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7월 통권 제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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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깊이 들여다보기]
너른 품으로 안아 주는 시

이안 | 2011년 07월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를 진지하게 수용해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우리의 모든 부분이 훌륭하다고 확신시켜 주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를 위해 있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 (……) ‘건강한 자기애적 양식들’(……)에는 바로 나의 모습 그대로 사랑받고 존중받음, 특별한 돌봄과 대우를 받는 것, 어머니가 떠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는 것, 진정으로 보살핌을 받는 것 등등이 모두 포함된다. 어린 시절에 이런 필요들이 모두 충족되었다면, 성인이 된 후 더 이상 이것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존 브래드 쇼,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137쪽, 오제은 역, 학지사, 2004)

성명진 시인이 등단 20년 만에 낸 첫 동시집 『축구부에 들고 싶다』는 따뜻하다. 한 편씩 읽어 가노라면 마치 어머니, 아버지 품에 안겨 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과 동물과 식물을 따스하게 품어 안는 시인에게서 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이 느껴지기 때문인 듯싶다.


뿌 리

붓꽃잎 자매는
올해도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왔다.

저 아래엔
다정하고 부지런한
어머니가 계시나 보다.


이 작품은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꾸밈없이 나타내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좋은 시가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야 붓꽃잎을 그냥 붓꽃잎이 아닌, ‘붓꽃잎 자매’로 볼 수 있다. 가까이 가야 붓꽃잎 자매가 올해도 옷을 참 말쑥하게 차려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올해도’라는 말은, 지난해에도 붓꽃잎을 눈여겨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렇게 여러 차례 가까이 다가가서 본 뒤에야, 나에게뿐만 아니라 붓꽃잎 자매에게도 부지런한 어머니가 계시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붓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기는 올해가 처음이었다. 삼 년 전 가을, 무슨 볼일인가를 보러 시청에 들렀을 때 붓꽃 씨앗을 한 주먹 받아와 마당가에 뿌렸다. 이듬해 봄 싹이 올라왔다. 그러나 꽃대를 올리지는 않았다. 지난해 봄에도 마찬가지였다. 붓꽃은 몇 년을 자라야 꽃대를 올리는 모양이었다. 올봄에는 조바심까지 났다. 다른 집 붓꽃은 꽃대를 쭉쭉 올렸건만 이 아이들은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꽃을 보자면 일 년을, 혹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나 보다 하고 며칠째 붓꽃잎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잎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꽃대였다.

그제서야 붓꽃은 싹이 트고 삼 년째부터 꽃대를 올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도 다 그런 건 아니고 그 중 조숙한 것만 그러는 모양이었다. 오십 여 포기에서 꽃대를 올린 것이 고작 여섯 개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 이제 우리 집 마당에도 마침내 붓꽃잎 여섯 자매가 태어났다고 말해도 될까? 며칠이 가도록 그런 줄만 알았다. 성명진 시인이 말한 “붓꽃잎 자매”가 붓꽃 두 대를 가리키는 줄로만 알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붓꽃은 꽃대 하나에 위꽃과 아래꽃이 짝을 지어 두 송이로 피었다. 위꽃이 아래꽃보다 조금 커서 정말이지 언니가 동생을 포대기 둘러 업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그래서 “붓꽃잎 자매”라고 했구나!

지금 나는 여기까지 보았다. 내가 만약 이 상태에서 붓꽃잎 시를 쓴다면 어디에 초점을 두게 될까? 나는 붓꽃의 이러한 형상을 초점화했을 것 같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언니가 동생을 포대기로 꽁꽁 동여 업고 밭일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업고 아버지를 기다린다는 식으로. 혹은 자장가를 부르며 아기를 재운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붓의 형상에 집중하거나 ‘붓―꽃’의 관계에 착안해서 붓에서 꽃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렸을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놀라운 심정이 되어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을 때, 시인은 누구나 자신을 놀라게 한 그 핵심을 치고 들어갈 것이란 점이다.


