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통권 제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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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가는 여행]
마음 속에 지은 집

박성원 | 2012년 12월

취재는 여유 있게, 촬영은 즐겁게’라고 늘 다짐을 하지만, 내공이 부족한 탓인지 요령이 부족한 탓인지 늘 종종걸음 치게 된다. ‘여행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여행 작가’는 ‘열심히 일한 나’에게 종종 선물을 하는데, 모든 취재 일정을 마치고 ‘진짜 여행’을 하는 것이다. 며칠 푹 쉬는 호사스런 여행은 물론 아니다. 그냥 한 군데 들러 슬렁슬렁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고 위로가 된다.

2박 3일 동안의 빡빡한 취재를 마치고 영주 부석사에 갔다. 해마다 가을이면 무슨 주문처럼 입안에 맴도는 사찰. 10여 년 전 처음으로 부석사를 찾았을 때를 빼고는 매번 눈도 없이 마른 겨울날 가게 되었던 사찰. 드디어 딱 적기에 부석사를 가려고 작심을 하니 취재하는 걸음이 급해졌다. 아침을 거르고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우며 고군분투한 끝에 해지기 전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경숙의 소설 「부석사」를 생각하며

부석사만큼 대한민국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절이 또 있을까? 사과꽃 피는 봄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날, 혹은 하얗게 눈이 쌓인 겨울까지,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전해지며 사찰답사 1순위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2001년 제25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신경숙의 소설 「부석사」에서 주인공들이 찾아가던 곳이 영주의 부석사다. 각자 사랑의 상처를 안고 있는 두 남녀가 부석사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이웃으로 알고 지내던 주인공들은 과거의 연인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오자 회피하듯 부석사로 향한다. 지도 한 장에 의지해 차를 달리던 중 산길로 접어들게 되고 막다른 벼랑을 만나 눈 내리는 산 중에서 밤을 보낸다. 부석사 일주문 앞에도 못 가보고 소설은 끝난다.

소설의 제목이 해인사나 불국사였다면 어땠을까, 내가 가보지 못한 파리나 남극이었다면 어땠을까. 사과며 산나물들을 파는 할머니들의 좌판을 지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일주문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은행나무가 도열한 길은 여행자들로 꽉 찼다. 무성해야 할 은행나무 가지들은 지난여름의 태풍 때문인지 예년에 비해 야윈 모습이다. 그래도 노란 은행나무 아래 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즐거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이미 부석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황제의 만찬이라도 즐긴 듯 흡족한 표정이다.

보물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는 당간지주를 지나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지는 부석사 경내로 들어선다. 계단을 오르느라 몸을 숙인 채 걷다보면 마치 부석사에 안겨 올라가는 듯 푸근한 느낌을 받는다. 가람의 배치가 독특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부석사의 큰집’이라 불리는 봉화의 축서사와 그 배치가 유사하지만 그 느낌은 부석사가 훨씬 온화하다. 안양루를 올라 그 유명한 무량수전 앞마당에 서니 입이 딱 벌어진다. 내가 본 중 최고의 인파가 무량수전 앞에 모여 있는 것 같다. 이리저리 몸을 틀며 내 한 몸 서 있을 자리를 찾다가 그만두고 조사당으로 향한다.

선묘낭자의 사랑이 깃든 부석사


무량수전 뒤편으로 100여 미터 산길을 오르면 조사당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모신 전각으로 의상대사가 땅에 꽂은 지팡이가 자라 나무가 되었다는 골담초가 처마 아래서 자라고 있다. 부석사의 창건설화에는 의상대사를 사랑한 선묘낭자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시절에서 출발한다.

