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1월 통권 제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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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책 이야기]
눈부신 처음의 순간들을 바라며
――늘 처음처럼

김원숙 | 2010년 01월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한 살을 더 보태는 게 부담스러운 나이가 되었다. 세웠던 계획 중에 이룬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앙상하고 너덜거리는 세밑.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새해가 기다려진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삶의 출발선에 선다. 늘 겪는 일이라 해도 시작하는 순간은 설레고 떨린다.

언뜻 그림책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부엉이와 보름달』의 표제지 그림이다. 처음 순간의 설렘이 그림 안에 응집되어 있다. 아이는 아버지와 겨울밤에 부엉이 구경을 가기로 했다. 오빠들처럼 부엉이를 구경하러 가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아이는 보름달이 뜬 밤 드디어 부엉이를 보러 간다. 부엉이 구경을 나가기 직전, 아이는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밖이 춥고 어둡다는 것쯤은 아이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검푸른 빛의 겨울 숲과 빨간 외투를 입은 아이의 대비, 아이의 뒷모습에 벅찬 설렘이 묻어난다.

숲 속으로 들어간 아이는 때때로 아빠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야 했다. 그렇지만 한번도 아빠를 소리쳐 부르지 않았다. “부엉이 구경을 나가면 조용히 해야 한”다고 아빠가 늘 말했기 때문이다. “시커먼 소나무들이 뾰족뾰족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모습이 무섭고, “누군가 얼음 손으로 내 등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추워도 아이는 혼자서 견뎠다. “부엉이를 본 날도 있었고 부엉이를 못 본 날도 있었”다는 오빠들의 말을 떠올리면서 실망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추위를 참고 다짐하는 아이의 마음결이 어여쁘다. 처음 가는 부엉이 구경길이 아이에게 이렇게 설렘과 용기와 인내를 주었다. 나는 아이처럼 자신이 기다린 것들을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대하고 용기 내고 견디며 살고 있는가,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일 분이었는지 “어쩌면 백 분이었는지도” 모를 짧은 순간 동안 아이와 아빠는 부엉이를 바라보았다. 부엉이를 보고 난 뒤 이제 말을 해도 되고 크게 웃어도 된다는 것을 알지만 아이는 “소리 없는 그림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에게 부엉이를 직접 본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진다. 

아이가 이렇게 감동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의 현명함이 있어서일 것이다. 부엉이 구경을 나갈 때 아빠는 아이 혼자서 두려움과 추위에 맞설 기회를 주었다.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따뜻하게 해야 되”는 걸 가르쳤고 안쓰럽다고 아이의 손을 먼저 잡아 주지 않았다. 스스로 감당하여 부엉이를 보고 나서야 아빠는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진정으로 자식을 위할 줄 알았던 것이다. 책 내용처럼 아이는 따스한 아빠 품에서 “부엉이와 보름달 아래를, 침묵하는 날개에 실려, 날아가는 소망”을 가슴에 품었을 것이다. 보름달보다 눈부신 처음의 순간이라 하겠다.

하지만 세상 한쪽에는 또 다른 처음의 순간이 있다. 「새우가 없는 마을」 이야기에는 슬픈 처음의 순간이 그려져 있다. 생활 보호 대상자인 할아버지와 사는 손자 기철이. 9년 전에 엄마가 집을 나갔고, 7년 전엔 아빠마저 빚을 지고 도망간 뒤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 4학년 기철이다. 아빠 빚 때문에 할아버지는 이발소를 팔아야 했다. 이제는 빈 병을 주워 얻는 돈과 보조금으로 겨우 생활한다. 자장 라면이 주식이다시피 하다. 자장 라면을 먹을 때마다 기철이는 진짜 자장면 맛이 어떨까 궁금하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자장면을 사 먹자고 조른다. 자장면 값이 자장 라면 여섯 개 값이고 방세도 모자라서 안 된다고 하시던 할아버지도 결국 자장면을 사 주겠다고 하신다.

가을 내내 모은 빈 병을 판 돈으로 기철이는 드디어 자장면을 먹게 된다. 중국집에 갈 때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었으면서도 할아버지는 짐짓 자장면 먹을 때는 이렇게 편하게 입는 거라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처지지만 손자가 기죽지 않게 하려고 허풍 섞인 말을 한 것인데, 자장면을 먹으러 가는 기철이는 그저 기분이 좋아 이렇게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한테 옷이 많은 것 같았다. 꼭 좋은 옷을 많이 두고 평범한 옷을 입은 기분”이 든다고. 그 순간에도 자장면 생각에 기철이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일상에 불과할 일이 기철이에게는 특별히 기쁜 일이라는 것이 마음 아프다.

