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8월 통권 제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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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옛이야기의 즐거운 비밀]
착한 아이들, 마음에 귀신을 품다
――장화 홍련의 마음 들여다보기

신동흔 | 2010년 08월

내가 쓰는 이 글의 꼭지 제목은 ‘옛이야기의 즐거운 비밀’인데, 이번에는 좀 무서운 비밀이다. 날도 더운데 귀신 이야기 한 자리! 귀신도 여럿이지만, 누구나 잊지 못할 자매 귀신, 장화와 홍련이 있다. 너무나도 착했다고 하는 꽃 같은 두 아이. 그런데 이들은 무시무시한 귀신이 되어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거기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귀신이 쓰인 이야기

장화(薔花)와 홍련(紅蓮)― 장미꽃과 붉은 연꽃. 참 아름다운 이름이다. 이름만큼이나 고운 용모와 아름다운 마음씨로 많은 사랑을 받아 온 우리 옛 소설의 두 주인공이다. 티 없이 맑고 착한 그 두 소녀를 세상은 가만 놔두지 못하고 왜 그리 혹독하게 핍박했는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흉악한’ 계모한테서 갖은 박해를 받다가 안타깝게 죽어간 두 소녀를 생각하면 언제라도 마음이 싸해진다.

어리고 착한 마음에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했을까. 그 가슴에 맺힌 한을 생각하면 그들이 차마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원혼이 되어 이승을 떠돈 것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한을 읽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명의 원님이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까무러쳐서 세상을 하직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마침내 그 원한을 들어주고 풀어 줄 사람을 만나 원수를 갚고 가슴의 한을 풀어 환생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힘없는 소녀들을 핍박하고 박해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저 무서운 폭력이 다시금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위와 같은 이해 방식이, 아마도 장화 홍련에 대한 일반적인 유형일 것이다. 나 또한 「장화홍련전」에 담긴 의미를 이런 정도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장화와 홍련의 이야기는 나의 마음에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와 강한 파문을 일으켰다. 무심코 이면을 들여다보았더니 그건 결코 범상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숨겨진 진실을 무섭도록 생생하게 투영한 이야기. 그것은 말 그대로 ‘귀신이 쓰인 이야기’였다. 그 공포 앞에 나는 전율했다.

원귀의 진짜 모습

소설 「장화홍련전」은 가슴에 맺힌 한을 토로하기 위해 철산읍 동헌에 원귀로 나타난 홍련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밤이 깊은 후 홀연 찬바람이 일어나며 정신이 아득하여 어떻게 한 줄 모르고 있을 즈음에 한 미인이 녹의홍상(綠衣紅裳)으로 문을 열고 완연히 들어와 절하거늘, 부사 정신을 가다듬으며 묻기를,
“너는 어떤 여자이기에 깊은 밤에 와 뵈느냐?”
그 여자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일어나 절하고 대답하기를,
“소녀는 이 고을에 사는 여자이온대 이름은 홍련이옵고 배좌수의 딸이오니 장화는 소녀의 언니라.”


어떤가 하면 그는 초록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미인(美人)’이다. 행동거지 또한 다소곳하여, 철산부사 앞에 예를 차려 절을 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공손하게 아뢴다. 혹시라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귀신의 모습을 상상했다면 실망감을 느낄 만한 형상이다. 저건 오히려 ‘착해 빠진’ 모습에 가깝다.

그런데 이건 좀 이상하다. 세상에, 저렇게 착하고 순한 모습에 고을 원님들 여러 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다니! 그렇다. 저것은 원귀의 진짜 모습일 수가 없다. 작가가 장화와 홍련의 편을 드느라 저렇게 곱게 순화하여 묘사한 것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원래 모습은? 그것은 한번 보는 순간 감당 못할 공포에 질려 쓰러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어야 마땅하다. 동굴 같은 두 눈에서 피눈물이 줄줄 흐른다든가 하는 그런 식으로. 두 귀신은 한 고을을 폐읍으로 만들 정도로 공포의 존재가 아니었던가.

