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1월 통권 제1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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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가는 여행]
순천만 갈대밭을 걷다
――소설 『무진기행』

박성원 | 2012년 01월

“순천만 가 봤어요?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진짜 멋진 곳이지. TV에서 봤는데 갈대들이 촤~악 어마어마하던데.”

여행지로서 순천만 갈대밭에 대한 나쁜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순천만 여행의 추억을 얘기하거나 ‘언젠가 꼭 한번’이라는 계획을 얘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 여행작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부연 설명, 이를테면 언제 가면 좋은지, 맛집은 어디인지, 주변 관광지는 어떤 곳들이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멘트는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해마다 두세 번은 그곳에 가지만 내 기억은 이십 년 전 처음으로 순천만을 여행했던 거기에 딱 갇혀 더 이상 새로운 가지를 뻗지 못했다. 은빛 갈대밭 사이로 난 둑길을 걸으며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읽었던 부옇고 거북하지만 에로틱한 느낌들을 찾으려 코를 킁킁 거리던 기억. 이유도 없이 피어오르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의 슬픔.

‘무진(霧津)은 어디일까? 여기 갈대밭일까? 저 너머 바다, 아니면 소도시 순천일까?’

소설과 갈대밭 사이에 줄긋기를 하던 그때보다 나아진 것이 있다면 물어 물어 비포장길을 걸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제 순천만 갈대밭은 국제적인 규모의 자연생태공원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지만 내게는 여전히 안개와도 같이 몽환적이면서 눈으로 보는 듯 명징한 은유들을 탄생시킨 소설의 고향이다.

『무진기행』 다시 걷기

길게 뻗은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 바다인 순천만에서 순천시 해룡면과 별량면 사이에 펼쳐진 삼십만 평의 갈대 군락지. 한해 3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이른 아침이 아니라면 호젓한 산책은 포기해야 한다. 연중 수학여행 팀과 단체 여행객들로 붐비는 전국 최고의 생태관광지니 말이다. 갈대가 초록색 새순을 올리는 5월부터 하얀 꽃을 피우는 11월까지가 절정이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 순천만에 살고 있는 생물들의 이모저모를 알려주는 자연생태관을 둘러 본 후 대대포구 쪽으로 간다. 고기잡이 통통배가 드나들고 갈대밭으로 들어가는 줄배가 이어져 있던 대대포구는 이제 유람선 선착장이 되었다.

무진(霧津). 통통배가 아니라 안개가 드나드는 나루. 아마도 무진을 뒤덮는 안개는 바다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올라와 여기 어디쯤에서 도시로 퍼져 나갔으리라.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기행』 중)

주인공 ‘나’는 서울에서 실패를 겪을 때마다 무진으로 도망쳐 왔다. 징집을 피해, 폐병에 걸려, 애인과 헤어지고…… 그럴 때마다 주인공은 무진으로 숨어들었다. 무진의 안개는 그의 부끄러움이, 치부가, 괴로움이 숨겨진 공간이었고,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안개 대신 환멸로 가득 찬 현실을 살았다.

동거하던 애인이 떠나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해 그녀의 아버지가 소유한 제약 회사에 들어간 주인공은 그를 전무이사 자리에 앉히려는 주주총회가 열리는 동안 고향인 소도시 무진에 내려가 있기로 한다. 자기모멸감에 괴로웠던 과거의 기억이 남아있는 고향, 그러나 현실로부터 도망쳐 안개 속에 숨듯 그는 무진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우연히 중학교 음악 선생을 만나고 그녀가 답답한 무진을 떠나 서울로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함께 잠자리를 가진 후 주인공은 급히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말하는 여자를 남겨 둔 채 무진을 떠난다.

『무진기행』의 줄거리다. 이야기는 짧지만 소설의 문장은 마치 시를 음미하듯 되새김질 하며 읽게 되는 긴 호흡을 지녔다.

갈대밭 사이로

무진교를 건너 걸음을 아껴가며 천천히 천천히 갈대밭 속으로 들어간다. 순천만 갈대밭이 생태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원래는 없었던 나무마루가 생겼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갈대밭의 속살을 걸어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산이나 들에서 자라는 억새와 달리 갈대는 습지에서만 자란다. 갈대밭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가는 뻘밭에 발이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짱뚱어를 잡는 널배를 타거나 통통배 탐사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야 갈대밭 사이의 풍광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예전의 여행자에게 30만 평이 넘는 순천만의 갈대밭은 안개에 가려진 무진처럼 여겨졌던 셈이다.

