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4월 통권 제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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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의 즐거운 비밀]
사내의 꿈? 아니, 여인의 현실!
――<2> 우렁각시, 저 사내와 살아 보려 했으나

신동흔 | 2010년 04월

「우렁각시」, 또 하나의 ‘꿈의 여인’

지난 글에 선녀 이야기를 하면서 그를 일러 ‘꿈의 여인’이라 했었다. 여기 그 못지않은 꿈의 여인이 있으니 바로 우렁각시다. 우렁이 속에 꼭꼭 숨어 있다가 남모르게 살짝 나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난 밥상을 차려 놓고 감쪽같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처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신비함 때문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애틋함 때문에 사내의 마음을 마구 흔드는 그런 여인이다.

이야기 구조를 분석해 보면 「우렁각시」 설화는 「선녀와 나무꾼」과 닮은 점이 참 많다. 가진 것 없는 외로운 사내가 어느 날 문득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도 그렇고, 금기를 어긴 탓에 아내를 잃는 것도 그렇다. 이야기의 결말이 사내가 아내를 되찾아 행복을 누리는 것과 아내를 못 찾고 죽음으로 갈린다는 사실 또한 공통적이다.

하지만 우렁각시와 선녀는 서로 다른 면도 있다. 여인이 처음 사내를 만나는 대목부터 꽤 다르다. 선녀가 날개옷을 잃고 방황하다가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사는 데 비해, 우렁각시는 “이 농사 지어서 누구랑 먹고 사나.” 하는 사내의 말에 “나랑 먹고 살지!” 하고 선뜻 응답함으로써 사내와 인연을 이룬다. 그녀가 김 모락모락 나는 밥을 차리는 것 또한 누가 시켜서 그리한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이 커플에 있어 먼저 ‘작업’을 건 것은 우렁각시 쪽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연관된다고 생각하는, 두 여인의 결정적인 차이. 선녀가 끝없이 떠나려고 하는 데 비해 우렁각시는 그리하지 않는다. 우렁각시는 사내의 짝이 되어 사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그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선녀가 떠나간 것이 스스로 그리한 것이라면, 우렁각시는 제 뜻과 상관없이 원님(또는 임금)한테 붙들려간 것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사내와 더불어 잘 살아 보려고 한다.

어찌 보면 선녀와 우렁각시는 여인의 양면적 모습을 표상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낯선 땅을 벗어나 본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어떻게든 정을 붙이고 살아 보려는 마음. 이들은 완연히 다른 것처럼 보이나, 실은 내면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면서 내내 부대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든 나무꾼에 비해 우렁각시의 사내는 훨씬 유리한 입장이다. 저 아름다운 여인이 스스로 마음을 주어 다가온 데다가, 정 붙이고서 알콩달콩 살려고 애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 사랑스럽고도 미더운 아내를 지켜 주는 것은 저 사내의 당연한 의무가 된다. 힘겨운 의무가 아닌, 즐거운 의무!

「우렁각시」의 금기가 상징하는 것은

남녀의 만남에 얽힌 대개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우렁각시 설화에도 금기라는 형태의 시험이 있다. 그냥 잘 살았다고 하면 좋으련만 왜 꼭 금기가 제시되고 그것이 깨지곤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리해야 서사가 재미있어지기 때문? 그도 그렇겠지만, 더욱 본질적인 이유는 ‘인생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녀가 만나 평생의 짝을 이루는 일에 아무런 걸림도 없다면, 아무런 시험도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남녀가 영원한 결합을 꿈꿀 때 단 한번의 갈등이나 어긋남도 없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신(神)일 것이다.

이 설화에서의 금기는 ‘아직 때가 아니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조금 싱거울 수도 있는 시험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네!” 하지만 사내는 그 금기를 깬다. 한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인간이다. 거짓말처럼 내 앞에 다가온, 언제 꿈결처럼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나의 완전한 이상형! 그대라면 애써 잡은 그 사람의 손을 선뜻 놓아 주고서 그 사람이 스스로 손을 내밀어 올 때까지 마음 비우고 그지없이 기다릴 수 있겠는가. 만약 그리할 수 있는 이라면, 이 글은 그냥 통과.