나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장화와 홍련 귀신에 깃든 섬뜩한 귀기(鬼氣)를 읽는다.

“아비 후처를 얻사오매 용모와 행실을 무엇 하나 취할 게 없었습니다.”
“소녀의 각골한 원한은 삼척동자도 다 아옵나니, 이제 명관이 간악한 계집의 말을 곧이들어 궁흉 극악을 깨닫지 못하시니 어찌 애달프다 하지 않으리이까?”
“소녀의 아비는 천황시절 사람이라도 흉녀의 간특한 묘계에 빠져 흑백을 분별치 못하오니…….”


 여기서 ‘후처’와 ‘간악한 계집’, ‘흉녀’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누구인가 하면 장화와 홍련의 계모인 허씨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새 어머니이다. 그러나 그녀는 장화와 홍련 자매에게 있어 ‘어머니’가 아니었다. ‘아비의 후처’였고 ‘계모’였으며, ‘간악한 계집’이었고, ‘흉녀’였다. 무엇 하나 취할 것이 없는, 요망하고 악독하여 죽여 없애야 할 존재였다. 저 말을 내뱉을 때 장화와 홍련의 눈에 서렸을 귀기, 섬뜩하지 않은가.

어찌 보면, 원귀가 흉측하고 끔찍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진짜로 무서운 일은 따로 있다. 무엇인가 하면, 장화와 홍련은 번연히 눈뜨고 살아 있을 때 이미 흉악한 귀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저 증오와 분노의 마음이란 죽어서 귀신이 된 다음에 비로소 생겨난 것일 리 없다. 그것은 살아생전에 이미 두 아이가 온몸에 꽉 차도록 품고 있던 마음이었다. 표현할 길이 없어서 가슴에 깊이 묻었을 따름이다. 그렇게 꽉 차 있던 귀신의 마음은 ‘죽음’을 계기로 마침내 몸으로부터 해방이 되어, 저렇게 무섭게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흉측한 귀신을 품은 채 365일 24시간을 살아온 꽃 같은 두 소녀. 생각할수록 소름 끼치는 일이다.

‘착한 아이’라는 억압

장화와 홍련은 ‘예쁘고 착한 아이’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은 그 착함의 단적인 상징. 어머니가 병에 들자 자매는 밤낮으로 약을 달여서 올리고 병이 쾌차하기를 하늘에 빌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조석으로 정성껏 제삿밥을 바치며 지극히 슬퍼한다. 이루 다 칭송하기 어려울 정도다. ―세상에 저렇게 착한 애들이 다 있어! 기특하기도 하지!

더할 바 없이 착한 아이 장화와 홍련. 문제는 그들이 너무 착했다는 것이다. 어떤 정도냐면 마음속에 있는 속상한 일을 풀어내고 해소할 수가 없을 정도. 두 자매는 계모 허씨를 무척이나 경계하고 무서워하고 싫어했지만, 착한 그들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 보일 수 없었다. 그것은 착한 아이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른 말을 거역하거나 대드는 일 같은 건 언제라도 그들의 일이 아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당하며 참는 일뿐. 또는 기껏해야 방안에서 둘이 얼싸안고 우는 일뿐!

하지만 표현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안다. 저들이 얼마나 자기를 싫어하고 기피하는지를. “아이들은 참 착한데 엄마가 어찌 그리 모진지 몰라.”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계모의 머리에는 분노가 치민다. “저 겉 다르고 속 다른 것들이!” 하며, 핍박은 점점 커져만 간다. 풀릴 길 없는 악순환. 그 귀결은 비극 아닌 다른 것일 수 없다. 어느 한쪽이 사라져야 해결될 분노의 평행선. 경험도 적고 권력도 없는 자매는 그 다툼에서 무참히 패배할 운명에 있다.

