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8월 통권 제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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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서평]
비껴나 있었던 날들에 대한 회한

윤석연 | 2009년 08월


“오! 로라 불쌍한 우리 아기.”
엄마라면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엄마라면 그랬을 겁니다.
모성이 신화가 된 사회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픔을 헤아리고, 보듬고, 돌보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그래서 망루에 올라가 불타 죽은 생명이나,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다시 망루에 오르는 목숨에 대해서는 짐짓 모르쇠하면서도 우리들 기억 어딘가에 있었던 (아니면 있을 듯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한 때를 신화처럼 간직하려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죽은 엄마를 잊지 못해 (아니, 잊을까 봐) ‘기억의 끈’을 놓지 못하는 로라 이야기는 사실 내 이야기이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로라는 뒷마당 잔디밭에 앉아 아빠와 제인이 페인트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둘은 참 다정해 보이네요. 로라는 엄마가 물려준 빨간 벨벳 상자를 열어 마흔세 개의 단추들이 꿰여 있는 ‘기억의 끈’을 꺼내 봅니다. 고양이 위스커스에게 단추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죠. 할머니가 어른이 되고 처음 입었던 드레스의 단추, 아빠가 오랜 전쟁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입고 있던 군복의 단추,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실 때 입고 있었던 잠옷 단추.

그런데 그 기억의 끈이 고양이 위스커스의 발톱에 채여 끊어지고 마네요. 단추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아빠와 제인과 함께 단추를 찾아 ‘기억의 끈’을 다시 이으려 하지만 아빠의 군복 단추 하나만은 찾을 수가 없네요. 돌아가신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단추였죠. 잃어버린 단추 때문에 로라는 잠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전혀 차이가 없을 거요.”
“다락방에 있는 상자들 중 하나에 옛날 군복이 들어 있을 거요. 단추를 하나 떼어서 잔디밭에 갖다 놓으면 돼요. 로라는 절대 모를 거요.”
아빠는 로라의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 이런 제안을 하지요.

“그 끈에 있던 단추들은 진실한 순간들이잖아요.”
“다른 것을 가지느니 로라는 차라리 그 단추를 잃어버린 채로 있고 싶을 거예요.”
“그건 마치 엄마처럼,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거예요.”
제인이 아빠를 타이르죠.

다음날 로라는, 제인이 요정이 가져다 준 선물처럼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둔 단추를 보았답니다. 로라는 처음으로 제인의 눈을 바라봅니다.
“단추 끼우는 거 정말 도와주실 거예요?”
“그럼!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난 여기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잃어버린 단추는 엄마가 돌아가실 때 입고 있었던 잠옷 단추가 아니라, 돌아가신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단추였을까요? 왜 엄마는 아빠가 오랜 전쟁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입고 있던 군복의 단추를 가장 좋아했을까요?

로라가 기억하려는 건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기억일지 모릅니다. 그 단추에는 전쟁에 나간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나날들, 엄마의 생애 가장 아팠고, 절박했던 기억들을 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인은 알고 있었답니다. 로라가 기억하려는 건 엄마의 기억이라는 걸.

그리고 로라는 제인의 셔츠 단추가 짙은 초록색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예뻤습니다! 언젠가는 로라가 기억의 끈에 끼우려고 제인에게 단추를 하나 떼어 달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단추는 제인의 단추란다. 내가 처음으로 제인의 눈과 마주했던 날, 제인이 입고 있던 옷에 달려 있었던 단추란다.”

그리고 또, 혹시라도 고양이 발톱에 ‘기억의 끈’이 끊어진다면 아마 로라는 제인의 단추를 제일 먼저 찾을지도 모릅니다. 그 단추에는 전쟁에 나갔던 아빠 이야기,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엄마의 기억, 그리고 마치 엄마처럼 그 단추를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알아챈 제인의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요.

