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7월 통권 제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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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달이 차오른다, 가자! ― 기 빌루 1

서남희 | 2010년 07월

오래 전, 지리산 종주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선배가 물었습니다.
“지금 다시 또 올라가라고 하면 올라가겠니?”
 헉, 물집까지 생겨가며 걸었던 그 산길을 또 다시 걸으라니!
“아아… … 지금은 못가겠어요. 일주일 쯤 후라면 몰라도.”

천왕봉의 장대한 해맞이나 톡 치면 도르르 굴러내려 갈 것 같던, 산 능선에 붙어 있던 노오란 보름달이 준 기쁨은 황홀했지만, 무거운 배낭 메고 헉헉거리며 올라갔다가 후들거리며 내려온 그 산길을 일주일은커녕 25년이 지나도록 도로 올라가 본 적이 없습니다. 배낭도 새로 사고 등산화도 갖췄는데 말이지요. 

기 빌루의 『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 앨리스는 산 대신 바다로 향합니다. 뒷다리로 스물여덟 번 발길질하면 빤히 다 닿는, 구석구석 익숙하고 평화로운 작은 연못에서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다가 갈매기가 바깥세상, 그 중에서도 끝이 안 보이는 너른 바다 이야기를 늘어놓자 큰 결심을 한 거지요. 가볍게 연잎 한 장 돌돌 말아 쥐고 떠나는데, 보통은 바다까지 가는 엄청난 모험이 그려지고 마침내 도달한 바다를 마지막으로 해서 끝나겠지만 이 책은 좀 다르군요. 가는 과정은 짧게 묘사되고 바로 목적지가 등장하지요.

도로를 건너고 강을 지나며 수련 잎 위에 누워 자던 앨리스가 눈을 떠 보니 온통 파란 물결!
개를 돌려봐도 시야를 가로막는 기슭이 보이지 않자 앨리스는 자신이 드디어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바다에 온 것을 깨닫지요. 그러나 아무리 바라고 바라던 것이라 해도 낯선 것이란 기쁨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마련. 이 작은 개구리가 간절히 원했던 바다는 거친 바람과 험한 파도가 목숨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파도에 지치고 집이 그리워진 앨리스는 울기 시작합니다. 그때 달이 도와주지요. 달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앨리스는 덕분에 순식간에 연못으로 돌아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세상엔 집만 한 곳이 없다는 홈, 스위트 홈의 이야기였겠지만 어느 봄날, 앨리스는 바다에서 돌아온 이래 백 번째로 달을 떠올립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되자 앨리스는 두 번째로 연못에서 사라지지요. 그리고 바다에서 신 나게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게 마지막 장면입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기쁨과 두려움을 말합니다. 첫 모험이 주었던 기쁨이 제아무리 컸다 한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두려운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을 안 뒤라 또 다시 떠나려는 마음을 먹기란 참 어렵겠지요. 그 장면에서 작가는 앨리스가 수련 잎을 타고 바다행 직행 티켓인 달그림자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기쁨을 택할 것인지 두려움 때문에 작은 연못 속에 안주할 것인지 달이 백 번이나 떠오를 때까지 고민을 하는 개구리를 보면 장기하와 얼굴들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모두 잠든 새벽 네 시 반쯤 홀로 일어나
창밖에 떠 있는 달을 보았네
하루밖에 남질 않았어
달은 내일이면 다 차올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그걸 놓치면 영영 못 가

떠날 때를 또 놓칠 수 없어 달그림자 속으로 한 발 들여놓는 두 번째 떠남에는 첫 떠남과 달리 비장함마저 감돌지요. 개구리의 이름마저 묘하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지만, 소녀 앨리스는 우연히 굴속에 빠져서 이상한 나라로 가는 데 비해 개구리 앨리스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떠난다는 데 차이가 있지요. 두려움을 알기에 첫 번째 떠남보다 두 번째 떠남이 더 힘들었지만, 이제 이 개구리는 둥근 달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고 동그란 연잎을 타고 더욱 큰 기쁨을 누립니다.


