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9월 통권 제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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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깊이 들여다보기]
21세기의 미성년 홈리스 수감자를 위하여

김지은 | 2010년 09월

1. 집 없는 어린이

상당히 많은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집이 없다. 자가 주택 보유율이라든가 장기 임대아파트 당첨 유무,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반질반질한 부엌이나 대형 텔레비전이 설치된 몇 평방미터 이상의 거실을 가진 세대주의 자녀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거주지’가 아니라 ‘집’이다.

우리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우선 집은 ‘홀로 또는 함께 머무르는 곳’이다. 나와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존재가 사람만은 아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돼지와 한집에서 살았다. 한자로 ‘집 가(家)’ 자는 한 지붕 아래에서 돼지(豕)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일본어에서 집을 의미하는 ‘야(屋 ya)’는 냐(nya), 나(na)로 소급된다. 한글의 ‘나무’와 어원이 같은 것이다. 이렇게 집에는 동물, 식물, 사람이 더불어 머무른다. 더 나아가 산과 강과 흙이 어우러진 곳이다. 우리말 ‘오두막’에서 ‘오두’는 산을 뜻하는 옛말이다. 기와집의 고어 ‘디새집’에서 ‘디새’는 ‘딧(딛)-’으로 흙이라는 뜻을 지닌다. 흙으로 지은 집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이건 곧 흙의 집도 된다. 나와 다른 생명, 자연이 어우러진 터전이 바로 집이다.

또한 집은 ‘우주를 꿈꾸는 곳’이다. 우주는 무한히 열린 공간이다. 주몽 신화에 보면 유리 태자가 자기 집의 ‘창틀’을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이 나온다. 집은 우리가 상상하는 우주의 축소판이면서 우주로 향하는 길이기도 했다. 민속신앙에서는 신이 집에 들어와 사람과 함께 산다고 믿었다. 가옥신인 ‘성주’, 부엌신인 ‘조왕’은 물론, 뒷간에는 ‘측신’이 버티고 있다. 집은 신의 왕래가 가능한 통로로 열려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사람도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을 꼭 닫아걸지 않는 풍습도 여기서 왔다.

무엇보다 집은 ‘안식처’이다. 옛사람들이 무덤에 물건들을 같이 묻을 때 집 모양의 토기를 함께 묻은 것은 이승을 떠나서 편안히 머무를 곳이 없을까봐 염려한 까닭이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고 편안히 잠들 수 있는 곳이 집이다. 마음대로 하고 지내도 상관없는 넉넉함이 있는 곳이다. 시설이나 규모를 떠나 안락해야 집이다. 그러기에 윤선도는 ‘바위 아래 띠집을 지어도 이것이 내 분이다.’라고 시를 읊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우리 어린이에게 집이 없다고 하는 것일까. 물론 그들에게는 거주지가 있다. 하지만 많은 시간 ‘머무르는 곳’은 학교나 학원이 되고 있으며, 집에 돌아가도 ‘우주를 꿈꿀 자유’보다는 ‘텔레비전을 잠깐 보거나 게임을 할 자유’를 얻기에 급급하다. 무엇보다 오늘날 우리들의 집은 그다지 안락하지 않다. 인구의 대부분이 거대 도시를 중심으로 몰려 살고 있어 집 앞 골목에서조차 자동차, 오토바이와 어깨겨룸을 해야 한다. 집 안의 가전제품이 발달하는 만큼 집 밖의 모든 것을 차단하는 창호 시스템과 보안장치도 발달했다. 바깥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안이라고 해서 안락한 것은 아니다. 일제고사를 앞두고 0교시 수업을 시키는 학교는 집에서 한시라도 빨리 어린이를 빼내오지 못해 안달이다. 서점에서는 밥상에 세워놓고 외울 수 있는 단어장을 판다. 원거리 통근에 지친 부모는 몸을 누이는 순간에도 아이들에게 다음날의 시험 스케줄을 묻는다. 오늘은 또 몇 시에나 잘 수 있느냐가 집에서 서로 물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질문이 되어 버렸다. 잠들지 못한 아이들은 학원 버스 안에서 무거운 가방에 얼굴을 묻고 잠든다. 잠들지 못하고 꿈꾸지 못하는 집은 집이 아니다. 어린이 홈리스의 시대다.

