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통권 제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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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가 있는 풍경]
현수네

이지호 | 2009년 11월

[1] 홍옥

추석이라고 홍옥 한 상자를 보내왔다, 현수 아빠가.
누가 찾아오면 보는 데서 똑딱 따서 옷에 쓱쓱 문질러
저부터 한 입 베물고 건네준다는 바로 그 홍옥.
까탈스러운 손님이 껍질을 깎고 먹을라치면
현수는 그 껍질을 낼름낼름 받아먹는다지.
현수랑 일주일 함께 지낸 우리 집 쌍둥이,
사과 한 알씩 들고 현수마냥 껍질째 아그작아그작 씹어먹는다.
차례상에 못 올라갈 못생긴 놈 하나 골라,
나도 쌍둥이마냥 껍질째 아그작아그작 씹어먹는다.

[2] 천생연분

아는 게 산밖에 없었다는 현수 아빠
고등학교만 마치고 지리산에 들앉았고,
서울하고도 국세청에 다니던 현수 엄마
산타기를 즐기다 보니 지리산까지 찾아들게 되었고. 
스치다 보면 마주치고 마주치다 보면 만나게 되는 법.
산장지기가 그랬다지. 시골에서 살래요?
세무공무원이 그랬다네. 시골에서 살래요.
시집 안 갈 줄 알았던 노처녀가 시집간다 해서일까,
땡전 한 푼 없는 노총각 따라 시골로 간다는데도
현수 외할머닌 얼씨구나 했단다. 

[3] 꽃사과

현수네 사과밭 들머리에 꽃사과나무 몇 그루.
사과도 아닌 것이 사과 아닌 것도 아닌 것이
홍옥처럼 발그레 물들어가고 있었다.
엄지만한 놈 조막만한 놈 한데 엉겨 붙은 게 영락없는 꽃송이.
사과밭 꾸미려고 꽃사과를 심었나.
그게 아니란 듯, 현수 아빠, 작년에 담았다는 꽃사과술을 내온다.
그렇지. 술이라면 사과보다야 꽃사과지.
배보다는 돌배고, 살구보다는 개살구고.
그래도 그렇지. 사과밭에서 술 먹자고 사과 자리에 꽃사과를?
아하, 그것도 아니라네.
꽃사과나무는 사과나무의 씨내리란다.
사과나무만 심으면 맺히고 달리는 게 부실하단다.
잘난 놈보다 더 잘난 못난 놈이 있다는 거,
현수네 사과밭의 꽃사과 보고 알았다.

[4] 뒷간

동시 쓰는 농사꾼 서정홍 선생, 그 집엔 뒷간이 둘이다.
남자 따로 여자 따로가 아니고 똥 따로 오줌 따로다.
똥거름 쓸 데 따로 있고 오줌거름 쓸 데 따로 있어서 그랬단다.
몸이 안 좋아 수녀 생활 접고 처녀로 할머니가 된 농민회 회장님.
그 집 뒷간엔 밑이 막힌 변기통과 재통 그리고 모종삽 하나.
똥이든 오줌이든 볼 일을 봤으면
모종삽으로 재를 듬뿍 떠서 골고루 덮은 뒤에
남김없이 퍼다가 뒷간 옆 거름자리에 버리란다.
제가 싸지른 거 제가 거두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며.

이 두 집 뒷간보다 더 유명한 현수네 뒷간.
어느 호사가가 인터넷에 올린 사진 때문이라지.
그 사진 본 이는 현수네 찾으면 뒷간부터 들여다본단다.
어느 촌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푸세식 변소.
색다른 게 있다면, 벽을 책이 가득 꽂힌 책장으로 둘러쳤다는 것.
여보쇼, 현수 아빠.
방 한 칸 마루 한 칸, 손바닥만한 집이라
책장 둘 자리 없어 뒷간 잠깐 빌린 게지?

[5] 현수

(1)
안의면 어느 산자락 사과밭집 외아들 초등학교 3학년 현수는
방학이든 아니든 날마다 면에 간다.
산비탈 10분 걷고 자전거 20분 타고 친구 만나러 면에 간다.
어른들은 면이면 다 면인가, 면사무소 있는 데가 면이지, 하고.
아이들은 면이면 다 면인가, 학교 있고 친구 있는 데가 면이지, 한다.

(2)
장염에 걸려 병원에 드러누웠던 현수.
조금 살 만해지자 부랴부랴 짐 챙겼다.
시뻘건 김치 따끈한 쌀밥 먹고 싶어
얼른 집에 가야겠단다.

(3)
구구?
몰라요.
칠칠?
몰라요.
사과가 여덟 개 들어가는 사과 상자가 일곱 개 있어. 사과는 모두 몇 개?
오십 육 개요.
구구셈은 못해도 사과셈은 잘 하는
사과밭집 외아들 박.현.수.

(4)
아파트는 아무 데나 오줌 눌 수 없어서 가기 싫다던 현수가
그 아파트라는 곳에 초등학교 2학년 쌍둥이가 있다 하니 솔깃해 한다.
친구 만나러 날마다 한 시간을 길바닥에 까는 현수니 그럴 만하지.
현수네서 일주일 머물렀던 우리 집 둘째가 오금을 박는다.
“너도 우리 집에 일주일 있어야 서로서로 공평하지.”
지켜보던 현수 엄마, 갔다 오라며 손짓으로 떠민다.
현수는 얼떨결에 차에 올라탔는데,
나도 얼떨결에 차를 움직였는데,
현수 쪽 차창을 두드리며 현수 엄마가 하는 말.
“옷은 쌍둥이 걸로 갈아입어.”
나? 당황했고 말고.
옆자리에 앉은 둘째.
“현수 엄마답네요.”
역성인가 했는데 감탄이었다.
“절더러 방에서 같이 자자던데요.
불편할 것 같아 제가 마루에서 자겠다고 우겼지만요.”
나? 더 당황했고.
나와 너의 거리를 그렇게까지 줄일 수 있는 현수네 때문에.
그것을 알아채고 애비한테 일러 줄 만큼 부쩍 자란 둘째 때문에.
그럼, 현수는?
그저 창밖만 멀뚱멀뚱.

(5)
현수를 보면
아이한테는 부모만 한 교사가 없다는 것을
절로 알게 된다.

※ 이 글에 실린 그림은 『우리 동네 올챙이 연못』(모혜준 그림, 이상권 글, 사계절, 2009)에서 가져온 것입니다.━편집부
이지호│진주교육대학에서 어린이 문학과 국어 교육을 가르치면서 어린이 문학 관련한 논문과 평론을 씁니다. 평론집 『동화의 힘, 비평의 힘』과 『글쓰기와 글쓰기교육』 등을 펴냈고 『너는 커서 뭐 할래?』 등 동시집도 엮어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