첫 모험에서의 파도 그림과 두 번째 모험에서의 파도 그림은 확연히 비교가 되는군요. 첫 모험에서 앨리스는 엄청난 파도의 벽 외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는데, 두 번째 모험에서는 뒤이어 오는 다른 파도들도 보고, 하늘과 둥근 달까지 보는 여유를 누리고 있으니 말이지요. 앨리스는 모험을 거듭할수록 여유롭게 더욱 많은 것을 즐길 줄 알게 되겠지요.

작은 개구리의 연이은 출가(!)를 그린 이 책은 기 빌루라는 프랑스 작가가 그린 거랍니다. (발음이 ‘기 비유’인데, 우리나라에는 ‘기 빌루’로 소개되었어요.) 이 책의 그림은 매우 조용하고 서정적이면서 세밀하면서도 일정한 색상을 드러내지요. 기 빌루가 어렸을 때 『땡땡』이란 연재만화를 보면서 작가인 에르제의 평면적인 색상 표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해요.

확하고 꽉 찬 듯한 색조가 좋아 에어브러시를 즐겨 쓴다고 하는데, 이 책에 나오는 하늘이나 연못의 물색을 보면 잔잔하면서도 명확하고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밀도 높은 효과가 느껴지지요. 또한 그는 일본 목판화의 부드러움이 매혹적이라고 말해요. 개구리가 연잎을 타고 파도타기 하는 장면은 큰 파도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목판화인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와 매우 비슷하지요.

책은 미국에서 나왔지만, 기 빌루는 프랑스인이에요. 1941년 7월에 프랑스 드 시즈에서 태어나 부르군디에 있는 미술학교를 나온 뒤, 파리의 텔레비전 방송국 애니메이션 부서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어요. 알제리에서 18개월 동안 군 복무를 한 뒤, 다시 파리로 돌아와 광고회사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지요. 주로 타이포그래피 작업과 활자 식자를 하면서 그는 포스터 쪽으로는 썩 소질이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어요. 그 무렵은 1968년 파리 학생 운동이 일어난 직후라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격동적인 시기였는데, 그 역시 시위나 회의 등에 따라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기 빌루는 광고회사에 사직서를 내지요. 작은 연못에서 큰 바다로 나가고 싶었거든요. 20대란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 불안하기 마련이고, 이 젊은이도 예외는 아니었던 거지요. 광고 시장에서는 미국, 그것도 뉴욕이 가장 중요했기에 그는 ‘빅애플(Big Apple)’이라는 별명을 가진 뉴욕으로 갈 결심을 합니다. 회사 동료가 그에게 일러스트레이션 쪽으로 분야를 바꿔 보라며 뉴욕에 오고 싶어 하는 프랑스 인의 바람을 다룬 자전적 이야기를 포트폴리오로 만들어보라고 조언을 했고, 그는 이 내용으로 자전적 일러스트레이션 열 네 장을 그립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막상 떠나려니 두려움이 일어 기 빌루가 빠른 비행기 대신 달팽이처럼 느리게 가는 배를 탔다는 점이지요. 그가 삶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기쁨’은 앞으로 그의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림책에 선연히 드러나는 주제가 됩니다. 배 덕분에 일주일간의 완충 기간을 거쳐 도착한 뉴욕에서 그는 『뉴욕』 지의 아트 디렉터인 밀튼 글레이저를 만납니다.