2. 집 밖에 가둔 사람들

적지 않은 어린이가 집을 잃었으나 그것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어린이를 어딘가에 수감시키는 일에 골몰한 사람들에게 어차피 집이란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규격을 갖춘 제도는 대개 수감 생활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학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규칙을 따라야 하고 일정한 시간 그 안에 머물러야 한다. 정해진 일을 수동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도 비슷하다. 물론 수감 시설에 비하면 학교는 훨씬 민주적이고 능동적이며 재미있는 공간일 테고 그래야만 한다. 어린이들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등교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학교를 나온 어린이들은 줄지어 학원으로 간다. 서열식 학교 경쟁은 감옥처럼 가차 없고 맹목적인 학원 순례는 행군보다 고되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수인 취급을 받으며 ‘왜 앞서지 못하느냐.’는 구호에 시달리는 이 어린이들이 안식을 얻을 곳은 과연 어디일까.

청소년 인권행동 단체인 ‘아수나로’는 지난 2월 한 고교 졸업식 현장에서 두부먹기 퍼포먼스를 벌였다. 자신들의 처지를 일컬어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공부라는 형벌을 받은 채 졸업이라는 석방을 기다리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공부가 형벌이고 학교가 감옥이라면 이미 그 교육은 배움이 아니다. 의지가 없으면 사람은 절대로 배우지 못한다. 답습할 뿐이다.

아이들이 집을 되찾는 일은 학교가 달라지는 것, 나아가서 사회가 달라지는 것과 연관이 깊다. 학교를 좀 더 민주적인 공간으로 바꾸어서 집도 좀 더 집답게 되돌려보자는 움직임이 ‘학생인권조례’다. 최근 이를 비롯한 학생인권 신장 정책을 몇몇 교육청에서 내놓았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받고 있는 부당하고 비민주적인 처우를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학교를 좀 더 치밀한 수감 시설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교육계 일각에서 나왔다. ‘우리 아이들을 망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학생 체벌을 비롯한 각종 학내 강제규정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강경한 의견을 보면서 ‘우리 죄수들을 망치게 될 것’이라는 간수장의 목소리가 겹쳐 떠올랐다. 아니다. 심지어 교도소에서도 체벌은 금지된 지 오래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학교를 교도소보다 더욱 수위 높은 폐쇄적 수감 시설로 운영하여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창의적 학생이 아니라 유사 수감자를 양산하는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사회가 어떤 말로를 향해갈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하얀 얼굴』에 실린 단편 가운데, 김종렬의 「수업」은 학교 감옥의 실체를 선명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첫 문장만 보아도 흡사 감옥이나 정신병원의 폐쇄 병동이 떠오른다. ‘사방이 가로막힌 하얀 방 안에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이 동화는 “여, 여기서 나, 나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독자를 서서히 공포에 몰아넣는다. 이 아이들의 발목에 채워진 강철 발찌는 견고하고 감시의 눈은 철저하다. 하얀 방은 다른 하얀 방으로 이어지지만 경쟁에서 진 누군가는 갇힌 채 남아야 한다. 대답이 늦는 자, 수학 문제를 빠르게 풀지 못하는 자는 이 감옥 같은 방에서 나갈 수 없다. 급기야 ‘양보하는 마음’을 테스트하는 단계에 이르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자신에게 나갈 권리를 양보하는 친구에게 속삭인다. “이곳을 나가면 꼭 데리러 올게.”라고.

