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9월 통권 제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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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책 이야기]
9월 ― 우연 | 어느 멋진 날!

박미연 | 2012년 09월

야릇한 행복감

며칠 전에 말로만 듣던 ‘클럽’이라는 곳엘 가보았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제자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던 중에 내가 클럽 한 번 못 가 보고 늙어 버렸다고 한탄을 하자, 애들이 우리 동네 대학교 앞에 생각보다 작고, 초라한 클럽이 있는데 함께 가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말이 그렇지 이 나이에 무슨 클럽이냐 싶었지만, 혹시 애들이 가고 싶은데 돈이 부담스러워서 평소 못 가는 곳인가 싶어서, 출입 제지당하는 거 아니냐고 백만 번 묻고는 갔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십여 년 전 나이트클럽에 대한 잔상을 갖고 있는데, 아이들이 말한 클럽은 정말 생각보다 더 당황스럽게 좁고, 동네 친구들 모임 장소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수줍게 들어서서 어둠이 눈에 익기도 전에 한쪽에서 “엄마야, 우리 선생님이다!”, “뭐? 어디 어디?” 난리가 났다. 그 동네서 나고 자란 애들이 동네 대학교에 간 경우도 많아 구석구석 아는 애들이었다. 나는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클럽에 가서, 들어서자마자 선생인 거 들켜서 춤도 못 추고, 몇 테이블의 계산까지 해주고, 나올 때까지 많은 사람의 눈길을 계속 받아야 했다. 그래도 잊지 못할 추억이라는 둥, 고맙다는 둥, 자기 친구들이 선생님 너무 멋있다고 난리 났다는 둥……. 애들과 헤어지고 새벽녘에 쏟아진 메시지들을 보고는 쫌 뿌듯하고, 뭉클하고,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운 것 같아 우쭐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감정에 잠시 행복했다.

『양파의 왕따 일기 2』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책이다. 제목에 바로 드러나듯이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인 ‘왕따’를 주제로 하고 있어 시사점도, 생각할 부분도 많고, 1편을 읽지 않아도 전혀 문제 되지는 않지만 1편과 내용이 연결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각설하고 ‘우연’에만 초점을 맞춘다.

우연에서 많은 것들이 시작되더라

다솜이 전학을 와서 정화를 만난 것은 우연이다. 이 우연이 다솜의 새 학교 적응에 큰 도움을 준다. 다솜의 성격을 보면 정화의 도움 없이도 잘 적응할 아이지만 정화는 이전에 있었던 사건에 괴로워하면서 또다시 정선이 같은 경우가 되도록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마음에 다솜을 위해 애쓴다. 전학 와서 정화와 같은 반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다솜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정화의 도움을 받는다. 전학 온 친구가 다솜이 아니고 그 누구였어도 정화는 도왔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는 늘 이런 식이다. 어느 날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가 뭔가를 제안하고, 길가다가 우연히 발에 차인 깡통 때문에 사건이 시작되었다가 해결되기도 한다. 어쨌든 어떤 사건이 생기려거나 해결이 되려면 뭔가가, 누군가가 나타나야 한다. 왜 하필 그 시간에 그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고, 같은 반이 되냐 말이다. 그것이 우연이다. 우연이 없다면 세상에서 글 쓸 수 있는 사람 없을 테고, 모든 드라마는 2회를 넘길 수 없지 않을까.

나는 아이들에게 항상 공평하려고 노력한다. 그중에서 내가 십 년째 쭈욱 고집하고 있는 것이 ‘자리 정하기’다. “우리 애는 눈이 나쁘니 앞자리에 앉게 해 주세요, 우리 애는 키만 컸지 아기랑 똑같은데 만날 뒷자리만 앉아서 스트레스 받아요” 등 학부모들은 항상 앞자리를 원한다. 정작 학생들은 선생님 시야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앞자리보다 뒷자리를 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그래서 고민끝에 매주 자리를 뽑아서 앉히기로 했다. 이번 주는 남학생을 키대로 앉히고 여학생들은 남학생 이름이 적힌 종이를 뽑아 그 이름 옆에 가서 앉고, 다음 주는 반대로 하는 방식이다. 남녀 수가 안 맞으면 많은 수의 성별을 가진 학생 중 혼자나 같은 성별끼리 앉을 친구를 뽑은 후, 뽑기를 시작한다. 눈 나쁜 학생이 뒷자리에 가도, 덩치 큰 학생이 앞자리에 가도, 겨울날 찬바람 새어드는 4분단에 앉아도, 여름날 볕 잘 드는 1분단에 앉아도, 혼자 앉아도, 일주일만 참으면 되니, 어쨌든 아직은 학생들도 나도 대체로 만족이다.

