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8월 통권 제1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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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책 이야기]
8월 ― 문학으로 | 모든 상처는 꽃을 닮았다 (2)

박경장 | 2012년 08월

환우(患友)

돼지 한 마리를 받고 레이몽을 상급 학년으로 진급시키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푸르쓰떼이 선생은 학년 말에 또 다시 학부모 면담을 요청해 이렇게 말해요.

“레이몽은 환자입니다. (……)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울 정도로 심각한 병입니다. 소리 내서 울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을 정도로 심각 (……) 머리를 책상에다 대고 쾅쾅 박질 않나, 분필을 먹질 않나, 그걸 또 교실 바닥에다 토해 내질 않나.” (『난 죽지 않을 테야』 29쪽)

한마디로 레이몽은 정상이 아니니 푸르쓰떼이 선생은 레이몽을 요양센터에 보낼 것을 부모에게 권해요. 그렇다면 레이몽은 정말 정신병자인 걸까요. 물론 레이몽이 하는 이상한 행동으로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미 죽어버린 빵집 아저씨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그 아이의 속내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아요. 레이몽은 아무리 노력해도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레이몽에게 학교는 오로지 놀림 받고 벌 받는, 그를 미치게 만드는 지옥일 뿐입니다. 그래서 레이몽은 분필을 먹고 머리를 책상에 쾅쾅 찧었어요. 적어도 그 순간만은 자신이 학교에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거든요. “더 이상 아무 것도 견딜 수 없었고,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아무 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는 이 아이의 처절한 속울음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어요. 속으로 박힌 옹이상처는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죠. 그러니 눈으로는 볼 수 없어요. 오로지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레이몽은 요양센터로 떠나게 됩니다.

요양센터는 마치 포로수용소 같이 바닷가 깊숙한 곳에 자리해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바다와 황량한 벌판뿐입니다. 하지만 요양원 안을 둘러본 후 레이몽은 너무 놀라요. 방은 “마치 우주를 돌아다니는 외계인들의 대합실” 같고 룸메이트인 뤼뤼와 쟈키는 화성에서 온 외계인 같다고 느껴요. 뤼뤼는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데 갈색 머리칼이 마치 220볼트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어요. 삐쩍 마른 쟈키는 틱 증후군으로 끊임없이 입술을 왼쪽, 오른쪽, 위, 아래로 씰룩거려서 얼굴을 일그러뜨리죠. 레이몽의 눈에 쟈키는 ‘알 수 없는 별’ 같고, 뤼뤼는 ‘너무 높이 있어서 지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별’처럼 보입니다.

왜 이곳 아이들은 모두 이상한 외계에서 온 것만 같을까? 이런 레이몽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람은 킹콩 같은 덩치에 곰 같은 인상을 풍기는 이곳 직원 폴입니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외계인이며, 다른 은하계, 아주아주 먼 곳에서 온 우주인들이라고” 그는 말해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머리를 낮추고 아래를 보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레이몽에게 설명해 주지요. 왜냐하면 “모든 것, 모든 삶이 우리들 발 밑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언제나 고개를 낮추고 아래를 살펴봐야” 하는 거래요. 미래의 꿈이라는 목표를 향해 오로지 앞과 높은 곳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 사람들 눈에는, 항상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발밑만 살피는 이 아이들은 정말로 외계인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 아이들에게 삶의 진실은 사람들에게 밟히며 살아가는 발밑 개미세상에 있어요. 그래서 이들은 매일 아침마다 해변을 산책하면서, 물보라 향기를 맡고, 파도에 떠밀려온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장난감을 줍지요. 주워 와서는 장난감에 묻어 있는 역청을 몇 시간 동안이나 문지르고 긁고, 닦아내요. 어쩌면 이 아이들은 사람들에게서 버려진 이 상처 입은 인형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몰라요. 레이몽도 다리 하나가 부러진 여자아이 인형을 주워 부스스한 인형 머리채를 잡고 밀려오는 파도에 목욕을 시키죠. “죠슬린이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레이몽을 학습지진아라고, 정신병자라고 하다니!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정말 어쩔 수 없지요!

이곳 아이들이 레이몽을 친구로 받아들이게 된 이유도 바로 상처 때문이죠. 함께 샤워를 하다 레이몽의 온몸을 덮고 있는 멍 자국과 채찍 자국을 보는 순간 아이들은 레이몽도 “자기들과 같이 쓰레기 더미처럼 더러운 곳, 힘든 곳에서 왔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상처는 이 외계인 요양소 학교의 문장(紋章)인 셈입니다. 아픔으로 아픔을 알아보고 아픔으로 아픔을 치유하는 이들은 레이몽을 바로 환우(患友)로 받아들인 것이죠. 세상 사람들에게 아픔의 기억인 상처는 털어내야 할 무슨 더러운 얼룩 같겠지만 이들에게는 별이에요. 바라보고 품에 안을수록 빛나는 별.

