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8월 통권 제1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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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밖 그림 이야기]
사기 치는 예술, 깨부수는 관객

김순희 | 2012년 08월

가벼운 예술

세계적인 전위 예술가 백남준은 생전에 “예술은 사기다”라고 했어. 어떤 사람은 그 말에 깊은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떤 이들은 예술을 가벼이 여기는 듯한 그의 태도에 고개를 갸우뚱했지. 냉소적인 사람은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술렁이는 사람들을 말없이 쳐다볼 뿐이었고 말야.

멀쩡한 피아노를 도끼로 깨부수거나 벌거벗은 첼리스트가 연주하는1)장면을 예술이라고 연출하는 백남준의 생각을 우리가 쉽사리 이해하기는 어려워. 하지만 그의 말처럼 예술이 고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란 사실은 이따금씩 접하는 현대미술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어. 백남준의 말처럼 예술이 곧 사기는 아닐 거야. 하지만 심한 장난처럼 느껴지는 예술 앞에서 너무 진지하거나 심각해질 필요도 없지. 왜냐하면 예술은 알고 보면 세상으로부터 나온 세상의 일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야.

지루한 하품을 하는 하마의 입처럼 길고 습한 여름이 우리 앞에 길게 펼쳐져 있어. 예술이 사기일 리는 없지만 말이 난 김에 지루함을 날려 줄 재미난 장난 같은 그림들을 찾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오뉴월의 습하고 더운 기운으로부터 조금 비껴서 잠깐의 여유를 부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똑같이 그리는 그림

아드리안 반 데르 스펠트,
「꽃다발과 커튼이 있는 정물화」, 1658년
파라시우스의 커튼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오래 전 옛날, 카메라가 없고 사진 대신 진짜처럼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가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그리는 사람만이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고 말야.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는 바로 그런 실력을 지닌 그리스의 대표 화가였어. 꽃이면 꽃, 나무면 나무, 그들이 그린 그림은 그림이 아닌 실제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지. 둘 사이에 있었던 ‘누가 누가 똑같이 그리나’ 에피소드는 그 시대 화가들의 빼어난 실력을 유감없이 알려주곤 하지.

어느 날, 제욱시스는 자신이 그린 포도그림에 날아가던 새가 부리를 들이밀다 떨어졌다는 자랑을 친구들 앞에서 늘어놓았어. 가만히 듣고만 있던 파라시우스는 친구들을 자신의 화실로 말없이 이끌었어. 화실로 들어서며 의기양양한 제욱시스가 하는 말, “친구여, 어서 커튼을 걷고 그림을 보여주게.” 그러나 아뿔싸, 제욱시스가 걷으라던 그 커튼은 파라시우스가 그려 넣은 커튼 그림일 뿐이었지. 제욱시스가 그 다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기고만장하던 그의 콧대가 꺾인 동시에 파라시우스에게 보기 좋게 판정패를 당했음은 물론이겠지.

훗날 네덜란드의 스펠트라는 화가는 파라시우스만큼이나 진짜처럼 보이는 커튼을 그려냈어. 사람들은 이 그림에 ‘파라시우스의 커튼’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어. 이 별명 안에는 그림이란 모름지기 닮게 그리는 것이라는 의식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지.

예술, 이상하고 재미난 장난이 되다


마르셀 뒤샹, 「샘」, 1917년
사진이 발명되고 나서 화가들은 똑같이 그리는 그림에 당연히 흥미를 잃었고 이제 그림은 재밌고 특이한 매력을 지녀야만 했어. 찰칵하고 손가락만 움직이면 될 것을 공을 들여 그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 대신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특별한 무언가를 화가들은 만들어 내야만 했어. 새로운 것이 필요했던 거지. 변화의 시대가 온 거야.

그 변화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있었던 인물은 개념미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마르셀 뒤샹이라는 예술가였어. 그의 작품은 놀라움을 넘어서 경악에 가까웠지. 화장실의 변기를 떼다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는2)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주었어. 사람들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며 작품인지 한낱 변기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 물건을 전시장에서 들어내기 위해 한바탕 소동을 벌였지. 어쨌거나 시간이 흐른 뒤 리처드 뮤트라는 서명을3) 버젓이 단 뒤샹의 변기는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작품이 되었고 예술은 현실의 물건과 사람을 똑같이 그려내는 것에서 확실하게 벗어나 백남준의 말처럼 이상한 사기 비슷한 장난으로 흘러가는 경향을 보이는 듯했지.

