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통권 제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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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 만드는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염미희 | 2009년 11월

어린이 책을 처음 배우던 새내기 편집자 시절 일이다. 그땐 신문도 참 열심히 봤다. 기획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를 보면 스크랩하곤 했었는데, 어느 날 ‘한겨레 옛이야기’ 광고를 보고 오려 두었던 생각이 난다. 내가 주로 만들던 책이 번역 그림책이어서 그랬을까? 우리만의 옛이야기를 시리즈로 펴낸다는 게 굉장히 근사하게 느껴졌다. 나도 언젠가 이런 책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한겨레 옛이야기’와의 첫 만남이었다.

얼마 안 가 그런 생각은 모두 잊어버렸다. 잡다한 업무와 바쁜 하루하루 속에서 옛이야기에 대한 환상은 손때 묻은 스크랩 파일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5년 뒤쯤 이곳 한겨레아이들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에도 옛이야기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옛이야기 시리즈는 이미 완간된 구간, 한겨레아이들의 효자 상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26권 『장화홍련전』을 시작으로 고전소설 후속편을 펴내면서부터 나는 ‘한겨레 옛이야기’의 편집자로 합류했다. 중간에 1~10권의 개정판도 만들었으니, 절반 이상의 탄생 과정을 지켜본 셈이다. 직접 겪지 못한 시절의 사연은 전해들은 이야기로 메워 한겨레 옛이야기 소사(小史)를 적어 봐야겠다.

1999년 첫 선을 보인 ‘한겨레 옛이야기’ 신화편 다섯 권은 출판계에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빠져 있던 아이들에게 우리 신화를 처음으로 소개한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지고 신과 인간이 어우러졌던 우리만의 신화를 어린이 책으로 펴냈다는 사실만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바리공주, 자청비, 강림도령 같은 매력 넘치는 ‘우리 신’ 캐릭터도 반응이 뜨거웠다.

2000년에는 조선 시대 인물설화를 모은 인물편 다섯 권이 나왔다. 조선의 대중적인 소설이었던 『박씨전』을 고쳐 쓴 『조선의 여걸 박씨부인』은 초판 출간 이후 지금까지 1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2001년부터 2003년에 걸쳐 나온 전설편, 민담편은 총 50여 편의 옛이야기를 담았다. 널리 알려진 도깨비 이야기부터 조금은 낯선 이계 여행담까지 다양한 옛이야기가 뽑혔다. 슬픈 이야기 혹은 웃기는 이야기만 모아 한 권으로 엮은 색다른 시도도 있었다.

2004년, 옛이야기의 백미라면 백미랄 수 있는 고전소설 다섯 권이 나왔다. 『허생전』 『춘향전』처럼 잘 알려진 이야기와 『이생규장전』처럼 덜 알려진 이야기를 섞었다. 기대와 달리 ‘덜 알려진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다소 썰렁했다. 그리고 고민에 빠졌다. 완간, 할까 말까? 5년에 걸쳐 다섯 갈래 총 스물다섯 권의 책을 펴냈으니, 아무래도 모양새 있게 마무리 짓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그래서 ‘완간’ 소식을 알리고, 5년 동안 정성 들여 만든 책들이 꾸준히 팔리기만을 기다렸다. 여기까지가 1부이다.

한겨레아이들은 ‘한겨레 옛이야기’의 역사를 1부에서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옛이야기가 출판계에 불러일으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사람들은 옛이야기의 잠재력을 보았다. 옛이야기가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콘텐츠의 원형이라는 공감대가 만들어졌고, 특히 작가들은 창작의 원천을 찾아 신화에 파고들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다투어 고전을 권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다양한 옛이야기 책이 나오기도 했다.

독자들의 기대와 작가들의 열망은 ‘한겨레 옛이야기’를 질책했다. 완간을 살그머니 취소해야만 했다. 2007년에는 다섯 권으로 끝내기에 못내 아쉬웠던 고전소설이 다섯 권 더 나왔다. 『장화홍련전』 『심청전』 같은 대중적인 이야기를 참신하게 접근했고, 『한중록』 『구운몽』처럼 다소 어려운 주제의 이야기도 어린이 눈높이로 끌어내렸다.

일찍 시작한 만큼 모자람이 많았던 신화편과 인물편은 2008년 개정판을 출간했다.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와 독자들의 반응을 바탕으로 아이템을 재조정하고 글과 그림도 새로 발주했다. 개정 작업에만 1년 가까운 시간이 들었다. 광고 일정까지 다 잡아 놓았는데 그림이 나오지 않자, 작가를 회사로 불러 밤샘 작업을 시킨 살벌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업그레이드된 신화 속, 역사 속 캐릭터들에 대한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올해 나온 건국신화편은 사실 2006년에, 고전소설편 후속으로 함께 기획된 것이다. 서울대 국문과 조현설 교수님은 원래 건국신화편의 기획자로 만났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기획안과 직접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소화할 작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기획자가 다섯 권의 집필까지 맡게 되었고, 책이 나오기까지 장장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건국신화편을 끝으로 ‘한겨레 옛이야기’는 ‘진짜’ 완간되었다. 서른다섯 권의 책이 나오는 데 꼬박 10년이 걸린 셈이다. 완간 홍보를 위한 사진 촬영을 했는데, 한데 모아 보니 10년 동안 나온 시리즈 치고는 볼륨이 작다. 게다가 표지 콘셉트도 제각각, 책등 디자인도 제각각. 외형만 보자면 솔직히 볼품이 없다. 하지만 그 제각각의 책들이 보여주는 다채로움이 오히려 ‘한겨레 옛이야기’만의 진솔한 매력이라면 지나친 걸까?