천국별에서 온 천사, 안느
이렇게 이곳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레이몽은 조금씩 변해가요. 자기 삶에서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이란 걸 느끼게 되죠. 이 요양센터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도록 강요하거나 못하면 귀를 잡아당기는 푸르쓰떼이 같은 선생도 없고, 자신을 잠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 아빠와 소 닭 쳐다보듯 하는 엄마가 없거든요. 이곳 아이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모습 외에는 관심이 없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천국별에서 온 천사’ 안느를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어느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 노는데도 쓸쓸해하지 않는 독특한 아이 안느는 이곳에 온 지 2년이나 됐다는데도 그녀가 말을 한 것을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신비에 쌓였지요. 그래도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할 때면 머리를 흔들거나 끄덕여 자기 의사를 나타내고 특별히 어떤 신호를 보낼 때는 입술 끝을 살짝 들어올려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짓지요. 하지만 그녀가 왜 말을 안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어요. 이곳에서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를 억지로 보려는 사람은 없거든요. 이들의 상처는 아직 아문 게 아니어서 싸매어 서로 감춰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덧나기 쉽습니다. 쟈키와 뤼뤼가 서로 사랑하는 호모라는 사실도 아직 이들 사이에서도 감춰져야 하는 상처인 것이죠. 아물어 상처꽃으로 피어날 때까지는.

천사 같은 안느를 보고 첫눈에 반한 레이몽의 모든 감각은 안느에게 맞춰집니다. 안느의 일거수 일투족에 그의 모든 신경이 꽂히죠. 그러다 마침내 레이몽은 용기를 냅니다. 안느가 항상 헝겊 조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보고는 자기 스웨터의 풀어진 올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가위를 빌린다는 구실삼아 그녀 곁으로 갑니다. 레이몽이 다가가자 안느는 고개를 들어 입술 끝만 살짝 올리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그에게 지어 보이죠. 그러고는 가위를 빌려주는 대신 자신이 직접 가위를 들어 레이몽 스웨터의 풀린 올을 싹둑! 잘라줍니다. “난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안느가 바로 내 옆에 있다니, 이렇게 가까이……. 그녀의 향기, 그녀의 로션 냄새, 심지어 내 손을 살짝 만지기까지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레이몽에게 희미한 미소로 어떤 신호를 보낸 안느는 아예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순간 황홀해진 레이몽의 마음속에서는 소망 하나가 번뜩 떠올라요. “그래, 난 이제부터 재봉사가 되는 거야. 내게 재봉일보다 더 흥미로운 건 없어.” 이제는 어떤 사랑의 끈 같은 것이 둘 사이를 묶어놓고 있음을 두 사람 모두 직감해요. 어느 날 아침 해변 산책길에서 모래언덕을 내려갈 때 뒤에 있던 안느가 살며시 레이몽 손을 잡습니다. “아, 안느는 정말 너무했다. 아무래도 날 숨 막혀 죽게 만들 작정인 것 같았다. 아니면 전기에 감전되어 죽게 하든지. 하지만 한편으론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다.” 레이몽은 자신이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행복에 겨워하지요.

난 죽지 않을 테야

하지만 이런 행복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레이몽은 다른 한편으론 두려워집니다. 행복이 달아나 버릴까봐.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 나갈까봐. “무서웠다. 아픈 것이 무섭고, 죽는 것이 무서웠다. 죽고 싶지 않아. 난 죽지 않을 테야. 난 무서웠다. 지금의 이 행복이 곧 달아나 버릴 것만 같았다.” 제 1부 『당나귀 귀』에서는 하느님에게 아빠와 엄마 둘 다 죽지 않는다면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빌었던 레이몽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이젠 너무 행복해서 죽는 것이 두려울 정도지요. 그의 상처는 점점 몽우리 진 꽃을 닮아갑니다. 하지만 상처꽃으로 활짝 피기까지는 아직 견뎌야 할 시련이 많아요.

털보의사에게 정신감정을 받고서 지친 레이몽은 신경안정제 같은 알약을 먹고는 하루 종일 잡니다. 한밤중에 깨어난 그는 뤼뤼와 자키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게 되지요. 그 모습을 보며 아직도 약기운에 취해 있는 레이몽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안느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여자아이들 방에 들어가는 것은 현실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꿈속이니까 아무 문제없을 거라 생각한 거예요, 정말 꿈속인 것처럼 레이몽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잠들어 있는 안느의 천사 같은 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데 성공하죠. 그런데 다음날 아침 교실에 들어가기 전 레이몽은 안느에게서 쪽지 한 장을 건네받아요. “오늘 밤에도 나를 보러 와줘.”