그때의 기분을 그는 ‘마치 교황을 만나는 것 같았다.’라고 표현하지요. 뉴욕의 일러스트레이션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이 교황 성하는 뜻밖에도 기 빌루의 포트폴리오를 마음에 들어 했고, 다섯 페이지에 걸쳐 그의 그림을 실어 줍니다. 뉴욕에 갓 떨어진 새내기로서 대단히 산뜻한 출발이지요? 20대 젊은 시절에 1년 예정으로 갔던 그곳에 70세가 다 되도록 붙박이로 살며 이 도시의 수직성과 빛과 그림자의 극명한 대조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는 뉴욕을 사랑했다. 뉴욕은 내가 꿈꾸던 수직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도시의 고층빌딩들과 골들을 난 정말로 사랑한다. 특히 거리들이 옛 유럽 도시처럼 뻗어 있는 월 스트리트를 사랑한다. (… …) 예술가로서 보기에, 뉴욕은 파리가 주지 못한 것을 준다. 물론 나는 파리를 사랑한다. 그러나 뉴욕의 빛은 굉장하다. 햇빛과 그늘이 굉장한 대조를 만들어 낸다.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렵다고 가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http://www.drawger.com/zinasaunders/?article_id=4949)


그러나 그가 뉴욕에서 배운 날카로운 수직성은 마냥 뾰족하지 않아요. 그림에서 잔잔하고 고요하게 표현되거든요. 개구리 앨리스가 바다로 향할 때 건너던 도로의 가로수 길은 수직으로 쭉쭉 뻗어 있지만 매우 고요합니다. 그러다가 톡, 고요한 것들 중 하나에 살짝 변형을 주어 세상을 뒤바꿔 버리는 취미를 이 작가는 가졌지요. 『꿈꾸는 소년의 짧고도 긴 여행』의 가로수들 역시 똑같이 수직으로 고요히 서 있지만, 첫 번째 나무를 도끼질함으로써 고요한 수직성은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새에 무너지고 말 운명이지요. 


부드럽고 평면적인 색상 표현과 고요한 수직성, 그러면서도 작은 변형으로 일상적 풍경을 순식간에 뒤엎어 버리는 그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아트 디렉터들 덕분에 그는 일할 기회를 여러 번 얻었습니다. 『뉴욕』 지 이후, 『레드 북』 지에도 그림을 싣게 되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그려 보라는 할란 퀴스트 출판사의 의뢰를 받고 첫 그림책으로 『24번 버스』를 내게 되지요.

하인리히 호프만의 『게으름뱅이 피터』에 실린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 그 책에서는 손가락을 자꾸 빨면 커다란 가위를 든 남자가 나타나 손가락을 잘라 버릴 거라고 엄마가 아이에게 윽박지르지요. 그리곤 갑자기 거대한 가위를 든 남자가 등장해서 아이가 깜짝 놀라는데, 그 그림을 보고 기 빌루는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가 온갖 무시무시하고 불길한 상상을 하는 내용을 떠올리고 그림책으로 엮습니다. 자신은 어렸을 때 마녀나 뱀, 용, 어린이들, 굶주린 식인귀 따위로 가득 찬 괴기스런 동화책을 좋아했다면서요.

지금도 세상이 무섭고, 항상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두렵다고 고백하지만, 그런 감정들이 그의 그림에서 활화산처럼 표현되는 일은 없지요. 감정을 절제하는 편이고, 유머를 통해 공포를 누그러뜨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다음 호에 계속)

참고 책 및 사이트
『일러스트레이터는 무엇으로 사는가』스티븐 헬러 지음, 디자인 하우스, 2002, 216~224쪽.
『뉴욕 타임즈』리뷰 : http://www.nytimes.com/2007/11/11/books/review/Handy-t.html?_r=2&ref=authors&oref=slogin&oref=slogin
Zina Saunders 사이트 : http://www.drawger.com/zinasaunders/?article_id=4949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목판화 : http://www.muza-chan.net/japan/index.php/blog/160-years-since-katsushika-hokusai-death
장기하와 얼굴들 :「 달이 차오른다, 가자」http://www.youtube.com/watch?v=olowT4wr864
서남희 | 대학에서 역사와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세상살이 자체가 공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볕 드는 마루에서 만난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썼고, 『페페 가로등을 켜는 아이』 『마녀에게 가족이 생겼어요』 『꿀벌 나무』 『작은 새의 노래』 『꼬꼬닭 빨강이를 누가 도와줄래?』 등 많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