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8월 통권 제1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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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서평]
같고도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었다

편은정 | 2012년 08월

나이가 조금 들었다고 단정 짓곤 했어요. ‘사람은 바뀌지 않아, 똑같은 생활 패턴이 그대로 이어질 거야, 삶이 바뀔 이유가 뭐가 있어.’ 삶이, 내가 변하지 않을 것 같지요? 변할 이유 없을 것 같지요? 아니 변해도 되어요. 변해도 되고요. 엄밀히 말해서 변한다기보다 마음 저 안에 처박혀 있던, 지금과 달라 보이는 어떤 성향을 끄집어낸다고 할게요.

엘시는 꼬마 아가씨예요. 보스턴 도시 생활을 좋아했지요. 특히 도시의 소리에 애정이 많았어요. 보스턴 항구의 갈매기 끼룩 소리, 생선장수가 손님 부르는 소리, 자갈길 따닥따닥 말발굽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엘시는 친구들과 줄넘기 리듬에 맞추어, 새소리에 맞추어 노래했어요.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 엘시는 첨탑 종이 울릴 때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어요. 소리를 듣고 소리를 내는 것. 엘시가 세상과 교감하는 방법이었어요.

엘시 아빠는 엘시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 보스턴 생활을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아빠는 엘시를 데리고 서부로 떠납니다. 보스턴에서 멀고먼 네브래스카였어요. 보스턴의 소리를 연상시킬 그 무엇도 없는. 풀과 하늘과 고요함뿐이었어요. 마음을 닫은 아가씨. 엘시는 초원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아요.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아요. 엘시는 티미만 보고 살아요. 티미는 카나리아예요. 보스턴에서부터 함께했지요. 엘시는 티미의 소리만 듣고 티미에게만 노래를 들려줍니다. 엘시에게 소리는 매우 중요해요. 듣고 즐기고 답하며 세상과 느낌을 나누니까요. 그런데 소리로부터 마음을 닫아 버리니 엘시의 세계는 더 커질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사건이 일어났어요. 새장 문이 열리고 티미가 밖으로 날아가 버린 거예요. 엘시는 앞뒤 따질 겨를도 없이 새장을 들고 초원으로 달려 나갔어요. 풀 속에서 티미를 애타게 부릅니다. 새장 밖의 티미. 티미를 따라 어느새 네브래스카의 초원 한복판에 서 있게 된 엘시. 엘시와 티미는 풀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진 곳 어딘가에 머뭅니다. 감싸입니다. 그제야 초원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렇지요, 이러한 순간에 마음은 열리고 사랑이 시작되어요. 엘시를 보세요. 아이의 마음과 몸을 감싸는 신선하고 잔잔한 환희를.

데이비드 스몰의 그림은 참 대담하고 또 섬세합니다. 엘시의 표정과 동작 표현은 놀랍습니다. 거침없고 투박한 선과 맑은 수채 채색에는 아이의 즐거움, 서운함, 심난함, 하기 싫음, 안도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구도는 어찌나 극적인지요. 거대한 자연 환경에 비해 지면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엘시의 말없는 모습에서, 초원에서 엘시가 느낀 실망감, 외로움, 두려움이 전해집니다. 엘시 아빠는 또 달라요. 보스턴에서 엘시 아빠는 매우 큼직하게 그려 있습니다. 그러나 텅 빈 눈동자에도, 힘없이 엘시에게 잡혀 있는 손에도, 허망함이 역력합니다. 초원에서 그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해요. 작가는 이제 그의 얼굴을 바짝 당겨 그리지 않아요. 저 멀리, 작게 그려져 콧수염을 빼면 누군지 알 수 없어요. 대신 힘껏 말고삐를 끌어당기고 마차를 모는 모습을 보여 주지요. 그것은 주어진 하루를 몸으로 살고 있는 한 일꾼의 모습이에요. 엘시 아빠는 초원의 일부가 되어 초원에서의 사람살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삶은, 생활은 바뀌기도 해요. 사람은 바뀌기도 해요. 나의 다른 모습을 끌어낸다고 할게요. 약간의 변화, 또는 큰 변화를 위해 엘시 아빠처럼 삶의 터전을 옮길 수도 있어요. 엘시처럼 우연히 알아차리기도 해요. 우연이든, 노력이든, 새로 깨달은 자신의 모습과 감성이 마음에 든다면, 즐길 만하다면, 시작되는 거예요. 일상이긴 일상이나 꿈틀거리는 일상. 익숙하고도 새로운 날들에 접어듭니다.

제인 욜런이 문학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것도 아니고 데이비드 스몰의 그림이 다른 책과 비교하여 확연히 다르지도 않아요. 그렇다고 아쉽지도 않아요. 한 장면만으로도 되어요. 주인공 엘시가 초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미소 짓는 장면만 기억하고 떠올려도 되어요. 어느 숲, 어느 강가, 어느 밤 바닷가에서 해 봄직한 것들이지요. 내가 처한 곳의 흐름만 느끼는 거예요. 그리고 입꼬리를 올려요. 속이 꽉 찬 미소.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보탤래요.
편은정│열린어린이 기획팀장. 데이비드 스몰 부부의 『리디아의 정원』에 나오는 리디아를 닮았습니다. 거기에다 주근깨 빼빼 안 마른 까만머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