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8월 통권 제1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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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림책]
세상은 밥 안 먹는 색시를 칭송한다

최은희 | 2012년 08월

마디 굵고 억센 손을 부끄럽게 만드는 세상

불행하게도, 나는 손이 크다. 손마디도 굵고 억세다. 게다가 색깔도 흙색이다. 가는 손가락에 희고 고운 손이 여성스런 손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내 손은 부끄럽다. 휘황찬란한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을 가면 내 손이 탁자 아래로 내려가는 빈도가 많아진다. 길고 가는 손에 멋지게 네일아트라도 한 손을 만날 땐 손을 숨기기 급급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저 손으로도 쌀을 씻고 설거지를 할까? 비누거품 묻혀가며 빨래를 하기나 할까? 손톱 밑에 시뻘건 고춧가루 묻혀가며 김치는 담글 수 있을까? 아니 포기김치를 자를 수나 있을까?’ 선녀처럼 희디흰 그 손앞에서 괜스레 주눅이 든다. 손이 빨라 짧은 시간에 후닥닥 몇 가지 음식을 해내고, 호미질도 잘하고, 들이나 산에서 나물 뜯을 때는 바람보다 빠른 부지런한 손. 맛있는 음식을 하면 둘레 사람들에게 듬뿍듬뿍 퍼 담아 줘야 직성이 풀리는 내 큰 손. 그 손을 내가 부끄러워한다. 세상이 내 손을 부끄럽게 만든다.

손은 한 사람의 이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사람이 지나 온 삶의 굽이굽이가 마디로 새겨지고 색깔로 스며들어 있다. 내 손엔 낫질과 호미질, 가시덩쿨 헤치고 다닌 시간이 오롯이 남아 있다. 여렸던 손엔 터진 물집이 굳은살로 박혔고 찬물과 뜨거운 물 가리지 않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한 탓에 뻣뻣하고 억세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때 맞춰 밥 먹기가 어렵고, 산에 가서 나물이라도 뜯어 와야 반찬이 생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가 내 손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손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아니 내 손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몰아가는 세상은 손으로 일한 역사를 부정하라고 속삭인다. 손을 움직여 일하는 것, 게다가 손이 거칠어지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감추고 싶게 만드는 이데올로기. 여성을 상품으로 여기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음모. 팔아야 할 상품이 미끈하지 못하면 일단 상품성이 떨어지니 마디 굵고 투박한 손은 외면 받는다. 그렇게 우리는 타자에 의해 부정 당한 손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도록 끊임없이 세뇌 받고 있다. 오죽하면 팔등신 미녀들조차 광고에서 손 모델을 써서 형상을 조합한 뒤에야 비로소 가공의 자신을 상품으로 내 놓을까.

‘어머, 손이 크고 시커멓다고, 마디 좀 굵으면 어떻다고 이렇게 요란을 떨지? 자격지심이 심하네.’ 부디 마디 굵고 시커먼 큰 손을 가진 여성들이 이렇게 나를 힐난하는 목소리가 많으면 좋겠다. 그저 나와 닮은 손을 만나 마음 속 경계를 무너뜨리고 은근한 눈길로 연대감을 느끼며 스스로 위로 받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밥 안 먹는 색시』의 주인공을 보았을 때 묘한 연대감이 들었다. 그네의 커다란 두 손이, 두툼한 허리가 안도감을 주었다. 그럼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그네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그래서 그네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 세웠다.

여신은 S라인 몸매가 아니다

“그래, 나 뚱뚱하다. 게다가 밥도 잘 먹는다!”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의 한 장면에 기대 소리쳐 본다. 그런데 나도 26인치 바지가 헐렁하던 때가 있었다. 결혼 전,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아이 낳기 전만 해도 군살 없는 몸매였다. 그런 내가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한다는 뚱뚱한 존재가 되었다. S라인과는 거리가 먼, 게으르고 무절제한 사람처럼 여겨지는 몸매를 갖고 있다. 아이를 가지면서 몸무게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고, 붙은 살은 좀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늘어난 살은 아이를 안는 팔뚝에 힘을 보탰고, 비실거림없이 환절기를 견디게 하였다. 굵은 허리, 잡히는 뱃살, 수북한 공깃밥에 대한 고민은 새 생명을 돌보는 일보다 앞서지 않았다. 나는 힘이 필요한 에미였기 때문이다. 에미는 생산하는 자다. 생산하는 자에게는 힘이 필요하다. 물론 살이 쪘다고 해서 반드시 힘이 세지는 않다. 다만 경험에 비추어 보면 말랐을 때보다 살이 붙었을 때 힘이 더 생긴 건 사실이다.