우연이 더러는 인연도 되니

그런데 말이다…… 참 당황스러운 때가 있다. 이번 주에 영희가 철수를 뽑았는데 다음 주에 철수도 영희를 뽑는 경우다. 근데 그게 이 주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 꽤 지속적,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본인 생각에 짝이 된 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마음에 들더라도 다른 애들 눈을 의식해서 나한테 와서 “선생님 저번 주 짝이었던 애가 또 절 뽑았어요! 벌써 네 번째에요.” 하고 푸념을 한다. 그러면 나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한다. “아무래도 느그는 인연인갑다. 결혼해라. 내가 아무리 바빠도 꼭 참석할게.”

올해 우리 반 똑순이 수진과 느긋한 용수가 그렇다. 유쾌한 수다쟁이에다가 뭐든 똑 부러지게 잘하는 수진은 학습 의욕도 없고, 절대 화내는 법이 없고, 세상 급할 게 없이 늘 씨익 웃고 마는 느긋한 용수가 성에 안 찬다. 짝이 여러 번 되자 자신과는 다른 용수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수진은 용수를 선생님처럼 챙겼다. 수학 문제 풀라고 하면 얼른 자기 것 다 풀고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는 용수에게 얼른 풀라고 다그치다가 가르치기도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른 친구들처럼 그냥 보고 있으면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수진의 성격이다. 꼬마 선생님 덕분에 내가 많이 수월하다. 짝지를 뽑는 날이면 수진은 “또?” 하고 길길이 날뛰지만, 정말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용수는 당연히 싫지 않은 듯하고.

그런데 용수가 변했다. 용수는 문제를 읽어 주면 풀었다. 3학년 올라올 때 부진아 꼬리표를 달고 왔다. 일대일 방식으로 수업을 하면 듣기는 하던 용수였다. 하지만 매사에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크지 않은 학교에 용수를 아는 사람이면 모두 나한테 어찌하느냐고 한마디씩 한다. 그런데 수진을 만나고부터 용수는 쉬는 시간이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점심시간이면 뒤뜰에서 줄넘기를 한다. 처음에는 항상 수진이 옆에 있더니 지금은 혼자도 열심히 한다. 중간고사보다 기말고사는 무려 30점이 올랐다. 그래도 평균 60점이 안 되지만 중간고사 상황에 비하면 경이로운 발전이다. 앞으로 남은 한 학기 동안 용수가 얼마나 더 변할지 기대된다. 학교 사람들이 놀라고, 나는 다 내가 잘해서 그런 것처럼 그냥 웃는다. 용수는 뽑기로 우연히 만난 수진이 덕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고 수진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수진도 용수에게 학습을 다시 알려 주면서 복습도 되고, 무엇보다 수진은 가르치는 즐거움을 아는 아이다. 나는 수진이 역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왕따, 아이들만의 문제일까?

미희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1편에서 속 시원히 해결된 것 없이 정선이가 전학 간 것으로 마무리가 되어 계속 찝찝했는데 기어이 미희가 말썽이다. 그러나 정화의 소심한 용기가 도화선이 되어 상황은 바뀐다. 양파에 속한 아이들은 저들끼리의 얘기 중에 우연히 자꾸 드러나는 진실 때문에 돌아가면서 왕따를 당한다. 그리고 선생님이 개입한다. 선생님이 상황을 알게 되었다. 가만히 두었어도 해결될 조짐은 보였다. 모두가 상처를 깨끗하게 치유하고 없었던 일처럼 되지는 않았겠지만 선생님이 어느 날 ‘투명인간 놀이’를 들고 등장하면서 더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 좀 빨리 정리가 되는 셈이다.

왕따를 시키거나 당하는 아이들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 당하는 아이들에게는 환경적 요소나 외적인 요소, 남보다 뛰어나거나 뒤처지는 능력이 이유가 된다. 따돌리기를 주동하는 아이는 대부분이 다 집안 문제다. 너무 가난해서 부모가 관심이 없거나 부잔데 부모가 관심이 없거나. 그렇다고 왕따를 시키는 아이에게 필연성을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왕따가 아이들만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라는 점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는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양파의 왕따 일기』 1, 2편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였지 싶다. 이제 ‘투명인간 놀이’로 정화 반 친구 모두가 왕따를 경험해 보고 진심으로 뉘우쳤으니 이제는 3편은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우연’은 다양한 얼굴을 숨기고 있다. 우연히 얽힌 인연이나 사건이 인생을 크게 발전시키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트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이 좋은 인연과 좋은 사건만 만나 인생에서 멋진 날만 펼치기 바란다. 내 제자들은 우리가 어떤 인연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들과 나도 우연히 만났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가게 된 클럽, 그리고 거기서 팔구 년 만에 우연히 만나게 된, 아픈 손가락이었던 잘 자란 제자. 인생은 우연한 연속이라고도 하고, 정해진 길을 가고 있는 거라고도 하지만, 그건 귀신이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성격의 문제라 여기서 내가 단정 지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내가 모르고 가는 길이니 항상 앞으로 일어날 일이 흥분되고 기대된다.
박미연 |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배우며 지냅니다. 아이들에게 엄마처럼, 언니 누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편하고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무작정 어린이 문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