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통권 제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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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깊이 들여다보기]
어린이가 바라는 소재, 작가가 바라는 의미

김지은 | 2009년 11월

1. ‘바라는 책’과 ‘바람직한 책’ 사이의 거리

어린이 독자는 어떤 책을 읽고 싶을까. 작가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동화 작가라면 고민해 봤을 문제다. 어린이가 ‘바람직한(바랄 만한)’ 동화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독자와 마음이 통하면 좋겠다는 것은 작가로서 당연한 소망이다.

그러나 작가가 동화를 쓸 때 마음에 걸리는 또 하나는 이 작품이 얼마나 ‘바람직한가’이다. 여기서 ‘바람직’의 주체는 일단 사회의 시선이겠다. 동화 작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감수성과 시각을 표현하는 데 적극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걸 써도 되나’라는 느슨한 자기 검열까지 벗어던진 것은 아닌 듯하다. 잣대는 다양해서 동화에 ‘담배’라는 낱말이 나와도 되는지 걱정했다거나 주인공 어린이를 밤 몇 시까지 길거리에서 혼자 돌아다니게 할지 고심한다는 식이다. 누가 강요한 건 아니지만 작가 스스로 ‘바람직한 어린이의 삶’에 대한 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고민이다. 

자기 검열이 작품의 부정적 파장에 대한 경계심이라면 긍정적 파장을 꿈꾸는 열정도 있다. 작품 속에 작가가 지닌 ‘바람직한 삶’이나 ‘바람직한 세상’에 대한 생각을 담고 싶다는 열정 말이다. 동화의 형식에 여러 파격과 실험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많은 작품의 주제는 작가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과 관계가 있고 주인공의 통과의례는 나름의 계몽적 성취로 끝맺는다. 

안타까운 것은 어린이들이 ‘바라는’ 이야기는 작가가 골라낸 ‘바람직한 이야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다. 대형 서점에 가보면 어린이들이 ‘바라는’ 책은 대개 비닐로 싸 놓은 책이다. 그 비닐포장 안에는 선정적인 외모 가꾸기의 기술이나 맥락 없는 폭력의 신화, 아이돌 스타가 되는 어설픈 비법 같은 것이 가득하다. 계산대에 서면 ‘학습서나 문제집 몇 권 더하기 비닐 포장된 책 한 권’이라는 타협을 선택한 가족을 여럿 볼 수 있다. 어린이들은 흐뭇한 얼굴로 서점을 나서는데 떼를 썼든 공부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든 ‘바라는’ 책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어쩌란 말이냐. 시쳇말로 막장 동화라도 쓰라는 거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책과 문학적으로 성취를 이룬 책 사이의 간극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해묵은 레퍼토리를 반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막장의 유혹에 건강한 대안이 될 수 있는 동화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일단은 어린이들이 ‘바라는’ 소재로 뛰어들어야겠다. 어린이들이 ‘바라는’ 소재는 어떤 것일까? 

2. 연습생이 되고 싶은 아이들

최근 ‘수퍼스타 K’라는 케이블 프로그램이 화제였다. 일반인을 연예인으로 데뷔시켜 주는 프로그램이다. 모집 20일 만에 출연 지원자만 16만 명을 돌파했다. 바야흐로 모두가 연예인을 꿈꾸는 시대다. 오디션 현장에 가면 12세 전후의 어린이가 가장 많다고 한다. 한 케이블 채널의 초등학생 장래 희망 조사에서는 76%가 연예인이라고 응답했다.

연예인의 데뷔 연령 또한 낮아지는 추세인데 이 때문에 어린이들은 연예인을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자기 직업’으로 인식한다. 열다섯 살쯤 데뷔를 하려면 열 살 무렵 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간다. 연예인을 제외한 어떤 직업도 어린이를 받아들이진 않는다. 어린이들은 ‘연예인이 된다’는 것을 ‘어른이 된다’와 비슷한 의미로 보는 것 같다. 얼른 어른이 되어서 끝없는 경쟁과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놓여나고 싶은 것이다. 당장 어른처럼 회사에 들락거리면서 돈도 번다는 것은 상당한 유혹이다. 연예인을 꿈꾸는 어린이들에게 연습생 생활의 어려움을 말해 주면 ‘알아요. 하지만 학교에 안 가도 되잖아요.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런 고생은 해도 좋아요.’라고 한다. 여기에 어른들은 ‘공부하기 싫으니까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화려해 보이는 그 세계에도 그늘이 있다고 핀잔을 준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학교는 가기 싫고 연습생이 되고 싶다는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담긴 핵심어는 ‘꿈’이 아닐까. 연습생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인 꿈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기획사는 지금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따라오는 것이 네 소중한 꿈을 이루는 길이라고 설득한다. 학교는 그만한 삶의 연습 프로그램을 갖고 있기나 한가. 학교가 꿈을 주지 못하기에 어린이들이 꿈을 찾으러 다른 곳에 모여든 것일 수도 있다. 획일적인 입시 경쟁에 진을 빼다가는 꿈은커녕 아무 것도 될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이 그들을 엄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 꿈을 안겨줄 만한 동화를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3. 80년 전의 연습생들