『밥 안 먹는 색시』의 주인공은 둘이다. 하나는 밥을 잘 먹는 색시, 다른 한 명은 개미 구멍만한 입으로 밥을 쫄쫄 빨아 먹는 색시. 그 가운데 밥 잘 먹는 색시는 여신에 가깝다. 왕성한 식욕과 거침없는 말투, 몸집의 몇 배가 되는 밥을 이고도 날듯이 움직이는 가공할만한 힘. 왜곡되거나 굴절되지 않은 여신의 이미지다. 여신은 여성과 남성을 뛰어 넘는 양가적 존재다. 아울러 예측불허의 존재이며 생산과 파괴의 힘을 갖고 있고, 충동적인 면과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통합적인 존재가 바로 색시와 같은 여신이다. 하와이 화산의 여신 ‘펠레’, 수메르의 ‘인안나’ 힌두 여신 ‘칼리’, 러시아의 ‘바바야가’나 우리의 ‘마고신’을 보라. 그네들은 절대 낭창낭창한 허리를 가진 S라인의 몸매를 갖고 있지 않다. 굴곡 없는 허리와 근육이 잘 붙은 건장한 몸매다. 그런 그네들의 품엔 따뜻함과 냉정함이 공존한다. 그래서 창조자인 이들 여신에게 사람들은 두려움과 경외감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파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파괴할 때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의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힘은 어디서 오는가? 밥이다. 밥은 생존에 필요한 요소다. 에너지의 원천이다. 잘 먹어야 힘을 낼 수 있다. 힘이 있어야 생산이 가능하다. 밥 잘 먹는 색시는 입이 함지박만하다. 입이 크다는 것은 식욕이 왕성하다는 의미다. 내외가 마주앉은 밥상을 보면 남편의 밥그릇과 옷 색깔이 온통 회색빛에 것에 비해 색시는 그릇뿐만 아니라 옷까지 활기찬 에너지를 뿜어내는 붉은 색이다. 이처럼 왕성한 식욕을 가진 색시는 자신의 에너지를 채우는 데 충실하다. 타자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본능적인 감각에 정직하다. 그런 그네의 내면엔 열린 문 밖에 싱싱하게 핀 꽃처럼 자연의 힘이 넘실댄다. 훼손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원시적인 힘이 있는 색시는 그래서 건강하다. 남편보다 결코 작지 않은 몸집의 그네는 내면에 형성된 자신감의 정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당하게 곧추 세운 어깨와 넉넉함을 상징하는 큰 손, 두려움 없는 눈은 그네가 온전한 존재 자체임을 말하고 있다. 온전한 존재는 타자를 돌볼 줄 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색시는 여신이 인류 역사에서 왜곡되고 굴절된 채 심술궂거나 나약한 존재로 밀려난 것처럼 남편에게 죽임을 당한다. 여신이 죽은 자리에 남성 중심, 가부장 중심의 신화가 탄생한다. 이제 불균형과 결핍의 슬픈 역사가 시작된다.

밥 안 먹는 색시는 무섭다

색시는 접시에 밥알 세 알을 담고
한 알씩 개미구멍만 한 입 속에 집어넣어
쫄쫄 빨아 먹었습니다.
다 먹고는
“아유, 배부르네, 배불러.”
하고 말했습니다.
남자는 좋아서 입을 헤벌리고 웃었습니다.(『밥 안 먹는 색시』 16쪽)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많은 여자들이 한 번쯤은 해봄직한 일이다. 연애할 때, 또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던 일, 손바닥보다 작은 고기 조각도 반 넘게 남긴 채 배부르다며 손을 내려놓았던 일. 꼬르륵거리는 내 배에 정직하지 못하고 앞에 앉은 사람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한 일들. 데이트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양푼을 끌어안고 허기를 달래다가 급기야는 폭식으로 탈난 배를 끌어안은 채 뒹굴던 슬픈 역사. 그러나 이런 슬픈 역사는 대부분 결혼을 하면서 막을 내린다. 지청구하는 남편의 소리를 귓가에 스치는 바람처럼 여기며 내 식욕에 충실한 행복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림책 속의 밥 안 먹는 색시는 결혼 생활 내내 본능의 욕구를 억압당한다.

