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3월 통권 제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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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흔의 새로 읽는 그림형제 동화]
‘개구리 왕자’에 담긴 비밀

신동흔 | 2013년 03월

그림형제 동화에 관한 이야기를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로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이 그림형제 민담집의 첫머리에 놓여 있지는 않다. 200편 민담이 실린 최종판본 기준으로 「백설공주」는 53번, 「신데렐라(아셴푸텔)」는 21번이다. 그렇다면 그림형제 민담집의 맨 앞자리에 놓여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개구리 왕자」다. 그림형제 민담집이 개정을 거듭하는 가운데 이야기 구성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첫 번째 자리는 늘 「개구리 왕자」 차지였다. 이제 책의 맨앞으로 돌아가 「개구리 왕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이어서 두 번째 이야기인 「고양이와 쥐」까지도. 왜 이들에 앞서서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란 게 원래 그런 거라고.

그림형제 민담집, 한 편의 긴 이야기

‘가정과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Kinder-und Hausmarchen)’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형제 민담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1권은 1812년, 2권은 1815년, 7판에 해당하는 최종 판본이 출간된 것은 1857년이다. 부록처럼 붙은 「어린이를 위한 성자 이야기」를 제외하면 초판에 총 157편이던 이야기가 최종판에는 200편으로 늘었다. 전체적으로 숫자가 늘었을 뿐 아니라 사이사이에 바뀐 이야기들도 꽤 있다.

그림형제 민담집을 몇 차례 살펴보면서 깨달은 사실은 이 책 전체가 하나의 잘 짜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야기들의 배치가 무척이나 공교하게 이루어져 있다. 얼핏 보면 아무 질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그만큼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배치한 결과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야기들이 서로 이어져 맥이 닿으면서도 사이사이에 변곡점이 있고 적절한 파격이 있어 지루하지 않다. 위 아래로 또는 전후좌우로 자연스럽게 늘었다 줄었다 하는 형국이다. 일종의 카오스적 질서라고나 할까. 그리고 사이사이에 엉뚱한 유머가 튀어나온다. 다들 독립된 이야기들인데 한 이야기에서 갑자기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 언급되는 것이 그 예다. 그야말로 민담 식의 유쾌하고 발랄한 유머다. 이야기들과 만남을 이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 형제, 이야기꾼이었구나.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펼쳐내는 진짜 이야기꾼!

종종 그림형제 민담이 원전을 윤색해서 왜곡한 부분이 많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개정 작업을 하는 가운데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각색해서 부풀렸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온전히 믿고 있다. 설사 이들이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바꾸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가 민담의 본령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이야기의 길을 아는 이야기꾼이었으므로. 그들이 펼쳐낸 이야기가 2백 년 넘도록 세상 사람들한테 널리 사랑을 받는 것은 우연일 리 없다.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진짜 이야기들’의 향연에 그저 즐거울 따름이다. 그 즐겁고 충만한 향연이 「황금열쇠」로 마무리되는 장면에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금열쇠」는 온전히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 시작되는 황금빛 이야기! 이보다 더 멋진 마무리가 있을 수 있을까.(이 지점에서 나는 이들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어쩌면 이들 형제는 수시로 이야기 시합을 벌이면서 이야기 감각을 가다듬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쉽게 풀리지 않는 의문은 바로 「개구리 왕자」였다. 이들 형제 이야기꾼은 최고 이야기들의 파란만장한 대장정 첫머리를 왜 하필 이 이야기로 시작한 것일까? 나의 의아함은 이 이야기 주인공이 작고 더러운 개구리 때문이 아니다. 이야기 내용 때문이었다. 「개구리 왕자」는 그림 민담집의 모든 이야기를 통틀어서도 가장 이상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개구리 또는 왕자

옛날 옛적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던 시절에 어느 왕한테 예쁜 딸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도 막내공주는 해님이 부러워할 만큼 아름다웠다. 공주는 울창한 숲속에 들어가서 황금 공을 던지며 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주가 아끼는 황금 공이 굴러서 깊은 샘물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공을 찾을 방법이 없어서 슬피 울고 있을 때 물 속에서 못 생긴 개구리가 머리를 내밀고서 왜 우느냐고 물었다. 사정을 들은 개구리는 자기 소원을 들어주면 공을 찾아주겠다고 했다. 공주는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했다. “공주님이 저를 좋아해 주시고 친구로 삼아서 식탁에서 같이 음식을 먹고 침대에서 함께 자게 해주신다면 황금 공을 찾아드리지요.”

