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8월 통권 제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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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는다]
미쳐 날뛰는 세계

윤석연 | 2010년 08월

1. 1981년, 투쟁(Fight) 혹은 비행(Flight)

의사가 꿈인 소년이 있다. 의사가 되는 길만이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도 죽지 마!』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의 접경 지대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주인공 퍼거스는 몸은 북아일랜드에 있지만 정신적 뿌리는 아일랜드 공화국에 있다. 퍼거스의 형은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싸우는 IRA의 조직원으로 감옥에 갇혀, 단식 투쟁 중이다.

알다시피, IRA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추구했던, 아일랜드 공화국에 기지를 둔 비공식적인 반 군사조직이다. 퍼거스도 삼촌의 말처럼 “언젠가는 바다가 유일한 국경이며, 모래언덕만이 보초를 서는 나라가 될” 날을 기다리지만 폭력전술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어가는 형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퍼거스는 삼촌과 함께 구덩이를 파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습지에 묻혀 있는 아이의 시체를 발견한다. 퍼거스는 예상치 못한 발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아이는 틀림없이 살해되었으리라. 2천 년 전 죽은 여자아이를 두고 아일랜드 공화국과 북아일랜드 경찰이 설전을 벌인다. 죽은 이 아이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아이인가? 북아일랜드의 아이인가? 그리고 아이는 왜 살해당했을까?

감옥에서 단식 투쟁 중인 형을 두고 서로 할퀴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습지에서 발견된 아이, 두근거리는 야릇한 감정으로 다가오는 코라, 형의 단식을 멈추기 위해 국경 너머로 수제 폭탄을 운반할 것을 제안하는 형의 친구, 국경 지대에서 만난 아일랜드 공화국의 순진한 군인. 퍼거스는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두렵기만 하다. 하루라도 빨리 이 미쳐 날뛰는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다. 

2. “메이드 인 베트남”

의사가 꿈인 소녀가 있다. 그렇지만 14살 소녀 란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 고엽제로 병을 얻은 아버지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사촌들, 가난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신발 공장에서 돈을 번다.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잘 수도 없고, 화장실도 자주 갈 수 없다. 공장은 신발에 붙이는 접착제 냄새로 지독하다. 졸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작업 감독의 막대기가 등을 때리고, 군인처럼 의자에 올라서서 성냥개비를 눈꺼풀에 끼우고 서 있는 벌을 받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잠들지 말라고 모든 노동자들에게 경고하는 생생한 본보기가 되는 셈이다.

벌을 서고 있는 맞은 편 벽에서 호찌민의 초상이 벌 서는 소녀를 건너다본다. 호찌민은 작업장 안을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베트남 민족을 위해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평생 싸웠고, 자신의 삶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 더 이상 외국 지배자에게 착취당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사람.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외쳤던 사람. 누군가가 호찌민의 초상 밑에 “베트남의 마지막 공산주의자”라고 써 놓았다.

3. 우리가 하지 않은 것

우리는 우리가 한 것보다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더 고통을 느낀다. ‘이 망할 꾸러미만 아니라면……. 형만 아니었다면……. 분쟁만 아니었다면……. 아일랜드가 아주 오래전부터 영국에서 분리되지만 않았다면, 영국이 유럽에서 분리되지만 않았다면…….’

퍼거스는 자신이 나르는 꾸러미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괴롭다. 형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도 되는 건지, 모두가 사는 방법은 없는 건지 미칠 것만 같다. 모두를 폭력과 절망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형은 단식 투쟁 중인데 나는 그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범죄는 어떻게 해도 범죄일 뿐이고 정치적인 범죄 따위는 존재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싸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형의 상황이 바로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형이 옳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한가지만은 확실합니다. 지금은 증오의 시기이며 더 나빠지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이 투쟁에는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습니다. 형은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나는 형을 잃게 되는 것이고요. 거리에서는 더 많은 생명들이 죽고 있습니다. 당신은 표와 지지자, 그리고 아마도 역사 속에서의 당신의 자리도 잃게 될 겁니다. 희망 또한 잃어버리겠지요. 우리 모두 말입니다. 출구는 없는 걸까요? (『그래도 죽지 마!』  147쪽)


출구는 없는 걸까?

밀려드는 작업 때문에 설날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란은 생각한다. 방법이 없는 걸까? 끝없는 노동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걸까? 정당한 대가를 받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내 손으로 만든 운동화를 한 번이라도 신어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그래 멋지지.” (……) “겉은 그래. 하지만 넌 신발 안을 들여다봐야 해. 신발창의 층들 사이나 안쪽을 말이야. 아주 깊숙이, 가죽 속에 파묻혀, 우리의 피곤한 눈과,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의 분노가 들어 있어. 이 신발을 신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의 고난을 밟으며 거니는 거야.”(『메이드 인 베트남』  174쪽)

소년과 소녀는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한다. 설령 분쟁을 끝낼 수 없다 해도,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해도. “우리가 한 것보다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설령, 더 싼 노동력을 찾아 헤매는 자본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먼지와 악취로 지독한 작업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뭔가를 하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소년과 소녀는 무언가를 하기로 한다.

4. 출구는 없는 걸까?  

         인장 응력
E =  
                  
        인장 변형률
 

퍼거스의 물리학 교과서에 쓰여 있는 이 공식은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을 설명하는 그럴듯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여기의 E는 사람을 뜻하는 그림으로도 사용된다. 이미 오래 된 교과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에너지란 양이 질로 전환할 때 발생하는 힘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역사를 이렇게 가르치지. 전쟁 또 전쟁. 마치 그 사이에 보통의 살아 있는 존재들은 아예 없는 것처럼 말이야.”(『그래도 죽지 마!』  179쪽)

『그래도 죽지 마!』와 『메이드 인 베트남』 두 소설은 분쟁 혹은 자본의 전쟁으로 미쳐 날 뛰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출구가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도 소년과 소녀는 꿈을 꾼다. 전쟁 또 전쟁, 착취 또 착취의 험악한 역사만을 기억하고 가르치려 하는 어른들의 세상에서도 소년과 소녀는 꿈을 꾼다. 그 사이 어딘가 살아 있는 보통의 존재들, 아예 없는 것처럼 취급받고 있는 하찮은 존재들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일에 명분을 내세워 서로 싸우고 할퀴고 상처 내는 방식이 아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모두가 평화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꿈꾼다. 투쟁(Fight)이 아닌 비행(Flight)을 꿈꾼다.

세상의 모오든 소년과 소녀들이여 비행하라! 높이 올라 맘껏 분쟁을 비틀고 착취를 비웃길.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을 향해 높이 올라 힘차게 발길을!
윤석연│세상의 많은 작은 것들을 좋아하고, 좋은 이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하고, 격식이나 예절, 서열, 질서 따위를 싫어합니다. 늘 싫고 좋음을 분명하게 말해 버려 가끔 미움도 받지만, 언제나 씩씩하고 즐겁게 살고자 애씁니다. 그리고……혹시 글 쓰는 걸로 이 세상 선한 일들에 보탬이 된다면 꾸역꾸역 하겠다고 맡고 나서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