사방에서 이 비열한 경쟁을 뚫고 홀로 문을 빠져 나온 아이들이 다시 흰 벽 앞에 줄지어 서는 마지막 장면은 섬뜩하다. 작품 속 등장인물의 말처럼 졸업할 때까지 수업은 계속된다. 이긴 자 또한 여전히 갇힌 자다. 친구를 데리러 간다고? 구해 주겠다고? 감옥 안에서?

하얀 방을 전전하는 아이들이 더 처절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들을 안아 줄 집조차 실종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에디슨에게는 손잡고 함께 학교를 뛰쳐나와 준 엄마가 있었고, 아인슈타인에게는 학교가 거절한 그를 반 년 동안이나 들로 산으로 데리고 다닌 부모가 있었다. 작품 속 아이들은 어떨까. 엄마도 아빠도 또 다른 간수장의 얼굴을 한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한 ‘집에 간다’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학교 체벌에는 분노하면서도 학원 체벌은 더 가혹하게 주문하는 부모들이 무수한 형편이다. ‘일등을 하면’ 내 아이만은 어떻게든 저 감옥에서 먼저 출소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가진 것이리라. 이것이 환상이라는 경고가 이 작품이 보여주는 공포의 핵심이다. 그런데 교사도 부모도 그릇된 환상을 수호하고 감옥을 지키는데 한마음 한뜻이라니 갇힌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절망이 어디 있을까. 「수업」의 마지막 장면은 누구도 감옥에서 나갈 수 없다는 기괴한 순환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호러 동화를 표방했음에도 작품이 실제 현실보다 크게 무서운 얘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공포 동화로서는 실패한 셈이다. 이런 동화가 사실적인 이야기로 평가받아야 하는 놀라운 장소가 2010년 대한민국이다. 

3. 책은 꿈꾸는 집

학교만 아이들을 가두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학원은 더욱 효율적으로 편재된 제 2의 감옥이다. 재수생이나 입소하는 줄 알았던 기숙사형 스파르타 학원은 최근 초등학생용으로도 성업 중이다. 스파르타 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자주 불릴 줄 상상이나 했을까. 이른바 ‘교육열’이 높다는 지역에서는 어린이를 과외교사팀과 함께 해외로 보내 스파르타식으로 외국어 교육과 교과 공부를 시키는 것이 유행이란다. 국내에도 쉬쉬하면서 각종 기형적인 학습 캠프가 생겨났다. 초등학생들을 데려다가 ‘펜션’에 합숙시키면서 무섭도록 집중적으로 공부를 시켜 진도를 ‘빼준다’는 기묘한 캠프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등학생의 사교육 캠프를 다룬 작품이 나왔다. 그것도 아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모의 꿈꾸는 집』은 어느 ‘수준 높은 독서캠프’에 참가한 주인공 진진의 이야기다. 진진의 엄마뿐 아니라 진진이 자신도 ‘특목고 마법’에 단단히 매료된 사람들이다. 하얀 방에 갇힌 아이들이 이겨서 여기를 나가면 자신은 해방될 수 있다고 믿듯이 진진이도 엄마도 특목고는 출소를 앞당겨주는 특별한 문이라고 생각한다. 특목고에 떨어져서 ‘수인’으로 남느냐, 특목고에 붙어서 당당히 다음 문(실은 감옥의 다른 문)으로 입성하느냐를 놓고 극도로 긴장하던 이들 모녀는 어느 날 새로운 정보를 입수한다. ‘특목고 입학에 도움이 되는 아주 특별한 캠프’가 있다는 것이다. 진흙탕 같은 경쟁 때문에 사교육 정보란 학부모들 사이에 기밀처럼 다뤄진 지 오래다. “자기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무조건 거기를 갔다 와야 특목고 가는 데 유리하대.”, 뭐 이런 식으로 정보가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 캠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도 그 탓이다.

