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9월 통권 제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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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가 있는 풍경]
아이도 속울음을 울더라

이지호 | 2009년 09월

[1] 멍멍이, 안녕

단디는 강아지를 좋아한다. 우리 집 왕베개에 그려져 있는 곰을
커다란 강아지라고 막무가내로 우길 정도로 강아지를 좋아한다.
그래서 인형도 강아지 인형만 좋아한다.
일본에 갈 때도 단디는 장난감이라고는 강아지 인형 세 마리만 가져갔다.
똘똘하게 생겼다 해서 똘똘이, 머리를 뽀글뽀글 볶았다 해서 뽀글이,
살아 있는 멍멍이와 똑같이 생겼다 해서 멍멍이.
단디는 이들 셋 중에서도 멍멍이를 가장 좋아했다.
일본에 갈 때도 일본에서 돌아올 때도
멍멍이만큼은 짐가방 속에 넣지 않고 제 품 속에 끼고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올 때였다. 김해공항에서 단디가 멍멍이를 잃어버렸다.
화장실에 가면서 멍멍이를 대합실 의자에 놓아두었다는데,
그 잠깐 사이에 누가 멍멍이를 집어갔다는 것이다.
나는 짐을 부치러 갔고 애엄마와 서이는 우유를 사러 갔는데,
그 사이에 그런 일이 생겼다. 

우리는 대합실의 의자를 모두 살폈고, 쓰레기통도 뒤졌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한테도 강아지 인형을 못 봤느냐고 물어 보았다.
찾을 수 있다고 기대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렇게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단디를 달래기가 쉬울 것 같아서였다.
물론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더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울산행 공항버스 막차가 떠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다행스러운 것은 그때까지 단디가 슬픈 표정을 짓긴 했어도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

우리는 앞뒤 좌석으로 나눠 앉았다.
서이는 나랑 앉았고, 단디는 엄마랑 앉았다.
단디의 기분을 짐작했는지, 서이는 엄마의 옆자리를 단디한테 순순히 양보했다.

공항버스는 금방 공항을 벗어났다.
단디가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돌아봤는데, 단디는 내내 창밖만 보고 있었다.
잘 견디고 있구나 싶어,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참 피곤한 하루였던 것이다.

슬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 잠이 깼다.
나는 그것이 단디의 울음소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내가 그 전에 들었던 단디의 울음소리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슬픔을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지 못해 터뜨리는 울음.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차올라온 듯한 울음.
그래서 듣는 이 마음까지 저리게 만드는 절절한 울음.
여덟 살밖에 안 된 아이도 그런 속울음을 운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공항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뒤를 돌아봤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2]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엄마, 같이 가.”
단디의 톤 높은 소리에 잠을 깼다.
목도 마르고 해서 거실로 나왔다.

애엄마는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었고,
단디는 가방을 둘러메면서 제 방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단디야. 오늘은 안 돼. 넌 이도 아직 안 닦았잖아.”
“엄마가 기다려주면 되잖아.”
“엄마, 늦었어. 오늘은 혼자 가. 엄마 먼저 간다.”
“엄마, 오늘은 이 안 닦을게. 전에도 안 닦고 갔거든.”

단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은 열렸다 닫혔고,
단디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럴 땐 단디 역성을 들어줄 필요가 있다.
“엄마도, 참. 쫌만 기다려주지.”
현관문을 열고 나가 엘리베이터를 살폈다.
말이나 행동이나 모두 시늉으로 한 것임은 물론이다.

단디가 여느 때와 달랐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린다.
서이가 단디를 잡아 일으키려 했다. 학교 가자고.
단디는 꼼짝도 않는다. 서이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서이더러 먼저 가라고 했다.

한참이나 지나서 단디는 집을 나섰다.
이미 지각은 따 놓은 당상.
그런데 현관문이 금방 다시 열렸다. 단디였다
“왜 안 가고?”
뭘 빠뜨렸나 했다. 단디는 곧잘 그러니까.
“아빠, 학교 못 가겠어.”
단디는 울먹울먹했다.
단디는 담임선생님을 무서워했다. 지각했다고 혼날까봐 저러는가 보다 했다.

“아빠가 전화해 줄게. 단디 조금만 혼내시라고.”
“그게 아니고…….”
“그럼, 뭐?”
“발이 안 떨어져.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어.”

투정도 가지가지다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내가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단디가 교문에 들어서는 걸 보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밥을 먹으려고 식탁을 정리하는데, 또 현관문이 열렸다.
단디였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다. 억지로 참아 누르고.

“교실 앞까지 데려다 줄까?”
“아니.”
“학교 가기 싫구나. 싫으면 가지 마.”
“학교에 가고는 싶은데, 갈 수가 없어.”
“왜?”
“마음이 아파서.”
“왜 마음이 아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단디한테는 엄마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였단 말인가.
그렇거나 말거나 그것은 오늘 일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엄마랑 집을 함께 나서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자 저 난리인 것을.

기가 찼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단디의 말은 이미 흐느낌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일 년 전에 공항 버스에서 본 것과 똑같은 속울음의 흐느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디의 얼굴은…….
글쎄, 공황 상태에 빠진 얼굴이라고나 할까. 보는 내가 겁이 날 정도였다.

[3] 단디의 세 번째 속울음 대신에

나는 아직 단디의 세 번째 속울음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단디한테서 아이의 속울음을 본 느낌으로 이 자리를 메울까 한다.

아이들은 울기도 잘 하고 웃기도 잘 한다.
울다가도 금방 웃고 웃다가도 금방 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의 울음과 웃음을 가볍게 생각한다. 
그 울음과 웃음의 근원인 아이들의 감정까지도 가볍게 생각한다.
오히려 놀리기까지 한다. ‘울다 웃으면 똥구멍에 솔 난다’고.

단디는 속울음 두 번으로 나로 하여금
저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 자체를 달리 보게 만들었다.
아이한테도 어른 못지않은 절절한 감정이 있음을 알게 하였고,
그 절절함 여부를 어른의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게 하였고,
아이를 존중하려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하였다.

문득 ‘울다 웃으면 똥구멍에 솔 난다’를 다르게 해석하고 싶어진다.
정말로 똥구멍에 솔이 난다면? 아이들은 진저리를 칠 것이다.

우리가 이 말로 아이들을 놀려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런데 아이들이 진저리를 치는 것은 솔이라서가 아니다.
털이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모습이 또래와 달라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을 지적하는 것에 진저리를 치는 것이다. 부끄러워서.

‘똥구멍에 솔 난다’가 어른이 되는 것을 은유한 것이라면
‘울다 웃으면’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울다 웃으면’을 ‘울다 웃다 하다 보면’으로 풀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우리의 옛말은 뜻이 달라진다.
‘아이들이 울다 웃다 하다 보면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다’로 읽히게 된다.

이 옛말이 놀리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의 변화무쌍한 감정과 그것의 즉각적인 표출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의 마음이다.

우리네 삶이란 것이 그렇지 않은가.
울다 웃다 하다 보면 어느새 한평생 다 가버리고,
또 어느 순간,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 또는 살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너무 엉뚱한가?
그냥 재미로 읽어주시길. 

※ 이 글에 실린 그림은 『광모 짝 되기』(오은선 그림, 이향안 글, 현암사, 2009)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편집부
이지호│진주교육대학에서 어린이 문학과 국어 교육을 가르치면서 어린이 문학 관련한 논문과 평론을 씁니다. 평론집 『동화의 힘, 비평의 힘』과 『글쓰기와 글쓰기교육』 등을 펴냈고 『너는 커서 뭐 할래?』 등 동시집도 엮어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