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4월 통권 제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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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깊이 들여다보기]
제 깜냥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김지은 | 2010년 04월

1. 길고 넓은 어린이의 하루

어린이의 하루는 길다. 먹기도 자주 먹고 싸기도 많이 싼다. 무엇보다 어린이가 하루에 어질러 놓은 방바닥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쉼 없이 바작바작 움직이는 까닭도 있지만 빠져들면 무슨 일이든 실컷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탓이기도 하겠다. 한 시간 안에 몇 십 가지 놀이를 갈아 치웠다가도 맘 내키면 종일 하나만 붙잡고 논다. 어른들처럼 업무의 효율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늘어지기도 한다. 옛 할머니들 말씀이 ‘밭고랑 하나 매고 돌아보면 풀어놓은 애는 천 리를 간다.’고 했다. 어린이들이란 탁월한 호기심을 지닌 생활 탐험가일진대 그들의 걸음에 무슨 주저함이 있으랴. 멀리까지 구경도 가고 싶고 덮어 놓은 건 다 뒤집어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은데 홀딱 날이 저문다. 금세 하루가 지나가는 걸 보면 어린이의 하루가 더 짧다고 해야 옳을까. 이래저래 기존 시간 단위로 그들의 시간을 측정하기란 어렵다.

어린이의 하루는 넓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늘리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그 비결은 상상이다. 상상은 평소에 갈 수 없는 곳까지 어린이 독자를 데려간다. 내 공간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라고 권한다. 삶의 가로와 세로가 대폭 넓어지는 것이다. 특히 여남은 살 무렵까지는 어른들이 의심하는 각종 상상의 비법을 진지하게 신뢰한다.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서슴없이 확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즐기는 상상은 아직 거대하고 낯선 구조의 머나먼 판타지가 아니다. 생활 속의 올망졸망하고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다룬 가까운 상상이 인기가 많다. 자기들의 하루와 관계 없는 것 같은 이야기라면 ‘책이 너무 어렵다.’면서 시큰둥하게 밀어 놓는 것이 그 또래 어린이의 특성이기도 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한두 해를 보내는 이 무렵의 어린이들은 ‘아기’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다. 그들은 현실의 시공간과 상상의 시공간을 구분할 줄 안다.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일을 누구보다 즐긴다. 아직 형과 언니들처럼 학교 생활이 바쁘지 않아서 몽실몽실 꿈꿀 시간도 많고 하루도 재미나다. 아기 때 보던 책은 시시하고 형들이 보는 책은 글밥이 많아서 더럭 겁이 난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이 원하는 규모의 상상을 담은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유치원을 통과하고 초등학교 출발선 부근에서 본격적인 이야기 책을 처음 만나는 어린이들. 이 귀여운 경계인들의 고민에 어울릴 만한 책 몇 권이 새롭게 출간되었기에 살펴보았다.

초등 저학년 동화들 중에서 몇 작품을 고르면서 생각한 첫 번째 조건은 동화의 소재가 ‘어린이의 생생한 하루에 바짝 밀착해 있을 것’이었다. 그냥 ‘나가서 놀았어요.’가 아니라 ‘어디에 누구랑 언제 나가서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놀았는지’를 눈에 선하게 펼쳐 놓은 책이었으면 했다. 책을 고를 때 ‘좋은 책’, ‘나쁜 책’이라고 하지 않고 ‘심심한 책’, ‘진짜 웃기는 책’, ‘잘 모르겠는 책’, ‘멋진 책’ 등, 제 맘대로 분류법을 사용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아야 했다.

두 번째 조건은 상상의 규모와 질에 대한 기준이었다. 하루를 그림 그리듯 묘사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적 묘사는 필수사항이었다. 그러나 상상의 도움을 받아 늘여도 되는 사건은 마음껏 늘이고 넓혀도 되는 무대는 쓱쓱 확장한 책을 찾고 싶었다. 그 결과 독특하고 거침없으면서도 서정적인 이야기를 몇 편 찾아냈다. 별 뜻 없지만 장난삼아 이 책들의 특성을 읊어 본다면 ‘꼼꼼하고 배짱 좋은 저학년용 생활 상상 동화’라고 할 수 있을까? 한 작품씩 살펴보겠다.

2. 다닥다닥 굴 캤더니, 하루!

