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8월 통권 제1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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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책·그림책 이야기]
가장 소중한 너에게

조남주 | 2012년 08월


지난달에 대대적으로 집수리를 하느라 2주 가량 완전히 집을 비워야 했다. 친구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신세를 좀 지자 했더니, 반색하며 고등학교 2학년 아들내미를 부탁해 왔다. 오래 전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면서 그러지 않아도 아들 녀석을 어떻게 할까 궁리 중이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처음 사나흘을 친구의 아들 녀석과 단둘이 지내게 되었다. 아무리 갓난아기 때부터 보아 온 아이라지만 제 엄마가 빠진 채로 우리 둘만 지내는 게 서먹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스럽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이삿짐 회사를 불러서 짐을 다 싸서 보내자마자 집수리 일꾼들이 들이닥쳤다. 공사 내역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나니 어느 새 저녁때가 가까웠다. 친구 아들은 시험 마지막 날이라 아마도 집에 일찍 들어올 거라는 사전 정보(?)를 그 엄마로부터 받았던 터라 서둘러 친구네 집으로 갔다. 하지만 그 아이는 역시 시험이 끝난 날답게 친구들과 어울려 저녁도 먹고 농구도 하고(물론 이건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응, 이제 오니? 이모가 한동안 신세 좀 져야겠네.” 하는 인사가 오가고, 저는 저, 나는 나대로 각자 분주하게 첫 날 저녁을 지냈다. 한밤중에 나가 보니 아이는 거실에서 그야말로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밤늦은 시각, 컴퓨터 모니터에서 번져 나오는 빛을 얼굴에 받으며 앉아 있는 고등학생의 뒷모습이라니……. 투명하게 보이나 쉽게 뚫을 수는 없는 견고한 유리 벽 앞에서 서 있는 듯한,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답답함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험이 끝나면 하루 정도는 풀어 준다는 아이 엄마의 지침에 따라 그저 ‘일찍 들어가 자.’라는 말을 최대한 부드럽게 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날이 되자 아이도 나도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첫날만큼 어색하거나 서먹하지는 않았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공부에서 놓여난 아이는, 아마도 평소 제 엄마가 있을 때의 생활 모습이지 싶은데, 부엌을 들락거리며 냉장고 문도 열어 보고 물도 마시고 식탁 쪽도 괜히 뒤적이며 사이사이 숙제가 많다는 둥 선생님이 어떻다는 둥 하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러더니 제가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고, 최근에(고등학생이므로 지난 방학 때를 가리키는 건데) 읽은 소설은 뭐고, 반 친구들은 소설을 별로 안 읽는다 어쩐다 하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 최근에 읽은 소설, 그리고 나랑은 잘 안 맞아서 읽기 힘들었던 작가가 누구라는 등의 이야기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아이는 신이 나는지 급기야 제 친구 중 한 아이가 소설을 써서 어딘가 응모했다면서 그 아이가 썼다는 다소 괴기스런 소설의 줄거리까지 시시콜콜, 열정적으로 들려주었다. 중간 중간 이야기가 옆길로 새서 우리 집 공사는 어찌 되어 가는지를 물어 오기도 하고 학교 선생님 얘기를 보태기도 하며 통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날 밤에 게임이 푹 빠져 있었던 그 아이가 맞나 싶었다.

내가 고등학생인 친구 아들과 밤늦도록 수다를 떨었다는 얘기를 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특히 아이가 있는 이들은 더욱,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고등학생, 남자애, 엄마 친구라는 조합이었으니까……. 내 자식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정말 특별한 아이 같아요.” 하는 말을 들을 때면 나까지 괜히 으쓱한 기분이 되곤 했다. 그 엄마한테서는 공부 안 한다는 얘기만 여러 번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날 이후로 난 친구 아들 얘기만 나오면 ‘아, 그 다정한 아이!’ 하고 미소 짓게 된다. 엄마 친구가 집수리를 한다는 게 고2 남학생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데 나한테 집수리를 왜 하는지, 공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물어 볼 정도라니, 이렇게 어른의 삶에까지 눈길을 줄 만큼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걸 보면서 내 친구가 정말 아이를 잘 키웠구나 싶었다.

이 다정한 아이가 아니었다면 『가장 소중한 너』라는 작은 책은 그저 심상히 보아 넘겼을 것이다. ‘인생에 첫 발을 내딛는 모든 아들과 딸들에게…’라는 부제 그대로, 이제 곧 세상에 나가게 된 아들 물고기에게 들려주는 엄마 아빠의 당부를 담고 있는 책이다. 세상에 나가거든 늘 새로운 친구를 사귀라거나, 어디서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기억을 간직하라든가, 말할 때와 들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등 얼핏 보면 아주 평범하고 뻔한,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지만, 이야기들을 별다른 장치 없이 한 가지씩 한 가지씩 풀어 놓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곱씹어 보면 늘 듣는 잠언을 닮아 평범해 보일 뿐 우리가 아이들에게 정말로 ‘평범’하게 주는 가르침은 아닌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야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보다 공부, 성적, 대학…… 뭐 이런 단어를 쓰는 빈도가 훨씬 높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이 정도 얘기야 다 아는 거지.” 하고 절대로 그냥 밀쳐 둘 수 없는 책이다.

