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3월 통권 제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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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책·그림책 이야기]
책이란 무엇인가

이상희 | 2011년 03월

대학생 딸아이가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요청하는 수많은 주문들 중에 딱 하나 반가운 것이 ‘지금 도서관! 재미난 책 추천해 줘요’라는 것입니다. ‘흠, 그래도 책 맛을 잊진 않았구나’ 하는 흐뭇한 마음으로 딸아이 취향에 맞춰 이 책 저 책을 떠올리곤 하지요. 얼마 전 설날에는 “진짜 재밌어!” 하고, 고속버스 타고 오면서 읽었다는 『반쪼가리 자작』을 꺼내더군요.

‘이탈로 칼비노’라면 미처 추천한 바 없지만 내외 둘 다 무척 좋아하는 작가라, 지난번 가족 여행 내내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딸아이 머리 위로 여러 차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우리 내외는 모처럼 나란히 기분 좋은 감탄사를 터트렸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든 ‘종이책의 멸망’이니 ‘단군 이래 최대의 출판 불황’이니 하는 흉흉한 얘기가 모두 헛소문이라 내칠 만했어요. 딸아이를 둘러싼 수많은 재미난 것들 가운데 다름 아닌 책이 ‘진짜’라니 말입니다.

어쩌다 그런 일이 있긴 해도 때때로 책이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황망한 마음인 채 자신에게 묻곤 합니다. 그것은 저자와 독자, 출판인이 생산자와 소비자, 가공업자가 된 시절을 탓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본질을 챙겨보자는 다짐이기도 하고, 언젠가 ‘책’에 대한 근사한 그림책을 만들려는 욕망이기도 할 터입니다.
『책』은 ‘따뜻한그림백과’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 정보를 작가의 생각과 정서로 엮어낸 그림책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아무것도 안 하면서도 바쁠 때가 있어요.

이런 수수께끼 같은 글로 시작되는 첫 장면은 한 집에 있는 가족으로 보이는 세 사람---소파에 앉아 있는 엄마, 탁자 위로 고개를 숙인 아이, 가스레인지 앞의 아빠---이 제각기 등을 보인 채 무엇인가 들여다보느라 멈춰 있는 그림입니다.

다음 장면은 수수께끼의 답으로 이들이 이토록 아무 움직임 없이(‘아무것도 안 하면서’) 골똘히 집중한(‘바쁜’) 정면 그림을 통해 아빠는 요리책을, 아이는 그림책을, 엄마는 두꺼운 사전(으로 보이는 것)을 ‘읽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책 읽는 모습’으로 ‘책 읽기’ 또는 ‘책’에의 몰입까지를 얘기하는, 독특한 장면입니다.

다음 장면은 여러 가지 책들 속에서 뽑힌 요리책과 도감의 한 부분을 펼쳐 보인 채 이 가족이 책을 읽는 까닭과 그로 인해 얻는 소득을 얘기하지요.

궁금한 게 있을 때 책을 읽어요.
어떤 말의 뜻이 알고 싶으면 사전을 찾고
처음 해 보는 음식을 만들 땐 요리책을 봐요.
책을 읽으면 똑똑해져요.

아이의 그림책---표지와 펼침 장면---들로 구성된 다음 장면에서는 상상과 서사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책’의 본질 하나가 거론됩니다. 무엇보다도 책은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책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어요.
다른 나라나 우주로 모험을 떠날 수도 있고,
토끼가 되거나 강아지 똥이 돼 볼 수도 있어요.
책을 읽으면서 깔깔 웃기도 하고,
훌쩍훌쩍 울기도 해요.

‘책의 정의’와 ‘책의 유래와 본질’과 아울러 ‘바코드’와 ‘점자책’을 설명한 짤막한 지식정보 페이지를 건너뛰면,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전자책, 카세트테이프와 CD로 듣는 오디오북, 팝업북을 늘어놓은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 글이 나옵니다. 다양한 물성과 형태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책들을 보여 주는 거지요.