공주가 그리하겠다고 약속하자 개구리는 물속으로 들어가서 황금 공을 건져다가 전해주었다. 공을 받아든 공주는 자기를 부르는 개구리를 모른 척 외면하고 서둘러서 궁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공주가 밥을 먹을 적에 누가 공주를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그 개구리였다. 공주는 개구리를 들이지 않으려 했지만 왕이 약속한 말은 지켜야 한다며 개구리를 들이게 했다. 집으로 들어온 개구리는 식탁에 올라앉아 공주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공주를 따라 침실로 들어와서는 침대에 눕혀 달라고 했다.

공주는 더러운 개구리와 한 자리에 눕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공주는 개구리를 집어 들고 온힘을 다해서 벽에다 내동댕이쳤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것은 개구리가 아니라 다정한 눈을 가진 왕자였다. 왕자는 공주 덕에 마법이 풀렸다면서 기뻐했다. 침대에서 함께 밤을 보낸 두 사람은 다음날 충성스런 시종 하인리히가 몰고 온 마차를 타고서 왕자의 나라로 향했다. 왕자가 개구리가 됐을 때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가슴을 강철 끈으로 묶었던 그 하인리히였다. 두 사람을 태우고 돌아가는 하인리히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쳐서 가슴을 묶었던 강철 끈이 우지끈 소리를 내면서 끊어졌다.

공주와 개구리, 반전과 반전

개구리 왕자, 이 이야기의 출발은 대체로 무난하다. 먼 옛날 어느 왕국의 예쁜 막내공주라면 옛이야기의 전형적인 주인공에 해당한다. 공주가 황금 공을 잃어버리고 개구리가 나타나서 공을 찾아주겠다고 하는 대목도 술술 넘어간다. 개구리가 사람처럼 말을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라지만 민담에서야 다반사로 있는 일이다. 개구리가 말을 못하고 그냥 ‘개굴개굴’ 소리만 냈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터이다. 문제는 공주가 황금 공을 찾은 이후의 일이다. 그 뒤로부터 무언가 앞뒤 가닥이 안 맞는 상황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공주가 개구리를 무시하고 혼자 도망하는 것도 조금 의아하고, 개구리가 다음날 끙끙대면서 궁전에 찾아오는 것도 다소 어색하다. 아버지가 딸 대신 개구리 편을 들면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라고 명령하는 것도 쉽게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맥을 짚어서 풀어낼 수가 있는 내용들이다. 거기 나름대로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왕이 말하는 대로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는 교훈 같은 것. 말을 바꾸면, ‘함부로 거짓 약속을 하면 안 된다’거나 ‘입에서 내뱉은 것은 무엇 하나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가르침 같은 것. 이렇게 보면 왕이 공주가 아닌 개구리 편을 드는 것은 엉뚱한 일이 아니라 이치에 꼭 맞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니, 그게 정석의 해석일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 대목에 있다. 공주가 개구리를 벽에 내던지자 마법이 풀려서 왕자로 변했다는 부분 말이다.

공주는 이제 정말 있는 대로 화가 났다. 개구리를 집어 들고 온 힘을 다해 냅다 벽에다 내동댕이쳤다. “이 더러운 개구리, 이젠 조용히 굴겠지.”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것은 개구리가 아니라 아름답고 다정한 눈을 가진 왕자였다.(김경연 옮김, 『그림형제 민담집』, 현암사, 2012, 33쪽)