세상에 떠다니는 정보 중에는 사실과 영 딴판인 것도 있는 법이다. 진진이네 경우가 그랬다. 이 대단하시다는 사교육 프로그램은 알고 보니 넉살 좋고 책 좋아하는 한 아줌마가 만든 ‘스스로 책 읽기’ 모꼬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명하기는커녕 찾아온 사람도 진진이 딱 한 명이다.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라는 이 사교육 사기꾼의 행각은 작품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정보를 부풀리고 착각한 쪽은 ‘특목고병’에 걸린 진진이 모녀다. 게다가 진진이는 느긋한 책벌레 아줌마와 보낸 기간 동안 ‘진짜 책의 맛’을 터득했다. 이런 사기라면 당할 만하다.

‘이모의 꿈꾸는 집’은 책으로 가득한 집이며 그 책들이 저마다 말을 하는 집이다. 책 속에는 지식이 있으며 그것은 자신에게 ‘입력해야 할 대상’이라고만 여기던 진진이에게 살아서 돌아다니는 책 안의 다양한 감정들은 놀라울 따름이다. 진진이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에게 자신의 마음이 읽히는 순간’을 경험하고 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야기 속을 뛰어다닌다. 이 작품에는 『책만 보는 바보』, 『태일이』, 『요츠바랑』, 고리끼의 『어머니』 등 우리가 서점에서 만날 수 있는 책의 실명이 등장한다. 어딘가에 이런 ‘꿈꾸는 집’이 있을 것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렴. 없으리란 법은 없다. 광고라도 뚫어지게 찾아볼까.

이 작품이 앉은 위치는 절묘하다. ‘특목고 입시 학원’이라는 감옥을 스스로 청하여 걸어 들어가는 진진이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나홀로 출소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단단한가를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방학에도 ‘집’에 있지 못하고 ‘감옥’을 전전해야 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전한다. 진진이 모녀에게 ‘집’은 감옥 생활을 돕는 ‘베이스캠프’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진진이에게 ‘집’을 되찾아 주려는 시도를 벌인다. ‘이모의 꿈꾸는 집’이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진진이는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빨래를 널고 밥을 먹고 바람을 쐰다. 고양이 등을 쓰다듬고 이웃집 친구와 수다를 떨고 눈사람을 만든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진짜 책 읽기’를 한다.

집은 이런 곳이다. 우주를 꿈꾸는 곳이다. 회사가 학교가 주지 못하는 평온함을 듬뿍 안겨 주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곳이다. 내 꿈을 어떤 잣대로도 잘라내지 않는 곳이다. 진진이의 혈육이 아니지만 캠프 주인이 ‘이모’인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진진이에게 감옥 바깥의 숨을 맛보게 해 준 ‘이모’는 분명 가족이 해야 하는 일을 해냈다. 캠프에서 돌아온 진진이는 이제 ‘집이 있는 아이’다. 집의 소중함을 깨달은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학교생활을 꾸려나갈지 진진이의 달라질 행보가 궁금하다.

4. 자연이라는 해방구

모든 아이들이 학교가 감옥이라는 자각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은 고학년이나 중학생보다는 학교를 즐거워한다. 아직 따뜻한 집의 힘이 살아 있는 활기 넘치는 가정도 많다. 그렇더라도 도시의 집은 집의 기능을 다하는데 한계가 있다. 산과 흙과 강이 어우러져 풀과 나무와 강아지, 토끼가 함께 살던 것이 우리네 집의 뿌리다. 사람들이 더 살기 편한 집을 찾아서 도시로 모이는 사이에 진짜 집들은 외롭게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오래된 흙벽집』은 바로 그런 집 얘기다.