『나는 조선의 가수』는 많은 어린이들이 ‘바라는’ 가수의 꿈을 다룬 동화다. 1937년 일제 강점기 한 악극단의 연습생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스타가 되겠다고 경성으로 올라온 연실이는 아직 열네 살이다. 가까스로 오디션을 통과하지만 80년 전 그 시절에도 가수의 길이란 만만치 않다. 선의의 경쟁자인 동료 경애, 이미 가수로 데뷔하여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은심이와 악극단 사람들과 좌충우돌하며 성장한다. 척 봐도 제목이 내용 전체를 요약하고 있는 데다 스타 후일담류의 뻔한 이야기일 거라는 짐작이 들어서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보았다.  

그런데 짐작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요즘 어린이들도 호기심을 가질 만한 내용에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서러움과 아픔이 묻어나 독특한 이야기의 감정선이 생겼다. 오늘날 어린이들이 입시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예인’이라는 꿈을 갖는다면 연실이는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수를 꿈꾼다. ‘꽁보리밥도 못 먹는 가난한 살림살이가 지긋지긋했’고 ‘다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 치다꺼리를 하는 것도 신물이 났’다. 가수가 되면 다 풀릴 것 같았나보다. 홀홀단신으로 경성역에 내린 연실이에게는 이미 경성에 와서 식당일을 하는 고향 오빠 용철이가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도 연실이의 도전에는 퇴짜를 놓는다.

“가수가 되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서 하는 말 아니니? 소학교 학예회 나가서 노래를 부르는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그런 거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상일 거다.”(24쪽)

이 작품의 힘은 근대 악극단의 연습생 생활을 꼼꼼히 묘사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 내용이 흘러간 노래처럼 고리타분하지 않고 생생하다. 작가가 재현한 연예 산업 초창기의 악극단 모습은 어느 아이돌의 숙소를 들여다보듯 흥미롭다. 연실이는 그 안에서 오늘날 대형 기획사의 오디션을 갓 통과한 풋내기가 겪을 법한 여러 가지 일을 겪는다. ‘꽃보다 남자’ 대신 ‘춘향전’이 인기극이라거나 소녀시대 대신 이난영, 고복수의 음반에 열광하는 것이 다를 뿐 극단 내부의 치열한 데뷔 경쟁이나 선배의 텃세 같은 부분은 지금 연예계 얘기와 비슷하다.

작가는 연실을 둘러싼 주변 인물을 구현하는 데도 공을 들인다. 연실의 성공을 돕고 격려하는 호랑이 선생님 윤해준이나 연실에게 배우의 기본기를 길러 주는 특출의 존재는 이 작품이 잘 짜여진 성공담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들은 단순히 연실의 성공을 돕는 조력자를 넘어서서 그 시대 예술인의 고뇌를 드러내는 개성적 인물이다. 특히 식민지 현실에서 참다운 예술의 역할을 묻는 윤해준 선생의 존재는 이 작품이 단순한 스타의 후일담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윤 선생은 사랑을 노래하는 악극이 아니라 자유를 노래하는 악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인데 연실과 이 문제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밖에 동료 경애가 연실과 발전적인 경쟁을 벌이는 대목이나 유명 가수 은심이를 편협한 악역으로만 그리지 않은 점 등도 인상적이다. 연실이를 1인 영웅으로 내세우기 위해 주위 인물의 결함을 강조했더라면 감동을 자아내기는 더 쉬웠을 것이다. 선과 악의 신파적 구도로 몰고 가지 않으려는 작가의 결심이 느껴졌다.