말 그대로다. 공주가 개구리한테 한 일은 보기 싫고 화가 나서 벽에 힘껏 내팽개친 일이었다. 키스를 하거나 안아준 것도 아니고 보기 싫다고 집어던졌는데 그 일로 해서 마법이 풀려서 개구리가 왕자로 변했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증오와 배제, 또는 일방적 폭력이 마법을 푸는 열쇠였다니 말이다. 혹시 여기서 공주가 개구리를 벽에 던진 행위를 살짝 순화해서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설마 죽으라고 던진 건 아닐 거야. 무언가 예감이 있어서 그리 한 게 아닐까? 운운.’ 하지만 이런 식의 이해는 민담의 문법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원전하고도 상치된다. 위 번역에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독일어 원전은 공주가 개구리를 ‘죽으라고’ 던졌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이 ‘죽은 개구리(ein toter Frosch)가 아니라 왕자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공주의 행위에 최소한의 자비나 동정 따위는 깃들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이어진 대목 또한 뜻밖의 반전이 된다. 약속을 무시하려 한 데 그치지 않고 자기를 죽으라고 벽에 내팽개친 공주였다. 그런데 마법에서 풀린 멋진 왕자가 그 공주와 함께 잠을 자고 행복에 겨워서 자기 나라로 데려가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어떻든 공주 덕에 마법에서 풀렸으니 그리 할 만한 거라고? 아니면, 그 공주가 최고로 예뻤으니까 다 용서가 된 거라고? 그도 아니면, 공주를 자기 나라로 데려가서 잔인하게 복수하려 했던 거라고? (첫 번째 해석은 몰라도 뒤의 두 해석은 물론 완전한 넌센스다. 이러한 소설 쓰기 식 민담 해석은 허무맹랑한 일이다. 그럼에도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같은 책에서 이런 종류의 엽기적인 해석을 펼쳐놓은 것이 대중들한테 통한다는 사실에 아연할 따름이다.)

죽으라고 던졌더니 마법이 풀렸다는 것. 마법이 풀리자 자기를 죽으라고 한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 그야말로 반전에 이은 반전이다. 완전히 상식을 깨는 반전. 현실의 논리가 아닌 민담의 논리로 보더라도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 서사 전개다. 도대체 이건 무엇을 하자는 이야기인가. 왜 그림형제는 이 이야기를 자기네 첫 번째 이야기로 내세운 것인가.

이것이 이야기다!

그건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이리 생각하고 저리 헤아려 봐도 요령부득이었다. 내가 생각해 본 나름의 답이란 이런 정도였다. 공주가 개구리를 벽에다 내던지자 마법이 풀렸다. 만약 공주가 그러지 않았다면 개구리는 아마도 그대로였을 것이다. 그렇다. 아무 일도 안 벌어지는 것보다는, 아무 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하는 게 맞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저질러 보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인가 하면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공주의 그런 행동력이 마법을 푸는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다. 대략 이런 식.

어쩌면 이런 해석에 조금 더 살을 붙여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공주는 개구리가 정말로 싫었다. 싫으면서도 억지로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면 그건 구속이고 억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적 좌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딪치니 문제가 풀렸다.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는 것, 싸울 때는 싸우는 것, 그것이 막힌 상황(마법)을 풀어내는 해법일 수 있다. 충격이 있어야 깨어짐도 있다. 대략 이런 식. 써놓고 보면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해석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금 무리해서 갖다 붙인 해석이라는 느낌이다. 이러한 정도의 의미를 전하려고 그림형제가 이 이야기를 책의 첫머리에 내세웠을 거라고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너무 약하다.

쉽게 풀리지 않던 이 수수께끼를 풀어낼 힌트는 책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나왔다. 예의 「황금열쇠」 이야기. 앞에도 말했듯이 이 이야기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라는 보물상자를 여는 금빛 열쇠에 관한 이야기. 그런데 이 이야기가 「개구리 왕자」를 여는 열쇠가 됐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만!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면 첫 번째 이야기 또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 아닐까?’ 그 생각이 스치고 보니 머리가 확 밝아졌다. 보기에 「개구리 왕자」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와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이야기 어디에도 그러한 암시가 없지만, 다시 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실제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림형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알겠어? 이게 바로 이야기(Marchen)라네! 하하하.”

무슨 이야기인지 눈치 챘을지 궁금하다(만약 벌써 알아챘다면 내가 ‘선생님’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면, 이렇다. 다시 그림형제 입을 빌어서 말해 본다. “그대 알량한 지식으로 이야기를 재단하려 하지 말게. 상식을 넘어서므로 이야기인 거야. 이해가 안 되는 건 이해 안 되는 대로 두기. 그냥 있는 대로 즐기기! Laß es sein! Kein Problem! (Let it be! No problem!)” 그렇다. 지금 그림형제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도 앞뒤가 통 맞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를 썩 들이밀어 놓고서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런저런 선입견들 다 벗어버리고 알몸이 되도록 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를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야 이야기라는 푸른 바다를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법이므로.

