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통권 제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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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자연

[어린이가 있는 풍경]
너댓 살 적 쌍둥이, 그 어느 날들의 기록 3

이지호 | 2009년 06월

7. 서이의 외롭고 위험하고 즐거웠던 공원 나들이

【1】 놀이터로 쌍둥이를 찾아 나섰다.
서이는 날 보자마자 공원으로 가자고 했다.
공원이라고 해 봤자 별 게 아니다.
나무 몇 그루 있고 나무 사이로 잔디가 깔려 있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공원이라는 게 그렇지.

서이가 앞서 걸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단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미끄럼틀에 매달려 있었다.
공원에 갈 생각이 없는 듯해서 놀이터에 그냥 두기로 했다.
우리 아파트의 베란다에서는 놀이터가 내려다보이니까,
아내한테 전화하여 이따금 살펴보게 하면 그만이다.

한참 걸어가던 서이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내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는가 했는데,
눈빛이 그게 아니었다.
놀이터를 향해서 단디를 소리쳐 부른다.
단디는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돌아보지도 않는다.

서이가 단디한테 뛰어가서 뭐라고 한다.
단디는 도리질을 한다.

“할 수 없지. 우리끼리 가자.”
되돌아온 서이가 나보고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나도 서이 따라 일부러 볼멘소리로 말했다.

쌍둥이의 기분을 맞춰 주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쌍둥이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하는 척,
쌍둥이가 싫어하면 나도 싫어하는 척.
단디가 공원에 함께 가지 않는 것이 뭐가 그리 속상한지…….
연신 중얼중얼 투덜투덜.

“공원에 가면 좋은데.”
이건 미끄럼틀에 올라앉은 단디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한 말.

“놀이터는 재미없는데.”
이건 땅바닥의 돌멩이를 걷어차며 한 말.

돌멩이가 또그르르 구르더니 내 발밑에서 멈췄다.
“돌멩이를 왜 차냐?”
같잖아서 내가 한마디 했다.
“그냥.”
귀찮다는 듯 서이가 짧게 말했다.

서이가 또 다른 돌멩이를 걷어찼다.
이번에는 내 발에 맞았다.
슬리퍼를 신은 터라 제법 아팠다.
“야, 인마! 아빠가 아파.”

“단디도 가면 좋은데.”
내 말에는 대꾸도 않고 단디 쪽을 또 한 번 힐끔 돌아보며 그렇게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냅다 뛴다. 한마디 더 하고.
“단디 미워.”

늘 붙어 지내는 쌍둥이라 그런가.
공원에 혼자 가는 것이 저다지도 외로울까.

‘네 살배기 인생’이라는 것도 있을까.
모르지.
‘아홉 살 인생’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2】 아파트 안에도 찻길이 있다.
찻길 건널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늘 쌍둥이한테 이야기한다.

우리 집의 찻길 건너는 법.
1) 건널목에서 멈추기
2) 엄마나 아빠 기다리기
3) 한 손은 엄마나 아빠 손 잡고 다른 한 손은 번쩍 들고 찻길 건너기

‘단디 미워.’ 하고 냅다 뛰기 시작한 서이가
찻길에 다다랐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내가 소리쳤다.
“기다려!”

그런데 서이가 그냥 뛴다.
너무나 외로워서 찻길 건너는 법도 까먹은 것일까.
차가 한 대 지나쳤지만, 별 일은 없었다.

그래도 야단은 칠 일이었다.
“야, 인마. 차가 오면 기다려야지. 혼자 뛰면 어떡해? 다친단 말이야.”
서이도 할 말은 있었다.
“그래서 뛰었잖아. 안 다치려고.”

내가 멈추라고 했을 때, 자신은 이미 차도 안에 있었다는 것인데,
말이 되는 말인가.

【3】 서이의 우울 모드 때문에 죽어난 것은 나였다.
그날 나는 달리기를 엄청 해야 했다.
서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공원에서 하는 달리기 시합이니까.
늦둥이를 둘 예정인 사람은 먼저 체력 단련부터 부지런히 하시길.

달리기를 끝내고 걷다가 공원 주차장을 지나게 되었다.
우리는 자동차 번호판 읽기 놀이를 하기로 했다.
이 날, 서이는 숫자 읽기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다음은 그 예이다.
6746 → 육 사 칠 육
5960 → 오 구 육 영
2177 → 칠 칠 십이
2589 → 이십오 팔 구
5611 → 오 육 십일

서이의 숫자 읽기 방법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서이는 0~9의 숫자는 자유자재로 읽는다.
그리고 10~29의 숫자는 자릿수를 맞추어 읽을 수 있다.