성명진 시인은 그것의 “저 아래”로 내려가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신 “다정하고 부지런한 / 어머니”의 존재를 더듬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붓꽃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새롭게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품 이후부터 독자들은 붓꽃을 보면서 땅 속 어머니의 존재를 떠올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함에도 땅 속 어머니의 존재라는 설정은 지극히 교훈적이다. 붓꽃잎 자매에게 올해도 옷을 말쑥하게 차려 입힌 어머니는 유한계급의 어머니가 아니다. 분명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많을, “저 아래”의 삶을 사실 어머니다. 그러므로 그 어머니는 먹고사는 일로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매를 다정히도 사랑하여 없는 살림에도 옷가지를 말쑥하게 차려 입히신다. 성명진의 “붓꽃잎 자매”가 더없이 어여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교훈의 메시지가 조금도 거슬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작품에 깃들인, 위와 같은 전후좌우의 구체를 일체 생략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작품이 현상을 일일이 보고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상에서 본질을 곧바로 가리키는 직관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소재를 명명하는 첫 방식부터 ‘붓꽃잎’이 아니라 “붓꽃잎 자매”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성명진 동시의 요체는 시의 대상을 단순히 초점화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그것을 존재케 하는 넉넉하고 안전한 품으로서의 배후를 제시함으로써 시적 대상에 안정감을 부여하는 데 능숙하다.

이와 달리 「밤길 위」는 시적 대상을 촘촘하게 초점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작품은 화자와 대상 간의 거리를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자못 흥미롭다. 시인은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화자를 통해 대상의 존재 양식을 드러낸다. 이 거리를 통해 시인은 대상의 배후, 또는 그것이 속한 전모를 보여줌으로써 독자와 대상을 따스하고 든든한 보호자에게 안겨들게 한다. 화자는 지금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자의 자리에 있다.


밤길 위

점 하나가 오고 있다.
동네 앞에도
작은 점 하나가 서 있다.

길 위엔 두 점만 있다.
이윽고
두 점이 가까워진다.

그러더니
말소리가 들린다.

상우냐.
예, 아버지.

한 점이 다른 점에게 안긴다.
커진 점 하나가
집으로 간다.


오가는 사람도, 자동차 소음도 거의 없는 늦은 밤일 것이다. 높은 층 아파트의 베란다쯤에서 무심히 아래를 보던 시인의 눈에 점 하나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가만 보니 움직이는 점 맞은편에 또 하나 점이 있다. 시인은 눈을 조금 더 크게 뜬다. 움직이는 점이 서 있는 점 쪽으로 가까워지고 서 있던 점이 다가오는 점 쪽으로 가까워지는 게 보인다. 이윽고 두 점이 만나는가 싶더니 두 점 사이에 무언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상우냐. / 예, 아버지.” 이 소리는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두 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한 점이 다른 한 점이 걱정되어 잠 못 이루고 동네 앞에 나와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 한 점의 끝에는 자기를 기다려 주는 점 하나가 있고, 그와 함께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메시지만 놓고 볼 때 조금도 새롭다고 할 수 없다. 모든 메시지는 그것이 메시지인 한에서 상투적이다. 특히 동시가 담을 수 있는 메시지는 얼마간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제도적이거나 도덕적이기 쉽다. 그러므로 독자의 의식과 감성을 새롭게 헹궈주는 문학이 되기 어렵다. 메시지의 측면에서 이 작품은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집에 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부정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것은, 이렇듯 해묵은 소재로 이렇듯 상투적인 메시지를, 조금도 해묵거나 상투적이지 않게 전달하는 방식의 새로움이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화자와 대상 간의 거리, 부감자의 자리에 있는 화자의 위치와 관계된다. 만약 화자를 이와 다른 위치에 둘 경우, 이 같은 소재와 메시지로 이룰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불빛」의 방식은 이와 또 다르다. 직관도 초점화도 아닌 방식으로 대상이 놓인 자리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품을 비추어 보인다. 화자와 대상의 거리, 화자의 시선이 어떻게 이동해 가면서 대상에게 따뜻이 품을 지어주는지에 주목해서 읽을 때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불 빛

오늘 밤엔
용이 아저씨네 집에 켜진 불빛이
세상의 한가운데 같아요.