『할머니, 어디 가요? 굴 캐러 간다!』는 서해안 어느 바닷가 마을의 겨울 이야기이다. 옥이랑 할머니는 갈 데도 많고 할 일도 많다. 심심할 때마다 “할머니 우리 어디 안 가요?” 하면 시원스레 “오냐! 바다 저 끝까지 나가서……”라며 옥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 할머니는 근래 동화에서 본 어느 할머니보다 건강하고 능동적이다. 할머니랑 옥이가 갯벌에 닿아 보니 이미 멀리서 나들이 온 아이들이 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얼핏 보기에 요란한 갯벌 체험 장비를 가지고 온 아이들도 제법 있다. 옥이네는 소금과 삽을 가지고 쓱쓱 맛조개를 잡는다. 별이네 할아버지는 굴을 캐고 모래네 할머니는 개불을 잡아 빼고 홍택이 할머니는 조개를 줍고, 다들 바구니가 한가득이다. 부지런한 갯벌의 하루는 길고 아직 반도 안 지났다.

남은 반나절의 이야기는 널따란 시장 바닥으로 옮겨간다. 아침에 캔 굴, 조개를 내다 팔고 나서 내복이며 장갑이며 고르는 기분은 얼마나 으쓱한지. 바닷가 마을의 장터는 보고만 있어도 활력이 넘친다. 옥이의 또 다른 겨울 하루 이야기도 나오는데, 바쁘긴 마찬가지다. 함박눈이 내리면 고구마 방귀 뿡뿡 뀌며 눈싸움을 하고 대전에서 형이 오면 다 같이 굴을 캐러 간다. 캐온 굴로 만들어낸 갖가지 굴 반찬은 눈이 번쩍 뜨일 최고의 맛이다. 그 반찬 숟가락에 얹어 뚝딱 저녁밥을 먹고 나면 온 몸에 힘이 솟고 머리까지 좋아진다. 백 번 넘게 써도 안 써지던 글자가 갑자기 술술 써진다.

이 작품은 바닷가 아이 옥이의 생활을 다루면서 어제는 어땠고, 오늘은 이런 점에서 힘겨웠고, 내일은 달라진다는 식으로 감정의 오르내림을 짜 맞추지 않는다. 시종일관 씩씩하다. 이 책에서 일어난 일이 실제로 사나흘에 걸쳐 일어난 일인지 겨우내 드문드문 일어났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건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옥이의 하루’를 보기 때문이다. 바다 생명의 한살이를 세세하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 동화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닷가 마을의 삶을 가르치는 사회과 관련 동화’라고 말하는 것도 책의 함량에 비하면 영 부족한 얘기다. 묘사는 섬세하기는 이를 데 없고 옥이의 하루는 근사한 모험이다. 굴 잘 캐고 쿨쿨 잘 자고 또 굴 캐고 한잠 자고 나면 키도 마음도 쑥쑥 커지는 것이 마법 같기도 하다. 어차피 모든 성장은 마법처럼 신비로운 일이 아니던가. 이 책은 그런 자연의 섭리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3. 나무가 되어 기다렸더니, 하루

『여름이와 가을이』는 뭘 그럴 듯하게 해내기에는 손힘이 모자라고 남이 해주는 걸 보고 있기에는 발힘이 넘치는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다. 청소년들이 몸과 마음의 성장이 조응하지 않는 바람에 갈등을 겪는 것처럼 여남은 살의 어린이들은 발과 손의 힘이 조응하지 않아서 좌충우돌하기 일쑤다. 발은 얼마든지 문제없이 달려가는데 손으로 치고 지나간 자리는 우당탕탕이다. ‘손발이 맞지 않아서 고생한다.’는 말이 이들에게는 딱이다.

여름이와 가을이는 남매다. 여름이가 그래도 누나라고 손끝이며 눈썰미가 훨씬 야물다. 하지만 가을이는 고양이도 되고 개미도 되고 나무도 되고 하루하루가 마냥 즐거운데 뭘 좀 해 보자고 기어 다녀도 야단, 뛰어다녀도 잔소리를 듣는 한창 나이의 꾸러기다. 하지만 가을이에게는 대단한 재주가 있다. 그건 바로 하루를 특별하게 보내는 재주다.

요즘 어린이들 대부분은 엄마 손에 끌려 학교로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거나 형제자매가 없는 빈 집을 지키면서 걸핏하면 ‘심심해’를 연발한다. 갱년기 어른이 입에 올릴 법한 ‘그저 그런 하루’가 그들의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어린이들이 쳇바퀴 도는 삶을 살게 된 것은 그들 탓이 아니지만, 누구도 어린이들에게 그런 뻔한 되풀이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 주지 않는다. 가을이는 그런 점에서 자생적으로 지루함을 돌파하는 아이다. 가을이의 지루함 돌파 비법은 바로 ‘상상의 힘’이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누나 곁에 가기 위해 ‘개미 나’가 되어 기어가 보기도 하고 어서 크고 싶어 ‘나무 나’가 되어 베란다에 대야를 놓고 앉아 햇살을 받아 본다. ‘오줌이 마려운데 목이 마르면 오줌 누고 물을 마셔야 할까, 물 마시고 오줌을 눠야 될까?’라는 중대한 질문을 창안한 누나에 맞서 정답 연구에 골몰하기도 한다.

