미있었니?”
베티 선생님이 물었어요.
 “그 곤충들이 뭔지, 우리 함께 알아볼까?”
리올라 선생님도 물었지요.
 
“우린 이 곤충들이 뭔지 금세 알아내고 분류해서 목록도 만들 수 있단다.
우린 그러지 않고는 못 배겨.”
리빙스턴 공립 도서관에 새로 온 사서 선생님이 말했어요.
“우린 바로 그런 사람들이거든!”


나의 아름다운 도서관들과 사서 선생님들, 나의 꿈을 대신 이룬 멜빈과 멜빈을 키운 사서 선생님들, 세상의 모든 도서관을 떠올리며, 새삼 오래된 행복에 잠겨 봅니다.
이상희│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었습니다. 지금은 시와 그림책 글을 쓰고 강의하면서 원주의 그림책 전문 꼬마 도서관 ‘패랭이꽃 그림책 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고양이가 기다리는 계단』 『도솔산 선운사』 『엄마, 생일 축하해요』 『소 찾는 아이』 『선생님 바보 의사 선생님』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등이 있고, 수많은 영어 그림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