‘아직 때가 아니니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 서사적 의미맥락을 수월하게 풀자면, 그것은 남녀 간 결합의 어려움을 표상하는 한편 결합에 임하는 자세와 능력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드러낸다. 서로 남남이던 남과 여가 만나 부부를 이루는 과정에는 일정한 ‘단련’이 필요한 법이다. 그 핵심 요소의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신뢰’이다. 저 금기는 사내가 과연 ‘신뢰할 만한’ 존재인지를 시험대에 올린다. 그가 온전한 신뢰의 존재였다면, 상대를 믿고 기다림을 감당하는 존재였다면 그는 무사히 시험을 통과해 여인과 미더운 한 쌍을 이루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잘 알듯 그 금기는 깨어진다. 사내는 여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길로 우렁각시를 아내로 삼는다. 꿈같이 이어지는 행복한 날들. 하지만 그것이 한없이 지속될 리는 없다. 이미 금기의 파괴를 통해 문제가 겉으로 드러난 상황. 그에 따른 결과가 없다면 그것은 서사의 진실에 맞지 않고 또 인생의 진실에 맞지 않는다. 그 결과는 ‘결합의 파탄’이 되는 것이 당연한 흐름이다. 누군가 데려가든 아니면 그 스스로 떠나든, 우렁각시와의 이별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원님 탓? 모친 탓? 천만의 말씀!

사내가 우렁각시를 잃는 상황은 자료에 따라 차이가 난다. 어떤 힘 있는 사람이 각시를 빼앗아 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때로는 임금이고 때로는 원님이다. 무작정 각시를 데려가는 것이 보통이며, 종종 자기랑 시합을 해서 지면 각시를 내놓아야 한다고 위협하는 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그 이후의 상황에 있다. 해피엔딩과 비극적 결말이 확연히 나뉜다. 해피엔딩은 물론 사내가 우렁각시와 영원히 잘 살았다는 것이다. 사내는 원님과의 시합에서 승리하여 아내를 지키거나, 또는 뜀뛰기를 배운 뒤 궁궐로 찾아가 빼앗긴 아내를 되찾고 임금이 된다. 비극적 결말은 사내가 각시를 되찾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때 사내는 슬피 울다 죽어서 새가 된다.

주변 사람들한테 확인해 보았더니, 「선녀와 나무꾼」의 결말을 주로 비극으로 기억하는 데 비해 「우렁각시」의 결말은 대개 해피엔딩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동화책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런데 원 자료로 말하자면 「우렁각시」는 비극적 결말의 자료가 해피엔딩의 자료보다 훨씬 많다. 비극적 결말의 비율이 「선녀와 나무꾼」의 경우보다 더 높다. 여성이 단연 주류를 이루었던 옛 전승자들은(「우렁각시」의 여성 제보자 비율은 「선녀와 나무꾼」에서보다 더 높다) 사내가 우렁각시를 못 찾고 좌절하는 결말을 더 많이 선택했던 것이다.

비극으로 향하여 가는 이야기 전개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보자. 마치 꿈처럼 우렁각시를 아내로 삼은 저 사내, 각시 얼굴만 보며 지내려 한다. 마냥 그럴 수 없어 일터로 나설 적에 모친한테 뭐라고 하는가 하면, 각시가 집 밖에 나오면 큰일 나니 새참을 꼭 어머니가 가져와야 한단다. 할 수 없이 노모가 밥을 나르는데, 어느 날 심통이 난 노친네가 몸이 아프다며 각시를 대신 내보낸다. 각시가 일터로 나갈 적에 때마침 원님 행차가 지나간다. 얼른 풀숲으로 숨는 우렁각시. 하지만 숲에서 광채가 피어나는 바람에 각시는 원님의 눈에 뜨이고 만다. 각시의 미모에 반하여 다짜고짜 그녀를 가마에 태워 관가로 데려가는 원님. 사내는 그렇게 속절없이 아내를 놓치고 만다.