인간의 본능적인 식욕을 억압하는 남자는 다이어트 광풍을 조장하는 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개체성을 존중하지 않는 폭력적인 사회의 잔혹한 모습이다. 밥 안 먹는 색시와 남편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왜소한 몸집의 색시는 다소곳한 태도로 남편에게 눈을 맞추고 오로지 그만 바라보고 있다. 한편 그 옆에 선 남편은 팔짱을 낀 권위적인 자세로 눈을 치켜뜨고 있다. ‘넌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곳간 주인은 나야.’ 마치 월급 봉투를 내밀며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과 닮았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활짝 핀 꽃이 흐드러졌던 색시의 내면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남편이 자리 잡고, 땅에 뿌리박고 피었던 꽃은 줄기가 무참히 꺾인 채 꽂병에 꽂혀 있다.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힘은 곳간 열쇠를 쥐고 있는 권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색시의 창조적인 에너지 원천인 밥을 통제한 남편은 곳간에 자신의 탐욕을 차곡차곡 쌓는다. 그런 남편의 모습은 오늘도 갖가지 명분을 내세워 여신들의 숨통을 죄는 자본의 힘과 권력의 횡포다. 대상화된 색시의 온 몸이 창백하다. 얼이 빠졌다. 더 이상 생명의 기운이 꿈틀대지 않는 넋이 빠진 색시 모습은 소름 끼친다.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적인 힘을 외면하고, 오늘도 스스로 밥알을 세며 다이어트의 늪에 빠진 우리가 측은해진다. 힘을 생산하는 밥상을 밀어내는 여자들의 과감한 결단이 서글프다. 밥 안 먹는 여자를 칭송하는 보이지 않는 음험한 욕망에 분노가 치민다. 본능적인 식욕을 스스로 억압하는, 아니 억압당한 이 시대의 밥 안 먹는 숱한 색시들은 건강한가?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소리를 외면하는 내면은 편안한가? 생산적인 에너지가 멈춘 자리에 시기와 질투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검은 머리숱 밑에 감춰둔 욕망의 입, 파괴적인 예측불허의 힘을 나보다 낮은 자리, 약한 목숨들에게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지는 않는가? 순한 양 같은 얼굴 뒤에 숨겨둔 억압당한 본능이 이글거리는 불덩이로 들끓는 것이 두렵다. 언제 어디로 얼마나 거세게 튀어 오를지 무섭다. 노동으로 단련된 손과 본능적인 욕망을 외면하는 세상에 길들여진 내가, 우리가 무섭고 두렵다.

불편한 되새김질

우연한 기회에 일본에서 출판된 『밥 안 먹는 색시』를 보게 되었다. 이나다 가즈코(稻田和子) 재화에 아카바스에키치(赤羽末吉) 그림을 그린 이 책은 1977년 3월 『어린이의 벗』에 처음 실렸고, 그 뒤 1980년에 福音館 書店에서 단행본으로 펴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자꾸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장면을 만났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도 흡사한 장면을 보며 우리나라에서 펴낸 『밥 안 먹는 색시』의 출판 년도를 살펴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책을 비교하여 거듭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나라 것이 2006년 12월에 출판되었으니 일본 것보다 약 40년 정도 뒤에 나온 것이다.

두 그림책의 장면은 보는 이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는 까닭은 비슷한 글 서사를 바탕으로 하다 보니, 어쩌면 우연의 일치로 그림 작가의 상상력이 닮아서 생긴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림의 구도와 형태에 관한 진실은 작가만이 알고 있으리라. 나는 우리 작가들이 그림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하는지 알기에 섣부른 판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잘잘못의 잣대를 들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품은 이 불편한 궁금증은 우리 그림책에 창조적 에너지를 보태고 싶은 간절함으로 자꾸 들여다보고 되새김질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임을 고백한다.
최은희 | 충북 청풍에서 열다섯 살까지 들로 산으로 거침없이 쏘다니며 자랐지요. 1990년 오월문학상을 받아 얼떨결에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지금은 천안에 있는 ‘느림어린이문학회’에서 8년째 공부를 놀이 삼아 노닥거리며 지낸답니다. 공주교대와 춘천교대에서 어린이문학공부를 했고, 『그림책을 읽자, 아이들을 읽자』를 펴냈어요. 워낙 노는 걸 좋아해서 앞으로는 ‘놀세'라는 필명을 쓸까, 이런 생각도 갖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