연실의 이야기처럼 평범한 사람이 화려한 꿈에 도전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관심거리다. ‘하이스쿨 뮤지컬’이라는 케이블 외화 프로그램이 어린이 시청자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른바 어린이들이 ‘바라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동화로 나온 작품이 별로 없는 걸 보면 작가들은 이 소재의 가치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별로 ‘바람직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하은경 작가는 어린이들이 ‘바라는’ 연예인 이야기를 ‘일제 강점기’라는 다른 시간의 축 위에서 흥미롭게 다루었다. 특히 배경을 과거로 설정한 것은 어린이가 ‘바라는’ 소재에 작가가 ‘바라는’ 의미를 앉힐 수 있는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4. 순정만화 속의 여성, 동화 속의 여자 어린이

『나는 조선의 가수』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연실의 모습이었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연실이의 세계관이나 삶의 태도는 어린이 독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연실은 기존 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 같지 않다. 스스로 수동적 여성의 이미지를 강화하기도 한다. 연실에 대한 주위의 시선은 ‘고집스러움’으로 요약되는데 그것만으로는 매력적인 주인공이라 하기 어렵다.

“흠, 네가 똥고집을 부려 봤자지!” (12쪽. 연실 어머니의 말)
“어휴, 이런 똥고집. 그러니까 만날 제 어머니한테 욕이나 들어 먹지.”(24쪽. 용철의 말)
“저래 뵈도 연실이 저게 엄청 사납거든. 누가 장가들 지 꼭 잡혀 살 것이구먼!” (90쪽. 악극단 아저씨의 말)

이 작품에서 연실의 꿈과 도전은 단순한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연실이 작품 속에서 고집을 뛰어넘는 자립적 도전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연실은 자주 운다. ‘눈물콧물을 훔치며’ 분가루를 쓸어 모으고, 어머니가 짐을 싸라고 하니 ‘울고 불며 매달리며’, 대본을 읽다가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고향친구 난희의 편지를 읽고는 편지지가 젖을 만큼 운다. 까다로운 은심의 야단을 맞으면 눈물만 뚝뚝 떨군다. 이렇게 눈물 많은 연실이가 용철 오빠 앞에만 서면 ‘곱게’ 눈을 흘긴다. 마냥 나긋나긋한 애교 소녀가 된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주인공이 되겠다는 욕심도 스스로 누그러뜨린다. 

모습이 귀여운 듯 용철은 웃음 띤 얼굴로 연실을 보았다.
“이왕이면 네가 주인공을 맡았으면 좋겠구나.”
잠자코 있던 용철이 한술 더 떠서 부추겼다.
“오라버니두……난 그런 욕심 없어요. 게다가 은심 선배님이 계시는데 턱도 없어요.”
“흠,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 할매라도 하겠다! 그때 보니까 너보다 노래를 더 잘 부르는 배우는 한 명도 없더라. 네가 노래 하나는 참말로 잘 불렀잖니.”
“오라버니두 참…… 그거야 소학교 학예회 나갈 적에나 듣던 소리지요.”(109~110쪽)

눈물로 고난을 견디는 여자 주인공과 그를 달래주는 듬직한 남자 친구의 이야기는 과거 순정만화에서 적잖이 보아온 장면이다. 주인공 연실이가 지금보다는 더 씩씩했으면 좋았겠다. 신파적 영웅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도전을 책임지고 경영하는 담대한 여성상으로 그려졌으면 좋았겠다.

과거 순정만화를 보면 여주인공은 숨겨진 나약함을 무기로 남성 조력자 앞에서 운다. 눈물로 고난을 이기고 도움을 얻는다. 결정적인 판단은 남성 인물에게 의존한다. 이에 비해 남성 인물은 폭넓은 역사 인식에 너그러움까지 갖춘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로 그려지기 십상이다. 어려울 때마다 연실을 일으키는 용철 오빠의 존재는 불편하다. 철 지난 순정만화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용철 오빠는 진작 일제 탄압의 현실에 눈을 뜬 반면 연실의 고민은 자기 발치에서만 맴돈다. 용철 오빠가 징병 가는 장면에 이르면 주인공이 뒤바뀐 느낌까지 든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윤해준이나 특출 같은 연실의 조력자가 모두 남자다. 여성 가수 연실이의 멘토가 되어 줄 현명한 여성 조력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마지막에 연실과 인터뷰를 하는 경성일보 기자 김재환까지 작품 속 긍정적 인물은 모두 남성 일색이다.