안 오는 밥을 기다리다가 집에 돌아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내, 어찌했을까? 서사의 문법을 따르자면 아내를 찾아 나서는 것이 순리이다. 금기 위반에 따른 결과에 직면했을 때, 그 결과로부터 도피할 기회가 한번은 주어지는 법(대개, 단 한번)! 사내는 각시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터이니, 곧바로 아내를 찾아 나서는 것이 더더욱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의 설화자료는 이러한 기대를 보란 듯이 배반한다. 원님이 우렁각시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저 사내가 한 일.

아 그러니까 이 총각은, 구만 집이 와서, 대, 뜰에서 마당까지 떼굴떼굴 둥글구 몸부림을 치먼서,
“어머니, 왜, 저 하자는 대루 안해 주시구서 밥꽝우리 내 보내가지구서 붙들려 가게 했느냐?”구.
그냥 몸부림을 치구, 울다아 울다 구만 죽었어요. 죽어가지구 혼이 새 한 마리가 됐어.
(『한국구비문학대계』 4-6, 충남 공주군 의당면 설화 ‘우렁 각시’(유조숙 구연)에서)

저 사내, 뒹굴면서 몸부림치다가 쓰러진다. 각시를 왜 내보냈느냐고 어머니를 원망하며 울고 또 울다가 죽어 버린다.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리 세도가 드높은 원님이라지만 그래도 엄연한 제 아내인데 찾아가서 한마디 항변도 못해 보고 제풀에 쓰러지고 마는 저 모습이란!

「우렁각시」는 흔히 관탈민녀(官奪民女)형 설화로 일컬어져 왔다. 관직에 있는 이가 권력으로 민간의 여인을 탈취한다는 뜻이다. 그 탈취란 무도한 폭력인 터이니, 용납될 수 없는 바다. 말하자면 이는 빼앗아 간 사내가 잘못한 것이라기보다 빼앗아 간 사람이 그릇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만 말할 수 있을까?

최근에 어느 학회에서 한 연구자가 「우렁각시」에 대해 발표하면서 자료의 실상에 의하면 문제의 책임이 원님보다 사내의 어머니한테 있다는 취지의 해석을 제시하였다. 어머니가 아들의 당부를 어기고 각시를 내보낸 게 문제였다는 것이다. 토론을 맡은 나는 그와 다른 의견을 개진했다. 상황을 원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적합지 않지만, 어머니 탓으로 돌릴 일은 더더욱 아니라 했다. 모든 것은 다 그 자신의 탓이라 했다. 저 사내, 쓰러져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다소 심하게 말했던 것도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 사내, 우렁각시를 아내로 가질 만한 자격이 없다! 한 여자의 남편이 되기에 그는 너무나 ‘찌질하다.’

각시를 집 밖에 내보내면 큰일 난다는 것, 이건 대체 무슨 말인가. 다른 사람이 탐할까 봐,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웠던 게다. 좀 다르게 말하면, 각시가 다른 남자를 따라 갈까 봐 두려웠던 게다. 그러니 집안에 꼭꼭 박혀서 나오지 말고, 밥이나 해놓고 자기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다른 생각일랑 하지도 말고 제 얼굴만 보라는 것이다. 단단한 껍질 속에 꼭꼭 숨어서(그래서, 우렁이 각시!). 어떤가 하면, 그 자체로 자격 미달이다.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또한 아내에 대한 믿음이 그리 없고서야 어찌 한 사람의 배필이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걸 일러 사랑이라 하고 또는 걱정이라 할지 모르지만 실상 그것은 구속이고 억압이며, 열등감이고 불안증일 따름이다. ‘때가 아니니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수용하지 못했을 때 이미 노출되었던 바의.