최근 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빵꾸똥꾸’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그 말 때문에 해당 방송에 경고를 날린 국회의원도 있는 모양이지만, ‘빵꾸똥꾸’는 ‘손발이 맞지 않아 고생하는’ 어린이들이 권위를 가진 상대방 앞에서 무안함을 면하고자 할 때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썩 괜찮은 ‘방어용 단어’였다고 생각한다. 여름이와 가을이는 남들에게 ‘빵꾸똥꾸’를 외칠 배짱은 없었지만 심심하고 답답할 때마다 상상의 출구를 찾아서 자신을 방어하고 자존감을 지킬 줄 아는 슬기로운 아이들이다.

가을이가 ‘석고붕대’를 하고 놀이터를 내려다보는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다리를 다쳐서 꼼짝 못하는 가을이에게 놀이터는 군침만 삼켜야 하는 안타까운 선망의 대상이다. 가을이의 친구 지민이는 토끼가 되어 줌으로써 마음껏 뛰고 싶은 가을이의 마음을 대신해 준다. 어쩌면 우리는 어린이들의 멀쩡한 다리에 ‘석고 붕대’를 해놓고 그들을 ‘바보’로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의 발달을 강요하면서 다리의 발달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다리의 발달을 가로막는 어른들. 가을이처럼 마음 맑은 어린이들은 감히 이 어른들을 향해 ‘이 빵꾸똥꾸야!’라고 외치지도 못하고 나무가 되어서 해방을 기다린다.

많은 도시의 어린이들은 늦은 시각까지 일하는 엄마 아빠를 기다리느라 유일한 밑천인 상상의 힘으로 해가 저물 때까지 버티는 것이 사실이다. 특별한 상상이 있으면 평범한 사실을 이겨 내는 일이 조금 덜 힘들다는 사실이 여름이와 가을이에게나, 책을 읽는 나에게나 조금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4. 달을 마시고 하늘을 날았더니, 하루

『달을 마셨어요』는 『여름이와 가을이』에 비하면 훨씬 더 발을 자유롭게 풀어 준 동화다. 일단 여기에는 발의 자유에 공감하는 엄마가 나오고 ‘굴 캐러 가는 옥이네 할머니’ 못지않게 활달한 할머니가 있다. 남매가 아니라 형제가 등장하는 이야기라는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아들 둘 있는 집’의 엄마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잠자리에 누워서 이불을 타고 하늘을 날 줄 아는 기술과 담력의 소유자다. 이 댁 형제의 호연지기는 아마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우물에서 달을 길어 마시는가 하면 종이비행기를 접어 달나라까지 날려 보낼 꿈을 꾸고 달나라의 공깃돌을 주워 토끼들과 공기놀이를 한다. 노는 마당에도 급수가 있다면 1급임이 분명할 이 배짱 좋은 형제의 하루는 지켜보기만 해도 시원시원하다. 어린이들에게 ‘발의 자유’를 주었을 때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큰 폭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 준다.

하지만 형제가 큰 곳으로만 눈길을 주는 것은 아니다. 돌 틈에 피어난 민들레꽃이 돌에게 포로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꼼꼼함도 지녔다. 서걱서걱한 모래가 방금 깨끗이 씻은 손을 더럽혀도 상관없다. 꽃은 구해야 옳은 것이다. 우리는 어린이는 생각이 덤벙덤벙 성기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관찰력과 판단력은 종종 어른보다 훨씬 날카로우며 무엇보다 고운 체를 지녔다. 어른의 눈에는 걸리지 않는 안타까움, 아쉬움, 그리움이 어린이의 마음에는 고스란히 걸린다. 그걸 알아 주는 엄마가 있고 함께 뛰어 줄 형아가 있으니 이집 막내아들은 정말 복이 많다.

작가는 책 뒤에 ‘지금도 놀기 좋아하는 어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때 놀아 본 어른이 아니라 ‘지금도 잘 노는 어른’이 동화를 쓰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시대가 변화하듯이 놀이는 진화한다. 무엇보다 현재 진행형의 상상만이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형제의 모험이 달을 마시거나 토끼와 공기놀이를 하거나 이불을 타고 나는 상상에 그친 점은 아쉬운 감이 있다. 엄마 아빠들이 먹고 자란 상상이 아니라 지금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꿈틀대고 있을 상상을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꼭 기술과학의 발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 아이들의 하루는 엄마 아빠들의 어린 시절과 판이하게 다른 환경에 놓여 있다. 그들의 상상은 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5. 도깨비 죽을 먹고 나서 대단했던, 하룻밤