마지막 장면 김재환 기자 앞에서 보여준 연실의 태도도 못 미덥다. 연실은 윤해준 선생을 대신해 악극에 담긴 고귀한 정신을 설명한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을 맡았던 자신에 대해서는 ‘노래가 부르고 싶어서 고향을 도망쳐 나온 아이’라고만 소개한다. 노래를 듣고 울고 웃는 사람을 만났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파랑새의 눈물’을 불러 좌중을 통탄에 젖게 한 가수, 경찰서에 끌려가 ‘자유를 노래한 가사’였다고 외치던 그 연실이로 보기에는, 결말은 지나치게 무기력한 모습이다.

수동성의 대명사였던 순정만화의 여주인공도 그 모습이 바뀐 지 오래다. 최근 순정만화에는 ‘운명에 부응하기 위해서 부단히 자신을 단련하는 가련한 여성’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는 명확한 적과 싸우거나 맞설 줄 아는 여성’이 나온다. 그들은 남성 앞에서 ‘한숨짓거나 눈물 흘릴 여유’가 없다. (노순동, 『시사저널』 512호, 1999년 8월 12일자. ‘[만화]순정 만화의 놀라운 변신’ 중에서.)

 작가가 좀 더 패기 있게 연실을 그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작품의 서정성에 누를 끼치는 것이었을까. 모르긴 하지만 그 시대에도 연실이보다 한결 씩씩하고 야무진 여자 어린이가 경성 악극단 한 구석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답답한 세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5. 『명혜』의 경우,  꿈에 도전하는 여러 얼굴을 기대하며

일제 강점기 여성 어린이의 도전을 그린 또 다른 작품으로 『명혜』가 있다. 작품은 좀 더 건조하지만 풍부하게 형상화된 인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열다섯 살 소녀 명혜는 가수가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에 뛰어든다. 명혜는 넉넉한 양반 집안의 딸에 신식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연실과 차이가 있다. 그러나 명혜와 연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일구어나가는 힘의 문제다. 물론 연실도 끊임없이 꿈을 이루려 노력한다. 그러나 명혜의 노력은 훨씬 더 목적적이고 비의존적이다. ‘여자이기 이전에 조선 백성’이라면서 독립운동을 돕고 타인을 위해 자신의 꿈에 도전한다. 주인공 명혜뿐 아니라 그의 친구 낙경은 이 시대를 사는 어린이들이 보기에도 호감을 가질 만한 자율적 여성상이다. 명혜를 의사의 길로 이끄는 신선생님도 인상적인 여성 조력자이다. 이러한 여러 명의 여성 인물이 어우러져 발산하는 빛은 ‘여성의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던져준다. 작가는 명혜 개인에게 그 시대의 여성의 짐을 모두 지우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명혜는 1인 영웅이 아니지만 남성 의존적인 인물도 아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서점에서 특히 여자 어린이들이 즐겨 보는 비닐 포장책 가운데에는 ‘남자 친구 시선을 사로잡는 선이 고운 옷차림’이라든가 ‘사랑스럽게 보이는 온순한 말씨’에 대한 조언 같은 것이 들어 있다. 가수가 되고 싶다면 매력적인 힙 라인을 위하여 어려서부터 스트레칭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도 들어 있다. 어린이들이 ‘바라는’ 책의 현실은 이렇다. 그들은 이런 책더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아무 꿈을 꾼다. 동화 작가는 그들의 꿈속으로 들어가 더 많은 작품을 창작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바라는’ 소재에 대해 활발하게 대안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작가적 ‘바람’을 형상화해야 한다. 『나는 조선의 가수』는 그런 접점에 도전해 본 경쾌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이 ‘바라는’ 소재일수록 세상의 왜곡된 관념들에 더 가까이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100년 전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오늘날 어린이들에게 공명을 일으킬 수 있도록 창조해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실은 이 까다로운 작업에서 거두어들인 부분적 성공인 셈이다. 어린이의 바람과 작가의 바람이 만나 탄생할 하은경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새로운 인물을 기대해 본다.
김지은│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심리 철학과 철학 교육을 전공했습니다. 동화 작가이며 철학자로, ‘어린이를 위한 철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바람 속 바람」이 당선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어린이의 도덕, 어른의 도덕」 등 발표한 평론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