서른다섯 권의 목록을 처음부터 만들고 출발한 건 아니었다. 시간을 정하고 일정에 맞추어 출간된 책들도 아니었다. 한 권 한 권 나오기까지 저마다 사연도 많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시간이 필요할 때면 함께 기다렸다. 더 좋은 생각, 더 근사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언제든 고치고 바꾸었다. 전체의 일관성보다 각 권의 개성이 돋보이는 시리즈라니! 이렇게 10년 동안 ‘한겨레 옛이야기’는 성장했고, 또 진화했다.

‘한겨레 옛이야기’의 10년은 한겨레아이들의 10년이기도 하다. 옛이야기와 함께한 편집자들은 한겨레출판사의 대표이사, 주간, 팀장이 되어 대가족을 이끌고 있다. 서른다섯 권의 책을 만들며 만난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은 또 다른 책으로 인연을 이어 가며 한겨레아이들의 얼굴이 되어 주었다. 옛이야기 책의 ‘스타일’을 제시하며 아낌없는 실험 정신을 보여준 디자이너들도 한겨레아이들의 오랜 파트너로 함께하고 있다.

숨은 공로자는 또 있다. 옛이야기를 발굴하고 가려 낸 연구자들이다. 구비설화를 전공한 건국대 신동흔 교수님, 고전소설을 전공한 부산대 정출헌 교수님, 그리고 동아시아 신화 연구가 조현설 교수님이 한겨레 옛이야기를 기획하고 집필했다. 으레 민담, 전설만 떠올리던 옛이야기의 범주를 신화, 설화, 고전소설 등으로 확장하고 총망라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전문가들의 기획이 한몫을 했다.

‘한겨레 옛이야기’의 주요 타깃은 초등학교 중학년이다. 옛 사람들의 놀라운 기지와 상상력을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매번 중요한 고민거리였다. 어린이가 읽기에 부담스러운 화소를 줄이거나 변형하면서도 원전의 의미를 전달하려 애썼다. 『장화홍련전』의 끔찍한 몇몇 장면은 살짝 고치거나 빼야 했지만, 납량특집을 능가하는 표지의 오싹한 구성은 원전의 맛 그대로였다. 『구운몽』의 ‘인생무상’이 아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아했을 때, ‘그러니 한번 살아 볼 만한 인생’이라는 신동흔 교수님의 해설은 무릎을 치게 했다.

지난 9월 건국신화편 세 권을 마지막으로 내면서, ‘한겨레 옛이야기’의 완간을 ‘널리’ 알렸다. 엄마들은 역시 시리즈를 좋아하는지, 광고를 보고 문의전화를 주시는 분들이 많다.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서른다섯 권을 통째로 살 수 있는지 물어보신다. 난감하게도, 아직 전권 세트 상품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상품을 만들어야만 ‘한겨레 옛이야기’의 과업도 끝나는 셈이다.

그래서 ‘한겨레 옛이야기’는 아직도 진화 중이다. 서른다섯 권의 책등 디자인은 통일성을 주어 새로 꾸미기로 했다. 독자들이 세트를 구입해 책장에 꽂았을 때 흐뭇한 마음이 들 수 있도록 말이다. 어떤 박스에 넣어 어떻게 팔 것인지도 고민이다. 올 겨울에는 온라인ㆍ오프라인 서점과 매체를 통해 다양한 이벤트도 열 계획이다.

『아기장수 우뚜리』 개정판을 만들 때의 일이다. 마지막 장면으로 아기장수 전설이 전해지는 연못 그림이 들어갔는데, 일러스트레이터는 연못 안에 우뚜리를 그리고 싶어 했다. 바로 앞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우뚜리가 다시 나오는 게 이상해서 난 빼자고 했지만, 일러스트레이터는 ‘죽었지만, 어쩐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 같다’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은 우뚜리를 그림자처럼 시커멓게 그려 넣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가끔씩 그분의 이야기가 떠올라 웃음 짓곤 한다. 이야기 속에서는 분명히 죽었는데, 죽지 않았다고 우기는 고집에는 우뚜리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우뚜리, 옛이야기의 마력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어느 날 마음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하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작은 불씨 말이다.
염미희 | 한겨레아이들 편집부에서 일합니다. 낮에는 어린이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밤에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됩니다. 출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 두 눈을 감으면 배낭을 메고 세계를 누비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