당나라로 함께 유학길에 오른 원효대사가 해골에 든 물을 달게 마신 후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고 신라로 돌아갔고 의상대사는 당나라에서 불교 공부를 하게 된다. 당나라와 교역이 잦아 신라에서는 신라방을 설치했고 사찰인 신라원도 함께 두었다. 신라방을 관리하던 사람의 딸이라 추정되는 선묘낭자는 의상대사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차마 그 마음을 전하지는 못했다. 출가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마음의 병은 깊어만 갔고 의상대사가 신라로 돌아가는 배에 오르자 선묘낭자는 바다에 뛰어들어 바닷길을 지키는 용이 되었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대사는 인적이 드문 봉화산 자락에 사찰을 세우고자 했는데 이미 그 곳에는 산적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사찰을 지으려는 의상대사를 방해하는 일도 잦아 큰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이 때 선묘낭자의 화신인 용이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리자 산적들은 혼비백산 도망쳤고 의상대사는 무사히 사찰을 지을 수 있었다. 지금도 무량수전 왼쪽으로 ‘부석(浮石)’이라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바위로 그 사이에 가느다란 실을 넣으면 다시 빠져나올 만큼 떠 있다. 현대에 와서 지어진 것이지만 선묘낭자의 영정을 모신 선묘각이 그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신경숙의 소설 「부석사」에서는 ‘부석’의 이미지를 떠 있는 두 개의 돌과 같은 사람 사이의 거리로 표현했지만 나에게 ‘부석’은 사랑과 헌신의 이미지다. 지엄한 천년고찰을 둘러보며 속세의 사랑을 생각하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상대사를 사랑한 선묘낭자를 떼어놓고는 부석사를 생각할 수 없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완성되자 선묘낭자는 그 앞마당에 몸을 누인다. 평평해야 할 마당이 울퉁불퉁한 이유도 아래에 석룡(石龍)이 누워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 쪽에 꼬리를 두고 머리는 무량수전을 향한 채 누워 있는 한 마리의 용. 나는 길게 머리를 풀고 엎드린 한 여인을 상상한다. 너무 에로틱한가? 불경인가?

소설 속 주인공들이 헤매던 산길

부석사를 내려 와 지인을 만나러 간다. 강원도 인제군 곰배령 아래에 살던 설피산장의 안주인이다. 여행객의 실수로 산장이 소실된 후 곰배령을 떠나 부석사 뒤쪽에 새 터전을 마련해서 살고 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안내에 따라 길을 달리니 어느새 꼬불꼬불 산길에 접어든다. 혹시 안내가 잘못된 것일까 의심도 해보았지만 붉은색 선은 계속 앞으로 달리라고 알려준다.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호위하는 산길은 차 두 대가 교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다. 만일 마주 오는 차라도 있다면 꼼짝없이 후진해서 부석사까지 가야 할 판이다. 해는 지고 헤드라이트에 의존해 더듬듯 앞으로 간다. 사방이 검은색 도화지처럼 어두워 뒷덜미가 쭈뼛거린다. 오른쪽으로는 소설 「부석사」의 주인공들이 마주했을 낭떠러지가 이어진다. 이러다가 그들처럼 차에서 밤을 새야 할지도 모른다. 지도라도 확인하고 싶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해서 차를 돌릴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냥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핸들이 푹 젖도록 가슴을 졸이며 산모퉁이를 돌아 나간다. 마주 오는 차가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10km 남짓 거리의 고개 하나를 넘자 비로소 서너 채의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취재 끝의 피곤도 부석사를 돌아본 기억도 모두 까맣게 잊어버렸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안양루를 바라보는 것도 못하고 왔다는 것은 지인의 집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바로 산 하나 너머에 있는 부석사를 두고, 불과 한 시간 전에 다녀 온 부석사를 두고, 또다시 부석사를 생각한다. 정신건강에 해로울 것이 없는 복기다. 이제 부석사는 어두운 산길과 함께 기억될 것이다.

시 한편이 머리를 맴돈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
새벽이 지나도록 / 摩旨(마지)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
나는 부석사 당간 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그리운 부석사」)


시인처럼 마음속에 절을 하나 지어볼까 싶다. 절이 아니어도 좋다. 교회여도 좋고 강이어도 좋다. 가보지 않은 곳이라도 상관없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곳, 반평생이 넘어가기 전에 마음 담을 집 하나 꼭 지어야겠다.

박성원 | 여행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여행작가입니다. 『걷고 싶은 거리 여행-부산편』, 『생각이 깊은 아이로 키우는 걷기여행』, 『맨발의 꿈, 맨발의 여행자』,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1001곳』 등의 책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