이 그림책을 지은 린다 크란츠는 작은 돌에다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 온 작가이다. 『가장 소중한 너』 역시 작은 돌멩이에 이런저런 문양을 넣고 채색하여 개성 있는 물고기들로 재탄생시키고 있다. 작가는 돌멩이 물고기들을 다양한 배경에 자유롭게 배치해서 새로운 바다 속 세상을 창조하고, 물고기 세계의 장면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지혜를 군더더기 없이 소개한다. 작은 돌멩이들을 놓는 방식에 따라 물고기들은 빠르게 혹은 느리게 헤엄치기도 하고 와글와글 떠들거나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멩이 물고기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형태와 리듬이 재미있다. 처음에는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듯 비슷비슷한 돌멩이 물고기들 속에서 주인공을 찾는 일에 집중하기도 했지만, 이내 돌멩이 그림의 매력은 모든 개체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데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돌멩이 하나 하나는 크기, 문양, 색깔 등에서 다른 돌멩이와 구별되며 그 어느 것도 무시되지 않고 똑같이 중요하다. 한 마디로 돌멩이 물고기 세계는 평등하다!

지금 우리는 ‘가장 소중한 너’에게 어떤 삶의 지혜를 전하고자 애쓰는가. 혹시 아이를 성공시키겠다는 생각에 짓눌려서 인생을 꼭 단거리 달리기처럼 살라고 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친구네 그 다정한 아들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열심히 달리는 중인 걸까. 내 친구도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 공부 때문에, 또 컴퓨터 게임 때문에 걱정하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다반사라 했는데, 실제로 같이 살아 보니 내가 밖에서 보던 그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들의 다정함은 엄마의 오지랖(사람에 대한 무한 관심이라는 의미에서)을 닮은 것이었다. 더부살이 신세라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마다 이 방 저 방 뒤지곤 했는데, 어디를 가든 공통적으로 보이는 책들이 있었다. 거실 책상, 안방 화장대, 아이 침대 할 것 없이 곳곳마다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책들은 모두 건축에 대한 것이었다.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유명한 건축물에 대한 것도 있고, 어느 건축가의 자서전 같은 책, 또 건축 과정을 소개하는 사진집 등 종류도 다양했다.

알고 보니 아들의 장래 직업 중 하나로 건축가를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아들이 처음 이야기를 꺼냈는지 그 엄마가 먼저 제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다 건축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내 친구의 태도는 놀라웠다. 마치 자신이 건축가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책을 찾아 읽고 인터넷 검색을 즐겼다. 단순히 대학 건축과에 입학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아니라, 건축가의 ‘삶’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러고는 아들과 함께할 시간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책에서 읽은 건축가의 일이나 보람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스펙이 아니라 사람의 삶에 대한 관심을 키워 가는 것이었다.
나도 집수리를 하기 위해, 물론 본격 건축 서적은 아니지만,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빌려 보았다.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겠지만 건축에 대한 책이 그렇게 다양한 줄 처음 알았다. 아니, 건축이 아닌 다른 주제의 서가를 둘러보았어도 마찬가지 놀라움을 느꼈을 테니까, 그 때의 흥분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새로운 세상의 발견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걸 반대로 생각하면, 부모의 제한된 경험이나 부족한 상상력이 우리 아이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는 비극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른들이 전해 주어야 할 이야기는, “이 길로 가,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 거야.” 하는 식의 김빠지는 정보가 아니다. 『가장 소중한 너』에서는 그저 “가슴속에 소망을 품어 보길 바란다.” 하고 빌어 줄 따름이다.

엄마 아빠 물고기는 큰 바다로 나가려는 자식에게 ‘너는 소중한 존재야.’ 하고 일깨워 준다. 그건 우리는 너를 사랑한단다, 혹은 네 인생을 마음껏 펼쳐 보렴, 또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야…… 하는 격려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는 이걸로 족하지 않나. 그리고 이미 세상살이에 지치고 다친 어른이라면 이 책이 ‘하나뿐인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
조남주 |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어린이 책 만드는 일을 하다가, 미국 럿거스 대학 대학원에서 어린이 서비스를 전공했습니다. 지금은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고, 그림책 중에서도 특히 지식 책에 관심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