며칠 간 안느에게 다가가지 못한 레이몽은 어느 날 밤 약에 취한 상태가 아닌 맨 정신으로 센터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을 위반하기로 마음먹고 안느를 보러 갑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간은 콩알만 해져 숨이 곧 멎을 것만 같은 긴장 속에서도 레이몽은 잠든 여자아이들을 깨우지 않고 로션향기 풍기는 안느에게로 가는 데 성공해요. 입이 반쯤 벌어진 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안느를 보며 등대 불빛이 꼭 100번 지나갈 때까지만 곁에 있다가 돌아가기로 마음먹지요. 하지만 아침 해변 산책 때 얼떨결에 맞춘 적이 있는 안느의 입술을 보자 레이몽은 입을 맞추고 싶어 참을 수가 없게 돼요. 그래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 입술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죠. 그리곤 반쯤 벌어진 그녀 입속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입속엔 혀가 없었어요. 레이몽은 그녀가 그렇게 감추고 싶었던 상처를 그만 보고만 것입니다.

너무 놀란 레이몽은 그만 침대를 헛짚어 그녀 위로 넘어지고 맙니다. 놀라 깨어난 안느의 혀 잘린 입속에서는 짐승 울음 같은 비명이 새나오지요. 그 소리에 자던 여자아이들이 모두 깨어 비명을 질러대자 침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합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레이몽은 먹은 걸 모두 바닥에 토해내요. 서둘러 도망치려다 자기 토사물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커튼을 잡고 일어나려다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커튼에 휘감겨 허우적거리죠. 결국 이 일로 인해 레이몽은 천사 같은 안느를 요양원에 남겨두고 지옥 같은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동생 죠슬린은 오빠 레이몽에게서 선물로 받은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아요. 해변에서 주웠던 그 인형들을 쭉 세워놓고, 하나씩 차례로 쓰러뜨리는 놀이를 하죠. 하나, 둘씩 쓰러져 죽어가는 병정들을 보며 레이몽은 자기는 죽고 싶지 않다고, 지옥 같은 집에 돌아가도 죽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어요. 제 2부 『난 죽지 않을 테야』는 여기서 끝납니다.

갖고 싶었던 그러나 가질 수 없는 삶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다시 돌아온 집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빵집 아저씨도 외계에서 온 요양원 친구들도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천사 안느가 없는 지옥 같은 집에 돌아온 레이몽의 마음은 텅 비어 버려요. 마음이 이미 죽어 버렸으니 몸 또한 성할 리 없습니다. 레이몽은 심한 고열로 앓아누워요. 얼마나 심하게 앓는지 뇌가 떨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다고 느끼죠. 아니 “뇌가 바다 밑바닥에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사과 파이의 잼처럼, 손아귀에 넣고 힘을 주었을 때 찌익 터져 나오는 바나나의 과육처럼, 그렇게 뇌가 귀로, 눈으로, 코로, 입으로 막 새나가 줄줄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한, 골이 텅 빈 듯한, 뇌가 아예 날 포기하고 증발해 버린 듯한 기분”이라고 느낍니다.

레이몽은 이렇게 몇날 며칠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고열에 시달려요. 병 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점점 악화되죠. 레이몽의 의식도 오락가락합니다. 이런 혼미한 의식 속에서 레이몽은 자신이 갖고 싶었던 삶, 그러나 결코 가질 수 없는 삶을 생각해요.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3부 『이별처럼』의 서술방식은 조금 독특해요. 한 장에서는 과거 자신의 삶에 대해, 특히 요양원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거나 안느에게 취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와 반성을 털어놓고, 다음 장에서는 자신이 갖고 싶었던 행복한 가정에 대한 묘사를 해요. 하지만 이렇게 서로 반복되어 진행되는 이야기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은 없어요. 앞의 1, 2부를 읽지 않은 독자라면 무슨 이야기가 앞뒤도 없이 뒤죽박죽이지 하며 어리둥절해 할 거예요. 레이몽의 말대로 이런 생각들은 자신이 선택해서 떠오르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머릿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한 것들입니다. 불덩이 같은 몸에 하루에도 대여섯 번 주사를 맞은 몽롱한 의식 상태에서 떠오른 영상들이죠.

그날 밤, 그녀의 혀가 잘린 것을 알았을 때, 난 절대로 무서워하지 않았어야 했다. 오히려 그녀에게 열렬한 키스를 해야 했다. 내 혀를 그녀의 입 속에 밀어 넣어야 했다. (같은 책, 29쪽).