지금은 드넓은 갈대밭을 가로지르는 1km의 산책로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한다. 걷는 길 중간 중간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포토존과 물 빠진 갯벌 위에 올려 둔 나룻배, 그림 같은 풍취를 느끼게 하는 벤치, 초가지붕을 얹은 정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갈대밭 위로 지나는 바람이 초록의 노래 소리를 만들 때마다 여행자들은 터져 나오는 탄성을 숨기지 않는다. 갈대밭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방게들을 찾아내며 어린 아이처럼 깔깔대기도 한다. 사람들은 일상을 벗어난 여행지에서 또 다른 자기를 발견한다. 바깥세상과는 분리된 갈대 숲 길 어디쯤에서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누군가를, 어딘가를 떠올리기도 한다. 현실을 살아내느라 헉헉대던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시간이다. 나무마루는 이리 꺾이고 저리 이어지며 갈대밭 산책로를 길고 길게 연장 시킨다. 에둘러 가는 길이 이리 고마울 수가.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느리게 걸어야 하는 길이다.

무진을 내려다보며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순천만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용산전망대에 이른다. 순천 시내와 갈대밭, 바다로 나가는 물길이 그려내는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지고 산책로에서는 갈대밭에 가려 보이지 않던 순천만 앞바다의 풍광까지 더해지니 먼 길을 걸어 온 수고가 아깝지 않다. 일몰 시간과 물때가 맞으면 S자로 휘어지는 붉은 물길 위에 붉은 해가 담겨 낙조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산은 낮아도 탁 트인 전망대로는 바람이 차다. 어깨를 움츠리고 먼 산자락을 바라본다. 저 아래 갈대밭과 산자락이 만나는 어디쯤, 한 남자가 보인다. 모든 것이 흐릿한 세계, 쓸쓸한 기억들의 세계를 걷고 있는 남자. 세속의 욕망으로 뒤엉킨 관계들과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헤쳐 버릴 수 없는’ 안개와도 같은 현실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남자. 그러나 곧 남자는 사라지고 갈대밭과 함께 걸었던 『무진기행』도 머릿속에서 떠난다.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음을 짓누르던 크고 작은 생각들은 티끌처럼 작고 부질없게 여겨지는 것일까? 드넓은 갈대밭을 내려다보며 낮고 길게 호흡을 하면 나를 분노하게 하는 것들, 부끄러운 허위와 욕망들, 풀릴 길 없는 숙제들이 모두 저 만치 발아래에 있는 듯 몸마저 가볍다. 삼라만물의 이치를 담은 칩 하나가 한 순간 뇌 속에 꽂혔다 빠진 듯 순간 아찔하다. 그 순간의 힘은 짧지만 강력해서 또다시 가뿐하게 일상을 살아갈 힘이 되는 것이다.

김승옥문학관에서

일본에서 태어난 작가는 순천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주인공 ‘나’처럼 갈대 무성한 방죽길을 걸으며 성장했다.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등의 영화 시나리오를 각색하고 시사만화를 그릴 정도로 그림에도 재능을 보였던 천재 소설가. 1980년 광주항쟁 소식을 듣고 연재하던 장편을 15회에서 중단한 채 오랜 시간 절필했던 작가. 안타깝게도 그는 현재 투병 중이다.

“이 작품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슬픈 시절에 쓴 작품이다. 이 방죽길은 『무진기행』의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배경이었다. 40여 년 전에 쓴 이 짧은 소설이 아직도 이야깃거리가 된다면 그것은 그 문장에 스며든 내 슬픔의 힘 때문일 것이다.” (작가 김승옥)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안개와도 같은 시대, 속물로 살아가지 않고는 현실을 버텨내기 힘겨웠던 시대. 환멸이 자기부정이 아닌 슬픔으로 가라앉아 버린 작가는 소설을 썼다.

작가가 걸었던 방죽길은 이제 콘크리트로 포장되었지만 그 길 중간쯤에 김승옥문학관이 있다. 생태공원 입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찾는 이가 많지 않고 갈대밭과 어울리게 짓느라 그랬는지 초가지붕을 얹고 있어 생뚱맞기까지 하다. 삐딱하게 서서 문학관을 바라보자니 『무진기행』의 마지막이 떠오른다. 서울로 데려 가 달라고 했던 여자에게 주인공은 메모 한 장 남기지 못한다. 사랑한다고, 서울에 가면 전보를 부치겠노라고,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썼던 그의 마음은 무진에 남겨두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기행』 중)

‘부끄럽지만 살아낼 것이다.’ 마지막 한 문장을 얹어보며 순천만 갈대밭을 떠난다. 어쩔 것인가 살아야지, 아주 자알.



찾아가는 길
1) 승용차 
:  순천 완주간 고속도로 동순천 I.C-2번 국도 보성, 벌교 방향-순천만갈대밭 이정표 보고 좌회전

2) 대중교통
* 순천역 앞 14번, 67번 버스 이용 순천만 버스정류장 하차
* 순천 씨티투어버스(적극 추천)
* 매일 오전 9시50분 순천역 앞 관광 안내소 출발
* 1코스 드라마촬영장-선암사-낙안읍성-순천만
* 2코스 드라마촬영장-송광사-낙안읍성-순천만

전화문의 061)749-3107, 3328
박성원 | 여행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여행작가입니다. 『걷고 싶은 거리 여행-부산편』, 『생각이 깊은 아이로 키우는 걷기여행』, 『맨발의 꿈, 맨발의 여행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1001곳』 등의 책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