이어서 또다시 점토판에서 종이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간략히 정리한 지식정보 페이지가 나오고, 초기 수작업에서 목판·금속 활판을 거쳐 지금과 같은 대량 인쇄에 이르는 과정이 조그만 자료 그림으로 나열됩니다. 이 장면은 지식정보 페이지와 변별성이 없어, 앞서 보여준 독특한 화법의 서사가 맥 끊기는 듯도 합니다. 얼른 다음 장면으로 달아나면, 다행히 도서관 얘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서관은 책들이 사는 집이에요.
도서관에 가면 책을 골라서 읽을 수 있어요.
집으로 빌려올 수도 있고요.
보고 싶은 책을 누군가 먼저 읽고 있으면
기다려야 해요.

‘책들이 사는 집’이기보다는 ‘사람들이 책을 읽고 빌리러 모여드는 곳’을 보여 주는 이 장면은 정확히 도서관 풍경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펼친 아이들은 언젠가 어른과 함께 갔던 도서관을 떠올리며 사실(寫實) 그림의 감흥을 즐기겠지요.

다음 장면은 서점 풍경과 여러 장소와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책 읽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 번 읽고 싶은 책도 있고,
그때그때 찾아봐야 하는 책도 있어요.
그런 책은 사서 가지고 있어야 해요.
책을 파는 곳이 서점이에요.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는 사람도 많아요.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읽고,
공원 벤치에 앉아서도 읽어요.

책과 지갑을 든 아이가 서점 계산대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진지합니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노신사, 버스 정류장인 듯한 곳에 서서 책을 읽고 있는 아이, 서점이나 도서관 서가 사이이지 싶은 곳에서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서가 앞에 선 채 책을 읽고 있는 사람,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 들이 하나같이 골똘히 책 읽기에 빠져 있는 모습 또한 진지합니다.

책이 있는 곳에는 책의 친구들도 있어요.
책상, 책장, 공책, 책꽂이, 책가방, 책갈피……
책의 친구들은 책을 편하게 읽고,
가지고 다니고, 보관하게 도와줘요.

바깥세상에서 돌아와 마주하는 ‘나의 책이 놓이고 꽂힌 나의 책상과 서가’, 그것이 주는 행복감이 손에 닿을 듯 펼쳐집니다. 책을 위해, 책에 의해, 책과 함께, 존재하는 사물들은 우리의 친구이자 책의 친구들이지요.

다음 장면은 책의 범위를 좀 더 넓혀서 생각하게 합니다.

혼자서도 책을 만들 수 있어요.
가족의 사진을 모아 두는 앨범도 책이고,
좋아하는 글이나 사진을 모아서
붙여놓은 것도 책이에요.
그림을 그려서 묶어도 책이 돼요.


책의 본질 또 한 가지는 ‘모으고 기록해 엮은 집적물’이지요. 한 개인이 자신 또는 자기 가족과 함께 나누고 즐기기 위해 엮어 둔 다양한 기록물 모음도 책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 모든 책은 ‘사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강조한 다음 ‘나의 책’에 대한 얘기로 끝을 맺습니다. 어린 동생을 무릎에 앉히고 엄마가 읽어 주는 이야기를 귀로 들으며, 놀란 눈으로 그림책을 바라보는 아이는 첫 장면에 등장했던 바로 그 아이입니다.

돈을 주고 샀다고 해서 내 책이 아니에요.
내 이름을 썼다고 해서 내 책이 되는 것도 아니지요.
내가 읽는 책이 내 책이에요.

‘내가 읽은 책’ 또한 세월이 가면 잊히겠지요. 그러나 그 책의 ‘재미’는 뇌와 심장 깊숙이 새겨지는 법입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온갖 새로운 것들과 놀라운 것들에 비할 바 없이 ‘진짜 재미있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상희 |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었습니다. 시와 그림책 글을 쓰고 강의하면서 원주의 그림책 전문 꼬마 도서관 ‘패랭이꽃 그림책 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고양이가 기다리는 계단』 『도솔산 선운사』 『엄마, 생일 축하해요』 『소 찾는 아이』 『선생님 바보 의사 선생님』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등이 있고, 많은 영어 그림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