새로워진다는 것

뒤샹 이후 새로운 그림을 위해 어떤 화가들은 무척 고심했어. 변해가는 세상에 한 발 앞서서 시각을 넓히고 비전을 만들어 내는 일이 결코 쉬울 리가 없었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 유럽에 중심을 두던 예술은 전쟁의 열기를 피해 아메리카로 흘러가며 좀 색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어. 어떤 화가들은 자기만의 아주 독특하지만 이상한 그림을 만들어 내기도 했어. 마치 그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린 그림들이 등장하기도 했어. 하지만 그들도 엄연히 예술가였고 사람들은 “뭐, 괜찮네, 재미도 좀 있는 것 같고”라고 평을 했어. 예술이 사기라던 백남준의 말이 이런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림은 이제 심각하고 진지하지만은 않게 되었어.

현대미술의 흐름 중에서 예술과 일상을 가장 가깝게 연결한 최초의 미술은 아마도 50년대 영국에서 시작해 60년대 아메리카에서 절정을 본 팝아트일 거야. 광고인지 작품인지 헷갈리고 이게 그림인지 인쇄물인지 헷갈리는 작품들은 사람들의 입맛에 잘 맞았는지 인기 절정의 전성기를 맞았지. 그 중에서 리히텐슈타인의 만화그림들은 뒤샹의 변기만큼이나 예술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만드는 이상하고도 재미난 작품이었어.

리히텐슈타인, 「차 안에서」, 1963년
누가 봐도 인쇄된 만화의 한 페이지일 뿐인 이 그림은 놀랍게도 일일이 손으로 그린 거야. 인쇄물에서 보이는 아주 작은 망점들은4) 구멍 수천 개를 뚫은 알루미늄 판을 놓고 칫솔에 물감을 묻혀 찍어냈지. 철저하게 핸드메이드로 제작을 한 셈이지. 그가 그냥 인쇄하고 말면 편할 것을 이렇게 직접 작업을 한 것은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을 절대로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그렇다면 리히텐슈타인이 왜 이런 그림을 그렸던 거냐고. 그야 세상은 변했고 예술도 따라 변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런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눈도 달라졌기 때문이야.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을 가볍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도 그림 같지 않다고 무시하지는 못해.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그의 만화그림을 아주 ‘비싼’ 예술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야. 이쯤 되면 예술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기계가 그리는 그림

기타오카 아키요시, 「잎의 물결」

그런데 리히텐슈타인에서 한술 더 뜬 화가가 있었어. 일본 출신의 기타오카 아키요시는 화가인 동시에 심리학을 전공한 과학자였어. 뇌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했던 그는 컴퓨터로 디지털 아트를 만드는 화가가 되기로 했어. 아키요시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두뇌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실험하면서 컴퓨터로 그림을 그렸어. 그렸다기보다는 출력을 했다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도 세상에 있는 어떤 개성파 화가 못지않게 매우 이상하고 특별한 생각을 한 것만은 틀림없어.

작품에 걸맞게 아키요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보이는 것은 사람을 속이기 쉽다”였어. 그러니까 ‘네가 보는 게 보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지.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착시(illusion)라고 불렀어. 눈의 착각이라는 뜻이야. 그의 말처럼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착각이 들어. 아무래도 눈이 빙빙 돌 것만 같지. 실제 움직이는 것은 내 머릿속의 생각, 즉 착각일 뿐이지. 아키요시는 과학자가 아닌 화가로 불리기를 원했지만 그의 작품이 그림인지 기계가 만들어 놓은 디자인일 뿐인지는 아직도 헷갈리는 듯해. 작정하고 우리의 두뇌를 속이는 이 그림도 예술이라면 예술이 재밌고 가벼운 장난기에 가까워진 것만은 틀림없어. 그 장난의 목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지만 말이야.