“이리 와 보렴, 레이몽. 하늘을 좀 봐. 저기 저거 알아보겠니? (……) 맞아, 큰곰자리야. 네게 다른 것들도 더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내가 아는 거라곤 저거 하나밖에 없구나. (……) 난 별자리 이름들을 알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그것들을 네게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자, 이제 곧 엄마가 올라와서 책을 읽어 줄 시간이다. 내가 여기서 담배 피운 것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않기다, 알았지?” (같은 책, 88~89쪽)


하지만 레이몽이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삶을 아무리 꾸며 봐도 소용이 없었어요. 혼미한 의식 속에서도 그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레이몽의 상상 속에서 바닷가로 가족여행을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엉덩이를 까놓고 일광욕을 즐기는 엄마를 보고는 아빠가 그만 본성을 드러내고 폭발해버린 것이죠. 화가 날 대로 난 아빠는 그렇게도 엉덩이를 보여 주고 싶으면 실컷 보여 주라면서 엄마 수영복을 찢어 버립니다. 벌거벗은 채로 어정어정 자동차 있는 대로 걸어가는 엄마, 그 뒤를 따라 남은 물건들을 챙겨들고 가는 레이몽. 결국 그가 그토록 바라던 삶은 꿈에서조차 비극으로 끝나고 말지요. 그러면서 그의 의식 또한 희미해집니다. 어디선가 빵빵! 경적소리가 들리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죠.

어이! 레이모옹! 레이모옹! 뭘 기다리는 거야. 자, 빨리 와, 빨리 계단을 올라와. …… 어? 빵집 아저씨? 아저씨예요? (……) 쯧쯧, 이 얼간아, 그럼 누군 줄 알았니?. (……) 얼른 올라오지 않고. 레이몽, 뭘 기다리는 거니…… 아, 아저씨.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아무 것도…… 안느에게 작별 인사는 했니? 아! 네, 네. 했어요. 영원한 이별처럼 인사했어요, 영원한 이별처럼!(같은 책, 130쪽)

이것으로 레이몽은 이 땅 사람들과 마지막 이별을 해요. 그리고 3부 『이별처럼』을 포함해 1, 2부 『당나귀 귀』와 『난 죽지 않을 테야』와 영원한 이별을 하지요.

학교와 부모로부터 받은 레이몽의 상처는 결국 어린아이로서 감당하기엔 너무 심한 상처였어요. 견딜 만한 아픔이 아니었던 겁니다. 물론 그를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었던 빵집 아저씨만 죽지 않았더라면, 레이몽은 빵집 조수가 되어 훌륭한 빵집 주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겠지요. 꿈 같은 안느와의 사랑이 깨지지만 않았더라면 레이몽은 그 어떤 아픈 상처라도 극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빵집 아저씨는 죽고 안느와는 헤어졌지요. 어쩌면 그게 세상이고 현실일 겁니다. 결국 레이몽의 상처는 옹이로 박혀 상처꽃으로 피어나기도 전에 그만 강풍에 꺾여 버리고 만 것이죠. 잘 문지르고 닦고 긁어
내면 별처럼 반짝일 수도 있었던 상처투성이 꼬마 영혼은 서둘러 세상과 이별을 한 겁니다.

문학의 힘

그렇다면 모든 상처는 꽃을 닮은 게 아닐까요. 그래요. 너무 아픈 상처는 정말 견뎌내기 힘들죠. 그것도 아직 어린아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니 견딜 만한 아픔이라야 상처도 흉터로 아물어 상처꽃으로 피어날 수 있겠죠. 하지만 아무리 심한 상처라도 문학이라는 몸에 들어와 생긴 거라면 얘기가 달라져요. 문학은 애초부터 잘나고 건강하여 출세한 사람들을 향한 질투나 시기 또는 박수가 아니지요. 문학은 ‘상처 입은 영혼의 속울음’ 같은 겁니다. 꼿꼿하게 고개 쳐들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발밑 속삭임’ 같은 거예요. 문학은 태생적으로 아픔에서 태어나 상처를 입으며 성장하다 아주 빈번히 그 상처로 인해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는 영혼들의 생채기입니다.

그러니 문학의 몸에 생긴 상처에 꽃을 피워내는 건 실은 그 아픔의 속울음에 기울이는 귀예요. 그 상처에 데어 버린 독자의 가슴에서 피어나는 겁니다. 레이몽의 아픔에 가슴을 덴 독자가 채 아물지 못한 레이몽의 상처를 자신의 몸으로 가져와 레이몽을 대신해 상처꽃으로 피워내는 것이죠. 하지만 아물어 상처꽃으로 피어나는 것은 실은 레이몽의 상처가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 자신의 상처지요.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에요. 문학의 몸으로 들어온 모든 상처를 꽃으로 피워내는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힘이지요.
박경장 | 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 20년 동안 대학 강단에 서다가 지금은 청소년문학 평론 작업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영어와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한글의 맛을 알고 한국문학을 다시 읽게 됐습니다. 사람 사는 모습을 알게 해주는 인문학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서로 『사춘기를 위한 아름다운 영미 성장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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