아이에게 이 책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이야기를 엮어 보라고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궁금합니다. 뒷마당 잔디밭에 앉아 페인트칠을 하는 아빠와 제인을 바라보는 로라의 눈은 나뭇잎 사이로 얼비추는 햇살 탓일까요, 아빠와 제인 너머의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빨간 벨벳 상자를 열어 기억의 끈을 집어 들지만 로라의 시선은 여전히 ‘기억의 끈’ 너머에 있는 것 같구요. 억지로라도 고양이에게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사실은 로라가 아빠와 제인에게 들려주려던 이야기일 테죠. 고양이 발톱에 채인 조각난 기억들은 화면 밖으로 튀어나가고, 화면 밖으로 튀어나간 단추들과 페인트 붓을 떨어뜨리고는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제인의 모습…….

그렇지만 로라의 시선은 제인을 비껴가 있답니다. 제인이 다가서며 “오! 로라 불쌍한 우리 아기.”라고 할 때도. 로라는 늘 그림 안에서 아빠와 제인을 바라보고 있죠. 그림을 안과 밖을 자유로이 오고가는 고양이 한 마리, 뒷마당 잔디밭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 있지만, 뭐 그다지 끼어들고 싶지는 않은가 봅니다.

잃어버린 단추를 손에 쥔 제인의 표정을 보았나요? 제인과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며 웃는 로라의 마음이 보이나요? 이 책은 재혼 가족이 겪는 상처와 치유로도 읽히겠지만, 저는 모성의 관계 맺기로 읽었습니다. 엄마들의 이야기로요.

로라의 엄마는 오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남편의 군복에서 단추를 하나 떼어내어 ‘기억의 끈’에 꿰어 놓았습니다. 엄마라면 그랬을 겁니다. 제인은 그 단추에 담겨 있는 로라 엄마의 절박한 소망을 헤아립니다. 로라가 잃어버린 게 단순히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단추’가 아리라, 단추에 담긴 로라 엄마의 마음이라는 걸 알았던 거지요.

“오! 로라 불쌍한 우리 아기.”
엄마라면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헤아리고, 보듬고, 돌보는 엄마들의 이야기로 읽힙니다.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사람을 불러들이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억들을 끄집어 놓고 있습니다. 이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의 끈으로 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건 기억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 또 기억의 조각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거지요. 마치, 돌아가신 엄마를 기억하듯이 그 기억들은 따뜻하고, 안타깝고, 못내 미안합니다. 살아 계실 때 미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탓으로 눈물짓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저마다 이토록 애절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어떻게든 그 사람과의 기억 하나쯤은 남겨 두려고들 애쓰는 일. 혹시, 그동안 헤아리고, 보듬고, 돌보는 일을 하찮게 여기고 살았던 마음 한자리의 미련, 그리고 정작 헤아리고, 보듬고, 돌보는 일에서 비껴나 있었던 날들에 대한 회한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잃어버린 모성에 대한 열망으로 읽힙니다. 그 배경에는 애잔한 기억들을 애초부터 품지 못하게 짓누르는 아버지도 있구요. 그렇지만 정말로 잃어버린 모성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한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려는 그 자리에 지금 그 순간에도 생명을 걸어야 겨우 겨우 살아 남는, 사람답게 사는 것을 포기하고서야 겨우 겨우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그 ‘기억의 끈’에 그 사람들의 절박한 순간들이 담긴 단추들도 함께 꿰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단추 끼우는 거 정말 도와주실 거예요?”
윤석연│ 세상의 많은 작은 것들을 좋아하고, 좋은 이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고, 격식이나 예절, 서열, 질서 따위를 싫어합니다. 늘 싫고 좋음을 분명하게 말해 버려 가끔 미움도 받지만, 언제나 씩씩하고 즐겁게 살고자 애씁니다. 그리고……혹시 글 쓰는 걸로 이 세상 선한 일들에 보탬이 된다면 꾸역꾸역 하겠다고 맡고 나서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