그래서일까. 제욱시스나 프라시우스의 일화는 어떤 것을 닮게 그리려는 화가들의 노력이 구시대의 유산처럼 느껴지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기도 해. 한편으로는 손으로 물감을 짜고 붓에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식의 전통적인 예술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기는 하는 것 같아. 아무래도 우리는 새롭게 모습을 바꿔 나가는 예술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우리가 백남준이 말한 그 사기극에 말려 든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것 같지 않아?

고정관념을 찢어 버리기

루치오 폰타나를 만나면 예술과 일상, 진지한 예술과 가벼운 예술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들의 생각은 여지없이 찢겨나가고 말아. 변기를 전시장으로 들여온 뒤샹 이후로 예술에서는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극한점에 있는 사람이 바로 이태리의 전위예술가 폰타나가 아닌가 싶어.

루치오 폰타나, 「콘체토 스파지알레」, 1964년
그는 그리지 않고 찢어버렸어. 우리의 고정관념을 찢듯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캔버스 화면에 예리한 칼날을 들이댔어. 장난치고는 좀 무서운 느낌이 있지만 예술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우리의 의식에 날카로운 칼을 겨냥한 듯 그의 작품이 주는 충격은 대단해. 그림을 그려야 할 캔버스를 찢어버렸으니 도대체 예술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런데 말이야, 캔버스를 화가 스스로 찢어버리는 이 황당한 퍼포먼스 앞에서 우리의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확실해졌어. 네가 아는 그 예술은 이제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고 외치는 듯한 폰타나의 이 사기극은 예술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멈추지 말 것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예술이 아닐까.

사실 폰타나의 찢긴 캔버스가 아니라도 예술에 대한 충격은 날로 커져가는 것 같아. 영국 출신의 최고 인기 예술가인 데미안 허스트처럼 죽은 상어를 박제해 전시장으로 끌고 오거나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를 해골바가지에 박아놓는, 그 노련한 ‘연극’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사실상 우리에겐 불가능해 보여. 하지만 뭐가 뭐인지 모르게 돌아가는 이 예술판에서 진의가 은폐된 사기극이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그래서 우리에게 알려줬던 것일까. 예술은 사기라고. 수많은 관람객 앞에서 도끼를 들어 피아노를 깨부수었던 것도 예술이 사기임을 이미 알았기 때문일까. 이 사기극은 끝이 없는 진행형이란 것을, 그래서 스스로 깨부수지 않으면 늘 그 사기극의 관객이 될 뿐이라는 것을 그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제 우리는 어떤 사기극을 또 만나게 될까. 궁금함 때문에 가슴이 설레지 않아?

1)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은 백남준의 퍼포먼스의 조력자였어. 그는 예술가적 감성을 표현하느라 희한한 요구를 서슴지 않는 백남준의 퍼포먼스에 훌륭하게 맞추어 주었지.
2) 뒤샹이 실제로 화장실의 변기를 떼다 전시장으로 가져갔던 것은 아니고 공장에서 변기를 주문해서 썼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신의 손으로 빚은 작품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물건을 예술작품으로 변화시킨 것이야. 이로써 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는 아이디어 자체가 예술작품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셈이었지. 생각만으로 작품이 형성되는 개념미술이 여기서 탄생했고 말이야.
3) 뒤샹은 자신의 이름을 넣지 않고 리처드 뮤트라는 가상의 인물의 이름을 서명으로 변기의 한쪽에 남겼지. 이 서명은 화가들이 작품의 한 귀퉁이에 이름을 적어 넣는 관습을 따라한 것이지.
4) 신문이나 잡지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아주 미세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리히텐슈타인은 멀리서 보면 감쪽같이 나타나지 않는 망점의 존재를 직접 손으로 그려 넣은 거야.
5) 이 착시그림을 계속 보고 있으면 제목처럼 나뭇잎들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을 볼 수 있어. 실제로 움직이지 않지만 우리의 눈은 착각을 일으키면서 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닌 상황을 경험하게 해주지.
김순희 | 미술의 역사를 공부했고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도 일했으며, 몇 권의 어린이 예술책을 썼고 미술 서적 번역하는 일을 합니다. 가끔 강연 요청도 받습니다. 모든 사람이 즐겁고 가볍게 미술과 사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일에 매달려 보고 싶어합니다. 참, 민수와 현우, 두 개구쟁이 엄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