30분쯤 걸어 동네에 하나 있는 중국집에 도착한 두 사람. 자장면 두 개를 시키고 물을 마시는 기철이에게 할아버지는 물배 차면 자장면 못 먹는다고 말한다. 30년쯤 전에 나 역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 있다. 자장면이 대단한 외식이었던 옛날 일이다. 지난 시절 얘기가 지난 얘기만은 아닌 사람들이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책 읽어 주러 가는 공부방에도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사는 아이, 한 부모 가정의 아이, 엄마가 동남아에서 온 다문화 가정 아이 들이 있다. 간식거리라도 갖고 가면 공부방 아이들은 우르르 달려와 먹는다.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평범한 먹을거리에 시큰둥해 하는 요즘 아이들과 공부방 아이들이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

처음 먹어 본 자장면이 기철이는 “아주 아주 근사하게 느끼”하다고 생각한다. 맛있냐고 물었을 때 “입에 자장면이 꽉 차서 대답할 수가 없”어서 “왼손 엄지손가락을 들어 ‘최고’ 표시를 했”을 정도로 자장면을 먹는 순간, 기철이는 행복했다.

중국집 차림표에서 깐소새우를 본 기철이는 할아버지와 새우 얘기를 나누고 또 나중에 사람 손바닥만 한 새우를 사먹기로 한다. 그리고는 겨울 내내 모은 병과 박스를 판 돈 2만 원을 들고 새우를 먹으러 갔지만 새우는 못 먹고 새우깡만 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멀쩡한 이유정』이라는 단편집 안에 들어 있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다.

처음으로 자장면을 먹는 순간이라니……. 처음의 순간이 이토록 아릴 수도 있었다. 요즘 같이 음식이 흔한 세상에 자장면을 처음으로 먹는다는 게 설득력이 있는가, 그렇게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자장면은 많은 사람이 누리고 살더라도 세상 한쪽에서는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건 아닐까.

그나마 기철이에게는 따스한 할아버지의 품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애처로운 위로겠지! 『0에서 10까지 사랑의 편지』에 나오는 어네스트도 특별한 처음 순간을 경험한 아이다. “좀처럼 웃는 법이 없”고 “언제나 똑같은 하루하루가 지겹도록 되풀이되고 이어졌”던 어네스트의 삶은 빅투와르가 전학 오면서 달라진다. 스스럼없고 활기찬 빅투와르는 열네 형제의 외동딸이다.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는 어네스트와 달라도 너무 다른 대가족의 일원이다. 아들만 내리 열둘을 낳은 부모님이 기필코 딸을 얻겠다는 각오로 빅투와르를 낳았다. 딸을 낳은 일이 아빠 엄마의 승리라서 이름도 ‘승리’, 빅투와르라고 지었단다. 어네스트는 빅투와르 집에서 가족과 사랑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빅투와르의 어린 동생이 해맑게 어네스트를 껴안았을 때 어네스트는 생전 처음 자신의 얼굴에 살풋 미소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떠난 뒤 말을 잃은 할머니와 살았기에 여태껏 어네스트를 껴안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네스트는 그렇게 외로운 아이였다. 하지만 빅투와르를 만나고 나서 벼락처럼 사랑을 알게 되었고, “잠자던 마음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자신과 성이 같은 작가에게 편지를 보낼 때 어네스트는 “우리 반 여자아이를 알게 되면서 비로소 전 산다는 일이 이처럼 신 나고 좋을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고 쓴다. 그 저자가 자신의 아빠인 줄 몰랐던 어네스트. 할머니한테 편지 뭉치를 받고서야 아빠가 십 년 동안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걸 알게 된다. 그제야 자신이 버림받은 아이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랑이 길을 연 곳에서 다시 사랑을 찾게 된 것이다.

세 권의 책 말고도 처음 순간의 설렘과 감동이 담긴 이야기는 많다. 아이들에게는 순간순간이 다 처음일 테니. 처음의 용기, 처음의 도전, 처음의 맛, 처음의 사랑. 모양은 다르지만 그 설렘과 행복은 공통이다. 해가 바뀌고 새해 새날들을 살다 보면 우리는 다시 처음의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다가올 그 처음의 순간들에는 사랑과 용기가 가득하길 바란다. 그리고 기철이 같은 슬픈 처음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원숙 | 때때로 책 한 권 들고 강가에 가서 책 읽는 즐거움을 누리다 추위가 몰려와 다른 즐거움을 찾는 중이다. 좋은 사람과 여행할 단꿈을 꾸며 겨울을 나고 있다.

이 글에 나온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