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7월 통권 제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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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 만드는 이야기]
역사와 공감이 있어 깊어지는 샘, 고전

고동균 | 2011년 07월

2006년 7월 20일, ‘샘깊은오늘고전’의 제1권인 『주몽의 나라』 초판 1쇄가 처음 세상에 나왔다. 이 기획을 시작한 때가 2003년 5월쯤이니까, 머릿속에만 도사리고 있던 책이 실제로 나오기까지 3년 남짓 걸린 셈이다. 그 뒤로도 이 샘깊은오늘고전은 느린 걸음으로 목록을 쌓아 가고 있다. 2011년 현재 샘깊은오늘고전의 목록은 제12권 『남한산성의 눈물』까지 모두 열두 종, 열두 권을 담고 있다. 한 해에 채 두 권을 내지 못하는 속도다. 그런데 이 느린 걸음은 게으름 탓에 늘어지는 걸음이 아니고, 챙길 것이 많아 자연스레 더뎌지는 걸음이다.

‘고전’이라는 깊은 샘

샘깊은오늘고전의 밑절미는 무엇보다 고전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인터넷 판은 고전 항목에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라는 정의를 붙이고 있다. 이 간명한 정의에 사족을 좀 붙인다면, 한 언어권의 문학사 안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읽어야 한다.” 또는 “읽어봄 직하다.”고 널리 인정받는 작품을 일러 고전이라고 할 것이다.

곧 고전은 역사와 공감 아래 깊어진 샘이다. 이 깊은 샘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리려고 하니 많은 준비가 필요할 수밖에. 더구나 고전은 한 나라의 모국어 교육과 그 나라의 역사 교육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본 자료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린이 교육 현장에서 고전은 늘 중요한 교재로 꼽히게 마련이다. 어린이를 위한 고전으로 가는 길은 역사와 안목과 공감의 샘에서의 물 긷기 말고도, 어린이에 대한 배려와 교육 효과까지 돌아보며 걸어야 할 길이란 말이다.
 
이런 아쉬움, 저런 아쉬움

처음 샘깊은오늘고전을 머릿속에 그리던 당시는 어린이를 위한 고전 기획과 출판에 막 힘이 붙던 때였다. 딱히 “이것이다”라고 할 만한 실제 출판물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교사와 학부모들 사이에서 ‘좀 더 나은 어린이용 독본’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높아질 때였다. 출판계에서도 그때까지의 어린이용 고전 출판에 대한 반성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해방 이래 독서와 출판의 질이 점차 높아진 현실과 고전 연구 분야에서 새로운 성과가 쏟아져 나온 추이의 연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물 곧 고전”이라는 식의 안일한 발상이 그대로 백여 권이 넘는 어린이용 총서의 실제 출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제멋대로 ‘고전’을 사칭했지만, 이런 기획에는 여성 비하, 장애인 비하, 속물근성에 대한 전도된 긍정, 정치적 패배주의, 운명론 절대화, 지배 이데올로기 절대화 들을 바탕에 깐 이야기가 일부 끼어들어 있었다. 고전의 원뜻을 들여다보지 못한 결과였다.

그 다음에야 사람들은 문학 작품에 눈을 돌렸다. “고물 곧 고전” 정도의 인식에서 벗어나고부터는 역사와 공감의 유산에 대한 아무런 비평적 접근이 없는 기획을 부끄러워하게 된 것이다. 하나 문학 작품을 매만져 어린이를 위한 고전을 기획한다고 해도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무리한 가위질이다. 무리한 가위질이 지나치면 줄거리, 서사 구조, 세부, 역사적 의의가 서로 어우러져 있는 고전 특유의 재미와 긴장까지 잘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선택과 시작

이런 아쉬움을 연료로 불을 지핀 기획의 첫 결실이 샘깊은오늘고전 제1권인 『주몽의 나라』다. 원작은 고려 시인 이규보가 이십대에 쓴 고구려 건국 서사시 『동명왕편』으로 한국 문학사 최대의 서사시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동명왕편』에는 「광개토왕릉비문」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세부에다, 고려인들이 알고 있던 ‘주몽 이야기’, 또 『구삼국사』 등 지금은 없어진 역사기록까지 집대성되어 있다.

아울러 난세에 겨레의 당당함을 일깨우려 한 젊은 시인의 기상이 살아 있다. 그 구체적인 면모는 원전 강독을 통해 다듬어 쓴 이, 조호상에게 고스란히 건너갔다. 꼬박 나흘에 걸친 강독이 해모수, 하백, 유화, 금와, 주몽, 유리 등 다채로운 인물, 건국 이야기다운 야성의 진면목을 살린 밑거름이었다고 자부한다. 언론은 책이 나오자 “그리스 로마 신화 못잖은 고전”이 드디어 제대로 된 어린이 판으로 나왔다는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 나온 제2권 『일곱 가지 밤』 또한 호평을 잇는 데 이바지했다. 이 책은 조선 후기 문인 이옥의 작품 열두 편을 서정오가 다듬어 쓴 것이다. 기획 당시만 해도 이옥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독자들은 『일곱 가지 밤』을 접하고 나서 “우리 고전에 이런 면이 있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인터넷 포털 ‘다음 daum’ 서평에는 다음과 같은 독자 서평이 남아 있다.

