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1월 통권 제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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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서평]
어떤 슬픔을 기억해, 똑똑히

편은정 | 2013년 01월

자꾸 잊으려고 해요. 내가 그러는 게 아니에요. 난 잊으려고 애쓴 적 없어요. 내 안에 내가 제어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걸 무의식이라 한다면, 이 잊음은, 무의식이 한 일이에요. 많은 것을 공유했는데도 아주 적은 것만 기억이 난다면, 그건 무의식이 열심히 지운 거예요. 그러면 아니 괴로울 줄 알고. 그러면 내가 아니 힘겹게 살 줄 알고.

마이클 모퍼고는 꽤 많은 책을 쓴 작가예요. 그의 여러 이야기들이 감정이 풍부하고 맑지요. 힘겹고 고단한 상황에서도 감정을 극단적으로 이끌어 가지 않아요. 잔잔하게 그리지요. 그의 이야기에 거의 늘 짝 지어지는 맑은 수채화처럼요. 아, 작가가 이야기 하나를 시작합니다. 글 속 주인공의 아주 근사했던 시절, 기억할 만한 시절, 찬란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 기억엔 페티그루 아줌마와 페티그루 아줌마의 기차간 집이 있던 습지라는 장소가 크게 자리 잡고 있어요. 마이클은 동네 아이들에게 떠밀려 얼굴을 다치고, 마침 지나가던 페티그루 아줌마가 마이클을 집에 데려가 치료해 주었지요. 페티그루 아줌마는 독특한 향기가 있는, 멋이 있는 인물이에요. 아시아 여인이고 영국인과 결혼하여 영국의 한 마을에 정착했으나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아줌마만 남아 습지 곁 기차 한 칸 집에 살고 있었지요. 늘씬한 개 세 마리 빠름이, 더빠름이, 왕빠름이와 이름 따위는 안 좋아하는 당나귀도 같이 살았지요.

페티그루 아줌마가 마이클의 상처를 치료해 준 뒤, 마이클의 엄마와 페티그루 아줌마도 무척 친해졌어요. 아주 멋진 시절이었어요. 같이 별을 보고 직접 기른 야채를 나누어 먹고 감정을 교감했을, 아주 멋진 시절이었어요. 페티그루 아줌마가 사는 습지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운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찬란한 시절은 조금씩 어두워져 갔지요. 페티그루 아줌마의 진심 어린 호소에 많은 이들이 동조하는 듯했지만 개발은, 무언가를 ‘더’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결정되고 시작됩니다. 페티그루 아줌마는 습지의 집을 불태워 버립니다. 이후 페티그루 아줌마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 노년이 되어 가는 마이클이 다시 마을을 찾아갑니다. 마을을 둘러보고 지난 시절을 떠올립니다. 인생의 어느 찬란한 시기, 그러나 실패한 프로젝트. 발전소 반대 시위는 성공하지 못했고 어린 시절의 멋진 인물은 비탄에 잠겨 세상을 떠났고 아름다웠던 고향에는 쓸모없고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들어서 있어요. 그 옛날, 찬란했던 시절은 지키지 못했고 지금은 서글픈 정서만 남았다네. 페티그루 아줌마가 던진 사회적 메시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녀의 삶은 그와 함께 저물었다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골랐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과 사람의 짧은 안목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회보다 개인-사람을 말하고 싶었어요. 마이클 모퍼고가 이념을 설명하는 대신 이야기와 감정을 택한 것처럼, 사람의 감정을 바라보고 싶었어요.

사회 운동은 실패하고 삶은 저물었는데,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던 자리에 아름다움은 여전히 남아 호소합니다. 무엇보다 강하게 호소합니다. 시절의 아름다움, 장소의 아름다움, 사람의 아름다움, 감정의 아련함이 남긴 아름다움.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못하도록 더 노력해야 하는 거라고 말해 줍니다. 나는 생각해요. 살아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을 해야 하는 거라고. 기억해야 할 것을 더 기억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못 하게 하는 거라고. 또한 아름다움을 기억할 의무, 인간을 포함하여 생물이 생물 자체의 고유한 시간과 속성에 따라 살아야 할 의무, 인간의 힘이 그리 강하다면 다른 생물도 그렇게 살게 도울 의무를 져야 한다고. 특히나 젊다는 것은 더더욱 그래야 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내가 잊으려 하지 않아도 자꾸만 잊혀 가는 기억. 나는 얼마 전부터 그 기억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내가 가장 오래 쓸 수 있는 소재를 끄집어내어서요.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하고 있지요. 기억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힘을 보태 주고 있으니까요.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고 싶어요. 그 기억이 괴롭더라도 기억하고 끌어안을 힘이 생기기를 바라요. 마음이, 아파와요.
편은정│열린어린이 기획팀장. 김연수 소설가가 어느 이야기에서 그랬어요. “책에 씌어진 얘기가 아니라 두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얘기하게나. 두 눈으로 보이는 그 광경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몸으로 말해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