『으랏차차 도깨비죽』은 위에서 살펴 본 세 권의 책보다는 더 큰 아이들까지 읽을 수 있는 동화다. 조왕할미가 만든 도깨비죽을 먹고 도깨비들의 씨름판에 끼어든 홍주의 이야기다. 도깨비가 인간의 판에 끼어들어 법석을 떠는 이야기는 많지만 인간이 도깨비의 삶에 끼어들어서 도깨비판을 휘저어 놓는 이야기는 흔하지 않다. 주인공의 몸을 많이 사용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자 어린이라는 점이나 조왕할미가 꼬마 조왕각시로 변하여 지혜를 보태고 홍주가 조왕각시를 보호하면서 모험을 해 나가는 전개가 신선했다. 홍주는 또래 어린이가 그렇듯 맘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어설픈 실수도 저지르지만 의젓하게 꼬마 조왕각시를 돌보기도 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와 손발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집안을 지키는 터줏대감과 강, 산, 들을 대표하는 도깨비가 이듬해 살림을 놓고 내기 씨름을 벌인다는 설정은 죽고 죽이는 파괴적 대결 구도로 가득한 상업 판타지 만화의 경향과 분명한 선을 긋는다. 집과 마을을 지키는 것도 소중하지만 강, 산, 들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결’이라는 흥미로운 요소는 유지하면서 ‘상생의 대결’을 유도하는 작가의 지혜는 힘 있는 결말로 이어진다. 커다란 솥에 황금빛 호박죽을 끓여서 큰솔마을 지킴이들도 먹고 오소리, 너구리, 곰, 들쥐, 수달 같은 산짐승, 들짐승도 먹이면서 하나가 된다는 결말은 쫓고 쫓기던 치열한 싸움을 훈훈하게 마무리한다.

이 작품의 강점은 우리가 사는 생활 속 공간이 곧 판타지의 터전이 된다는 데 있다. 홍주는 부엌에서 조왕할미와 만나고 장독대에서 싸우고 대바구니며 호박 속을 들락날락하다가 마침내 방에서 깨어난다. 홍주의 판타지는 어딘가 머나먼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 상상의 연장이다. 작가는 영혼의 세계와 물리적 세계가 분리된 서양인들의 사고 구조로는 생각해 내기 힘들 인간-귀신 동거형 판타지를 보여 준다. 대들보에도 귀신이 살고 국솥에도 귀신이 살고 호박 속에도 도깨비가 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위해서 떡을 놓아 주고 한 솥의 죽을 나눠먹기도 하는 우리네 삶에서 홍주의 환상적 모험은 생활의 연장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홍주가 그 기나긴 하룻밤 동안 멀고 이색적인 공간을 다녀오지 않았다고 해서 홍주의 모험이 갖는 의미나 즐거움이 더 적은 것은 아니다. 생활도 지키고 상상도 믿는 홍주 또래의 어린이들은 홍주의 모험을 통해서 죽 한 그릇에서도 신비한 기운을 느끼면서 일상 속 상상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내가 상상한 일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처럼 근사한 일은 또 없기 때문이다.

6. 손발이 맞는 즐거운 하루를 위하여

어린이에게 어떤 자세나 행동을 요구할 때는 그것이 그에게 무리한 일인가 아닌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무리한 일을 하게 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은 그 일을 아예 하지 않았을 때의 손실보다 훨씬 크다. ‘깜냥’이라는 우리 말이 있다. ‘스스로 해낼 만한 능력이 있는지 헤아리는 일’을 뜻한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깜냥을 알고 싶어 한다. 손발도 잘 맞추고 싶다. 물을 먹고 오줌을 싸야 할지 오줌을 싸고 물을 마셔야 할지 고심을 거듭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오줌을 싸 버리면 돌아오는 것은 ‘오줌싸개’라는 핀잔이다.

어른들은 자칫하면 그들의 깜냥을 함부로 재단해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주문해 버린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의 깜냥을 스스로 판단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돕고 안내해 주는 것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 길을 택하는 어른은 적고 어린이의 마음에는 억울함이 쌓여 간다.

억울하고 속상한 어린이들에게 자기처럼 실수하는 어린이가 등장하는 동화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야’라는 안도감을 준다. 동화 속 친구들이 손과 발을 허우적대는 모습은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되어 주기도 한다. 내 손과 내 발을 알게 도와 준다. 우리 아이들이 손발이 맞는 즐거운 하루를 보내게 하기 위해 어른들이 할 일에 대한 답이 나왔다. 그렇다. 동화를 많이 읽게 해 주는 것이다.
김지은│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심리 철학과 철학 교육을 전공했습니다. 동화 작가이며 철학자로, ‘어린이를 위한 철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바람 속 바람」이 당선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평론 「어린이의 도덕, 어른의 도덕」 등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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