나로서는 아주 즐거운 공원 나들이였다.
서이도 그랬을 것이다.
달리기도 실컷 했지.
숫자 읽는 방법도 아빠한테 가르쳐 주면서 뻐길 수 있었지.
(2005. 3. 7. 월)

8. 네모 아저씨가 테이프 조심하래요

태풍 나비가 펄펄 날아오던 날의 일이다.
이런 날이면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그럴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전화로 안부나 물어볼 수밖에.

서이가 전화를 받았다.
쌍둥이와 전화 통화를 하면 늘 반복하는 대화가 있다.

“아빠, 뭐 해?”
“공부해.”
(바둑을 두고 있을 때조차도. 그래야 ‘통화는 간단히’가 되니까.)
“학생들 있어?”
“갔어.”
“그럼, 아빠. 얼른 집에 와.”
“왜?”
“나, 아빠 보고 싶는데.”
“나도 보고 싶어.”
“그런데 왜 안 와?”

그런데 이 날은 바로 그 ‘그런데’의 다음이 달랐다.
‘왜 안 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빠.”
“응.”
“네모 아저씨가 테이프 조심하래요.”

나는 혼자서 빙긋이 웃었다.
스스로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저 말을 이다지도 빨리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테이프는 비디오테이프가 분명했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정황 증거가 있다.

그 전날, 일찍 집에 들어갔는데,
단디가 ‘대머리 빡빡, 대머리 빡빡’ 하고 거실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쌍둥이 엄마에게 물어봤더니,
조금 전에 비디오 가게에 가서 「호빵맨」을 빌려왔는데,
그것이 신 나서 저런다는 것이었다.

이를 기억해 낸 나는 서이가 말한 비디오가 「호빵맨」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 다음의 추리는 일사천리였다.

쌍둥이는 손에 넣은 만화 비디오를 한 번 보고 끝내는 법이 없다.
두 번 세 번은 물론이고 네 번 다섯 번도 본다.
그러려면 물론 테이프를 여러 번 되감아야 한다.

쌍둥이는 테이프 되감기를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다툰다.
이 과정에서 꼭 사단이 생긴다.
기기는 물론이고 테이프까지 상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테이프 조심’이 ‘망가진 「호빵맨」’에서 유래된 말임을
터럭만큼도 의심할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네모 아저씨가 누군지 알아맞히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다.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은 비디오 가게 주인 아저씨뿐일 터.

비디오 가게 주인이 아줌마였는데, 하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 남편이 가게를 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흘려 버렸다.

그래도 주인 아저씨의 얼굴은 궁금했다.
어느 정도로 얼굴이 각이 졌으면, 서이가 네모 아저씨라 부를까.

밤이 깊어서 집에 오니, 쌍둥이는 자고 있었다.
늦은 저녁밥상을 받으며, 아내한테 테이프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내 이야기를 듣다 말고 킬킬거렸다.
내가 멀뚱거리자, 쌍둥이 엄마는 오히려 날 타박한다.

어찌된 아빠가 아들 말도 못 알아듣느냐고.
서이가 한 말은 ‘테이프 조심’이 아니라 ‘태풍 조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네모 아저씨는? 하고 나는 물었다. 아내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아내는 인터폰을 가리켰다.
그리고 덧붙였다.

관리 사무소에서 태풍 나비가 다가오니 각 가정마다 조심하라고 방송을 했는데,
방송의 목소리가 아저씨의 목소리였단다.

네모 모양의 인터폰을 통해서 목소리를 전하는 관리사무소 아저씨.
그 아저씨는 그 날부터 우리 집에서는 ‘네모 아저씨’가 되었다.

태풍 나비는?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울산을 할퀴느라 내 어린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진주는 비켜갔다.
(2005. 9. 9. 금)

※ 이 글에 실린 그림은 『두발자전거 배우기』(김영진 그림, 고대영 글, 길벗어린이, 2009)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편집부
이지호│진주교육대학에서 어린이 문학과 국어 교육을 가르치면서 어린이 문학 관련한 논문과 평론을 씁니다. 평론집 『동화의 힘, 비평의 힘』과 『글쓰기와 글쓰기교육』 등을 펴냈고 『너는 커서 뭐 할래?』 등 동시집도 엮어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