“초등학생 저학년부터 중고생은 물론 어른까지, 여러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해 주었는데 모두 만족스럽단다. 좋은 책, 좋은 고전이란 나이를 뛰어넘어 읽히는 책이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는 출간 당시에 많은 독자, 기자, 전문가 들이 보인 반응을 대표하는 표현이다. 이때부터 독자와 전문가들은 샘깊은오늘고전이 그저 한 권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믿게 되었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일곱 가지 밤』에 실린 이부록의 미술 작품 또한 “설명하는 삽화”를 넘어선 “은유하는 미술”로 주목받았다. 그후 ‘샘깊은오늘고전’에 수록된 미술 작품들은 『일곱 가지 밤』의 예를 본보기로 삼게 되었다.

신뢰를 쌓다

제3권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은 이경혜가 허난설헌의 시를 가려 뽑아 다듬어 쓴 ‘허난설헌 시 선집’이다. 이 책은 “앞으로 어린이를 위한 한시의 편집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샘깊은오늘고전의 고민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사실 시의 은유와 압축은 번역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렇다고 쪽마다 본문보다 껄끄러운 주석을 붙이면 그만인가. 허난설헌 작품 강독을 마치고 난 뒤, 다듬어 쓴 이는 시마다 주석 및 해설 역할을 하는 “다듬어 쓴 이의 말”을 붙이기로 했다. 내용이 어렵다면 더욱 친절하면 될 노릇이다. 앞으로 같은 체제의 ‘허균/이달 시 선집’이 뒤를 이을 예정이다.

제4권 『허생·거지 광문이』와 제5권 『양반전·범이 꾸짖다·요술 구경』은 모두 박지원의 대표 작품을 모은 것으로, 『삼국지』를 완역할 정도로 고전에 밝은 박상률이 다듬어 쓴 것이다. 교과서에 언급된 덕분에, ‘어린이용 박지원’은 일찍이 많았다. 그리고 앞서 말한 “어른 입맛에 따라 가위질을 당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어린이용 박지원’이었다. 박상률 또한 가위질 당한 박지원에 질색이었다. 이에 그 질색을 미루어, 원작 체제를 전혀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한국어 문장을 이룬 것이다.
 
제6권 『최척』은 우리 문학의 무대를 일본, 만주, 중국 본토, 베트남에까지 넓힌 통 큰 작품이다. 여성 인물의 다채로움은 다른 어떤 문헌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다. 옥영은 남성에게 사귀자는 편지를 먼저 보낸 인물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일본인의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항해술을 익혀 나고야, 오키나와, 베트남을 항해한다. 섬세한 감정과 과단성 있는 행동이 함께하는 여성인데 이 점을 여성 시인 김소연이 한국어로 훌륭히 다시 그려냈다.

제8권 『부처님과 내기한 선비』는 김시습의 『금오신화』 가운데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을 새로이 다듬어 모은 것이다. 김시습 작품도 박지원 작품만큼이나 그동안 원작 훼손이 심했는데 고전 문학을 공부한 김이은은 박상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체제와 세부 모두를 온전히 되살려 호평을 받았다.

제7권 『북정록』, 제9권 『홍경래』, 제10권 『표해록』, 제12권 『남한산성의 눈물』 들은 모두 역사 기록을 다듬은 것이다. 『북정록』은 제2차 나선정벌 당시의 조선군 사령관 신류의 병영 일기가 원작인데 이라크 파병과 맞물려 자주국방과 평화의 의미를 되묻는 작품으로 새로이 자리매김되기도 했다. 『홍경래』는 전설이나 민담의 성근 줄거리와 대비되는 역사 기록의 의의를, 『표해록』은 조선 선비의 위엄과 용기를 잘 보여주었다. 『남한산성의 눈물』의 원작은 병자호란 당시 기록인 『병자록』인데, 조선의 수치스런 역사가 적나라하게 남은 기록이다. 그러나 역사의 부끄러움을 어떻게 역사의 교훈으로 승화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에 독자로부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읽어야 할 책”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남은 이야기


이제까지 샘깊은오늘고전의 착상에서부터 최근 목록까지를 대강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제 마무리를 위해 제11권 『날개도 없이 어디로 날아갔나』를 펼친다. 여기에는 정약용과 김려의 작품이 실려 있다. 각각 여성과 평등을 주제로 한 이야기인데, 이 중 정약용의 작품에는 한 여성의 인생을 짓밟는 시각장애인이 등장한다. 이 장애인은 거짓말과 폭력을 일삼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이 장애인 이야기를 풀며 장애인 비하의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여성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원작자가 장애인을 비하하다니! 김이은은 이 점을 충분히 지적한 뒤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옛글이 모자람 없이 온전한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치가 있고 소중하다고 하는 글에도 모자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 모자람까지 살피며 읽을 때, 독자 여러분은 옛글을 읽는 진정한 보람을 거둘 수 있습니다.”


고전은 절대화되고 신비화되는 순간에 그 빛을 잃을 것이다. 한계나 모자람 또한 음미의 대상이 되는 유산, 독자로 하여금 비판을 거쳐 깨달음의 순간을 맛보게 하는 유산이야말로 고전일 것이다.
 
‘샘깊은오늘고전’은 그저 유명짜한 옛글을 모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김이은의 말처럼 “그 모자람까지 살피며 읽을” 만한 고전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갈무리하되, 어린 독자도 쉬이 읽을 수 있는 유려한 오늘의 한국어로 새로이 다듬고자 한다.
고동균 | 도서출판 알마에서 ‘샘깊은오늘고전’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편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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