먼지를 대강이라도 떨어내려고 시계를 떼어 내는데, 반반하고 움푹 파인 괘종시계 위에서 새 한 마리가 홀짝 날아오르더라고 했다.(『오래된 흙벽집』 14쪽)

한 달 집세 10만원이라는 말에 매형네 더부살이를 청산하고 시골집으로 내려간 꼬라비 삼촌은 방학을 맞은 조카 재현이를 그 집으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재현이는 ‘시골에 와라.’하면 덜컥 좋아라하고 내려가는 털털이가 아니다. 거기 가면 씻고 먹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가늠할 줄도 알고 ‘줄무늬 수영복 입고 수영장에 가는 것’이 더 근사할 거라는 계산도 할 줄 안다.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어쩌다 흙벽집에 가게 되긴 하였지만 탐탁지 않다. 밤이면 기분 나쁜 새소리나 들리는 이런 집에 며칠 더 있어봤자 라는 생각이다. 그런 재현이에게 삼촌은 ‘흙벽집’의 비밀을 들려준다. “흙벽집이 밤이면 코를 곤다.”는 것이다. 재현이는 그 비밀을 확인하기 위해 몇 밤 더 머물고, 흙벽집의 진짜 매력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집을 넘어서는 해방의 즐거움을 누린다.

작가는 ‘코를 코는 집’이라는 설정을 끝까지 유지한다. 주인공이 마침내 드르렁 소리를 듣게 한다. 꿈같기도 하고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한 흥미로운 장면이다. 도시의 집은 집과 바깥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지만 시골집은 그렇지 않다. 눈 감고 잠자리에 누워도 온갖 소리와 냄새가 날아다닌다. 나는 집이고 집은 마당이고 마당은 곧 산이고 들이다. 집에서 잠드는 것은 들에서 잠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잠들면 산도 들도 잔다. 하물며 집이 코 좀 곤다고 해서 뭐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

“쉿!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사람의 숨, 나무, 꽃, 새, 풀, 물고기, 흙 같은 것들의 숨은 모두, 서로서로 바꿔 쉬는 거래.”(『오래된 흙벽집』 126쪽)

마지막에 재현이가 발명가 아저씨의 말을 떠올리는 장면은 나와 집과 자연의 호흡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대한 얘기다. 작가는 ‘코고는 집’이라는 설정을 통해 내 마음을 닫아건다면 자연과 함께 숨 쉴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마땅히 나누어 쉬어야 하는 숨을 서로 나눌 수 없다면? 인간의 미래는 말할 필요도 없다.

5. 어린이들의 내 집 마련

「수업」의 아이들이 집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모의 꿈꾸는 집』의 진진이가 부분적으로나마 집을 다시 가지게 될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오래된 흙벽집』의 재현이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본래의 집이 어떤 집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물론 재현이도 다시 도시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이 마을에 머물고 싶어졌다.”는 재현이의 말에서 그가 ‘진짜배기 집’의 느낌을 감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미 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지내는 우리 아이들로서는 ‘본래의 집’이 어떤 집인가를 경험하는 것 자체가 소중해지는 시대다. 그것은 인위적인 현장체험 행사나 ‘자연은 소중하다.’는 식의 당위적 설명만으로는 그 경험을 얻기 어렵다. 지속적이지도 않거니와 자발적인 느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진이가 재현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런 집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책이 줄 수 있다면 일단 시도는 성공한 셈이다.

‘가짜 내 집 마련’ 경쟁에 시달리느라 집을 잃은 것은 어른도 마찬가지이기에 부모와 자녀가 함께 달라져야 ‘본래의 내 집 마련’도 가능할 것이다. 누구도 누구를 수인으로 가두려 하지 않으면서 집과 학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은 이상에 불과한 것일까. 모든 이상은 완벽한 실현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향한 발걸음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인권조례’라는 작은 발걸음이 성공적으로 첫발을 디뎌 우리 아이들의 발목을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4대강 사업이라는 숨 막히는 사업이 강과 우리가 나누는 사이좋은 호흡을 위협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김지은│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심리 철학과 철학 교육을 전공했습니다. 동화 작가이며 철학자로, ‘어린이를 위한 철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바람 속 바람」이 당선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평론 「어린이의 도덕, 어른의 도덕」 등도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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