용이 아저씨가
불빛 속을 들여다보고 있고,
멀찍이서 나무들이
불빛을 둘러싸고 있네요.

그러고 보니
집 밖 언덕배기와 먼 산줄기도
불빛을 둘러싸고 있네요.

환한 그 속에선 지금
갓 태어난 새끼를
어미 소가 핥아 주고 있어요.


1연보다 2연에서 화자와 대상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2연 2행에서 화자는 대상과의 거리를 고정한 채 시선을 이동시켜 불빛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을 그려 보인다. 3연은 더 멀리까지 간다. 집 밖 언덕배기와 먼 산줄기까지. 말하자면 이것은 갓 태어난 송아지를 안는 품의 크기이자 송아지가 자라면서 살아갈 세계의 크기를 환기한다. 송아지는 어버이 자연의 넉넉한 품에서 태어나 그의 넉넉하고 아늑한 사랑과 관심, 보호를 받으며 자라게 될 것이다. 이윽고 4연에서 화자의 시선은 갓 태어난 새끼를 정성껏 핥아주는 어미 소에 고정된다. 화자와 대상의 거리 또한 그만큼 더 가깝다. ‘불빛’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세상이 문득 따뜻해지고 아늑해진다. 성스럽다.

「뒤에서 가만히」의 화자는 어린이다. 동시에서 어린이 화자를 내세우는 건 좋지 않다는 일부 주장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장자의 편협한 동시관의 노출일 뿐이다.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시에서도 화자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 화자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면 될 일이다. 이 작품은 어린이의 모험과 세계 탐색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시인이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를 생각하며 읽을 때 그 의미 파장이 크다. 어린이에게 모험을 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세계를 탐색할 호기심과 욕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작품에서 나온 것 같은, 사랑과 지지로써 기다려 주고 응원해 주며 위로해 주는 “아버지”의 존재가 아닐까. 그 존재가 있어 아이는 조심스러우나마 차근차근 자기만의 모험과 세계 탐색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뒤에서 가만히

재미나서 한 가지 더
새 둥지 보러 한 가지 더
그러다가 나무에 너무 높이 올라 버렸다.

문득 훤히 트인 하늘,
내려다보니 아찔한 땅,
무서워 울음마저 나지 않았다.

한참 떨다가
손에 가득 힘을 주고
나무에 바짝 붙었다.

그다음엔
발로 가지를 찾아 디디며
아래로 아래로.

드디어 땅에 내려섰을 때
누가 뒤에서 가만히 등을 도닥여 주었다.
아버지였다.


이 작품에서 시인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화자와 같은 위치일 수도 있고, 아버지와 같은 위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선 작품들과 같은 독법, 시인이 시적 대상에 품을 부여하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시인은 화자와 아버지를 동시에 바라보는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밤길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식―부모’ 관계에 알맞은 사랑의 형식을 부여하는 부감자의 위치에 시인이 서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축구부에 들고 싶다』에는 이렇듯 성숙한 어른의 시선과 품,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적지 않다. 시인은 ‘어버이―자연’의 품처럼 아늑하고 따뜻하며 넉넉한 세계를 그려 보인다. 그는 뒤에 처지는 이도 없고 혼자 뽐내어 솟아나는 이도 없이, 서로 다른 여러 사람이 호숫물처럼 맑고 따스하게 모여 살기를 바란다(「호숫물」). 시인의 바람은 조금 모자라는 듯 보이거나 수줍음 많은 아이를 응원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이 서로 기대어 마음을 나누며 사는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동시집에서 말재주를 빼어나게 드러낸 작품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따뜻한 감동으로, 웃음으로 다가오는 작품이 적지 않다. 이것은 감동이 말을 재주 있게 부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감동은 이 세상의 어리고 약한 이들에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마음을 따뜻이 보듬어 안는 데서 온다.
이안 | 199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치워라, 꽃!』과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을 펴냈습니다.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http://cafe.daum.net) 편집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