“장화는 세상에 난 후로 문밖을 모르거늘 오늘의 애매한 누명을 얻사오니 전생죄악이 이같이 중하던지, 우리 모친은 어찌 세상을 버리시고 슬픈 인생을 끼쳤다가 간악한 사람의 모해를 입어 단불에 나비 죽듯 하니 죽는 것은 설치 아니하거니와 불초한 악명을 어느 시절에 신설하며 (……)”
“(……) 발명한즉 계모의 시기 있을 것이오, 살고자 한즉 부명을 거역함이나 일정한 명대로 하려니와 바라건대 잠깐 말미를 주면 잠깐 다녀와 죽음을 청하노라.”


장화에게 있어 자신의 누명은 ‘전생죄악’이었다. 그에게 있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부정한 아이’라는 오명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라서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원한 속에 자신의 생명을 내버린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착한 아이, 홍련이 그 뒤를 따른다. 마음속 검은 그림자는 이렇게 순식간에 두 아이를 통째로 집어 삼킨다. 착한 아이의 착한 삶의 비극적 종말!

아니,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서린 무서운 원한과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슈퍼에고(superego)’가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열리는 순간, 그들의 내면을 가리고 있던 윤리의 포장이 벗겨지는 순간, 그것은 ‘무섭게’ 터져 나오고 만다. 다름 아닌 ‘원귀’의 모습으로. 앞서 말한 바, 고을 원들을 단번에 절명시키고 온 고을을 폐읍으로 만든, 오늘날까지도 생생한 이미지로 전율을 선사하는 ‘처녀귀신’의 모습으로.

내 마음속의 귀신들

몇 년 전, 전 세계를 경악으로 몰아넣은 무서운 사건이 있었다.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한 학생의 총기 난사 사건. 수십 명의 무고한 생명을 빼앗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살인범은 젊은 한국계 유학생이었다. 그는 항상 말없이 움직이는 조용한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일러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누구한테 특별히 크게 화를 내거나 시비를 걸거나 한 일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 조용한 학생의 마음속에는 세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한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기괴하고 음험한 귀신으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귀신으로 잠복한 채 세상에 나타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 귀신이 밖으로 나섰을 때, 세상은 한순간에 검은 공포로 가득 차 전율했다. 장화와 홍련이 귀신이 되어 세상에 나섰을 때 그랬던 것처럼…….

어찌 소설 속의 일이기만 하겠는가. 또는 먼 나라의 일이기만 하겠는가. 주위를 돌아보자면, 아니 나 자신을 찬찬히 살펴보기만 해도, 마음속에 이런저런 귀신 천지다. 마음 한켠의 어둡고, 무겁고, 차갑고, 막히고, 꼬이고, 뒤틀린 그 무엇. 풀지 못한 원한이나 미움, 분노, 실망, 오해, 강박, 질투, 편견, 기타 갖가지 허튼 욕망들. 이런 것이 귀신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냥 잠깐 스쳐서 사라지는 것이라면 없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만, 그것이 몸과 마음에 깊숙이 틀어박혀 ‘나’의 일부가 된다면, 그리하여 나 자신이 귀신처럼 된다면 그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 착하다고 소문난 사람은 특히나 경계할 일이다.

뭐, 미리 겁부터 낼 일은 아니다. 귀신은 지레 겁내며 물러서는 사람한테, 심약(心弱)한 사람한테 쉽게 깃드는 법이니까.


※ 이 글에 실린 그림은 『장화홍련전』 (김윤주 그림, 한겨레아이들, 2007)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편집부
신동흔 | 충남 당진의 촌마을에서 태어나 등잔불 밑에서 어린 날을 보냈으며, 지금은 양평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문학을 공부하던 중 구비문학에 매혹되어 설화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옛이야기를 해석하고 풀어쓰는 일이 큰 기쁨입니다. ‘한겨레 옛이야기’ 시리즈를 기획했으며 『살아있는 우리신화』 『이야기와 문학적 삶』 『서사문학과 현실 그리고 꿈』 같은 책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