내 아내가 너른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라야, 나의 배우자가 최고의 이성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이라야 한 사람의 진정한 짝이 될 자격이 있다. 둘 사이에 어떤 뜻밖의 곤란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라야 영원의 짝이 될 수 있다. 어떻게든 감추어 모면하려는 저 사내, 일이 터지자 엉뚱하게 어머니를 탓하며 땅바닥을 뒹구는 저 사내, 턱도 없다. 그런 사내보다는 ‘차라리’ 우렁각시를 힘으로 훌쩍 빼앗아 간 저 원님이 그녀를 차지할(?) 자격이 더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뒹굴다 죽어서 새가 되어 버린 저 사내, 그제서야 관가를 찾아간다. 원님 곁에 각시한테로 날아가서 한탄하면서 울음을 운다. 무어라 우는가 하면, “낸들낸들 내탓이랴, 닌들닌들 니탓이랴. 어머니 탓이로다,” 이런 식으로. 그게 다 어머니 탓이었단다. 아직도 깨닫지 못한 저 무지몽매함! 이야기는 그 새를 본 원님이 탁 쳐서 새를 잡아 죽였다고 말하곤 한다. 생각하면 안 된 일이지만,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잘 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맹랑한 생각도 든다. 실제로 새를 쳐서 죽인 것은 오히려 각시가 아닐까 하는. 설령 각시는 아닐지 몰라도, 여인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거의 예외 없이 여인네이므로. 하기야 어찌 안 그렇겠는가. 저런 믿음 없는 남편을 믿고 한평생을 산다는 게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겠는가 말인가.

속절없는 사내의 죽음. 그렇다면 거기 이어지는 서사는 무엇일까. 사내가 죽었으니 그 아내가 따라 죽는 것이 서사의 흐름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많은 구연자들이 우리의 기대를 한 번 더 배반한다. 상당수 자료에서 우렁각시는, 남편을 따라 죽은 것이 아니라, 그냥 원님(임금님)하고 짝을 이루어 잘 살았다고 한다.

근디 그 원귀가 되야서 그 각시허고 못 살어서 그러서 못 살고 그 사람은 죽어불고. 그 나랫님허고 부자로 살었대요. 각시허고.
(『한국구비문학대계 5-7』, 정북 정읍군 칠보면 설화, ‘우렁색시’(이금녀 구연)에서)


이러한 좀 맹랑한 결말에 대해 맹랑한 해석을 제시한 적이 있다. 저 결말 속에, 차라리 원님한테 붙들려 가서라도 저렇게 호강이나 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마음이 은연중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금 무모하게 덧붙여 본 해석이었는데, 이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이 조금 뜻밖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쪽이 아니라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잠깐의 전율! 딴은 그렇다. 입장을 바꾸어 내가 그 처지에 있다고 할 때, 왜 이런 생각이 안 들겠는가 말이다. “자기가 자기 성화로 죽은 건데 내가 왜 그 사람 때문에 죽어야 해? 관두라고 해!”

아내를 집안에 묶어 두지 못해 안달하며 사사건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내들. 나이만 먹고 몸만 컸으되 툭하면 “엄마 왜 그랬어!”, “자기, 왜 그러는 건데~” 아이처럼 투정하는 사내들. 무릇 조심할지어다. 그간 사랑이라 부르고 행복이라 불렀던 것들, 한순간에 털썩 엎질러져서 주워 담을 수 없는 물이 될 수 있을지니!

* 이야기를 풀어 나가다 보니, 「선녀와 나무꾼」에 이어 또 다시 어른을 위한 해석처럼 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어린이들에게 진짜로 큰 교훈을 주는 이야기라고 믿고 있다. 제 자신을 책임지고 타인을 지켜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커 가는 것. 그보다 중요한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신동흔 | 충남 당진의 촌마을에서 태어나 등잔불 밑에서 어린 날을 보냈으며, 지금은 양평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문학을 공부하던 중 구비문학에 매혹되어 설화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옛이야기를 해석하고 풀어쓰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한겨레 옛이야기’ 시리즈를 기획했으며 『살아있는 우리신화』 『이야기와 문학적 삶』 『서사문학과 현실 그리고 꿈』 같은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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