이러한 맥락을 깨닫고 나니 이 이야기 뒤쪽에서 왜 뜬금없이 충성스런 하인리히가 수레를 몰고 튀어나와서 왕자와 공주를 태워가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왕자가 어떻게 마법에 걸렸었는지, 그때 하인이 어찌했었는지 일언반구 말도 없던 상태에서 갑자기 하인리히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이야기는 왕자와 공주가 그 뒤로 잘 살았다 어쨌다 하는 말 대신 하인리히 가슴을 묶었던 강철 끈이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로 마무리된다. 왜 이런 엉뚱한 일이 벌어지는가? 그 답은 바로, 이게 ‘이야기’라는 것. “그러니까 이야기라고! 하하하.” 그렇다. 이것이 이야기다. 생각지도 못할 모든 일이 마구 벌어지는 것이. 앞뒤가 안 맞아 보여서 더 즐겁고 충만한 것이.

이어진 이야기, 「고양이와 쥐」

그림형제 민담집에서 「개구리 왕자」의 바로 뒤를 잇는 두 번째 이야기는 「고양이와 쥐」이다. 또는 「함께 살게 된 고양이와 쥐」. 원제는 Katze und Maus in Gesellschaft다. 흔히 ‘이익사회’로 번역되는 ‘Gesellschaft’라는 말이 눈에 띈다. 이야기 내용도 거기 꼭 어울린다.

어떤 고양이 한 마리가 쥐한테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고백했다. 쥐는 그 말을 믿고 고양이와 한 집에 살게 됐다. 둘은 겨울을 날 준비로 굳기름 한 단지를 샀는데 고양이 제안대로 교회 제단 밑에 숨기기로 했다. 단지에 손을 대지 않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얼마 뒤 굳기름이 먹고 싶어졌다. 그는 사촌 누이가 아들을 낳아 대부가 되야 한다며 외출한 뒤 교회로 가서 굳기름을 핥아먹었다. 집에 돌아온 뒤 아이 이름을 묻는 쥐에게 ‘겉에낀막’이라고 대답했다. 고양이는 얼마 뒤 다시 대부 핑계로 외출해서 굳기름을 절반만큼 먹고는, 이번 아이 이름은 ‘절반만큼’이라고 둘러댔다. 얼마 뒤 다시 외출한 고양이는 굳기름을 싹 먹어치웠다. 그리고 아이 이름을 ‘깡그리 다’라고 둘러댔다.

마침내 겨울이 되어 먹을 것이 없어지자 쥐는 고양이와 함께 교회로 갔다. 하지만 굳기름 단지는 텅 비어 있었다. 그제서야 사실을 눈치 챈 쥐가, “그랬구나. 처음에 겉에낀막, 다음에 절반만큼, 그리고…” “됐어! 거기까지만!” “그리고 깡그리 다…” 그 순간 고양이는 덥석 쥐를 붙잡아서 삼켜 버렸다. 세상일이란 게 다 그런 거다.

이상이 「고양이와 쥐」의 내용이다. 「개구리 왕자」에 이어 두 번째 자리를 장식하는 이 이야기는 또 어떤가. 이야기가 주는 느낌이 어떠하며, 이야기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바는 무엇일까. (참고로 그림형제 민담집 초판에서 최종판까지 1~5번 이야기의 구성은 바뀌지 않는다.) 살펴보면 이 이야기 또한 책의 첫머리 쪽에 실리기에 무언가 마땅치 않아 보이는 면이 있다. 「개구리 왕자」는 그래도 전형적인 민담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그렇지도 않다. 발랄하고 구김 없는 환상적 상상력과 거리가 멀다. 이야기가 짧고 단순하며, 무엇보다도 느낌이 편안하거나 유쾌하지 않다. 거칠고 어두우며 씁쓸한 쪽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벽에 부닥치게 된다. 그림형제는 왜 이 이야기를 이 중요한 자리에 배치한 것일까. 수수께끼의 연속이다.

이야기에 담긴 교훈?

「고양이와 쥐」는 풍자의 요소를 내포한 우화적인 이야기다. 알레고리 형태로 세상사를 반영하고 있거니와, 그 서사적 맥락과 의미는 그리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다. 어쩌면 그 답은 이미 ‘Gesellschaft’라는 제목에 담겨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화자가 이야기 끝에서 친절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세상일이란 다 그런 거다”라고. 이 이야기가 전하는 ‘세상일’이란 거짓과 술수, 욕망과 약탈, 적자생존으로 표상되는 ‘비열한 거리’의 삶이다. 처음부터 고양이가 의도적으로 쥐를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쥐는 고양이한테 깜빡 속아서 속절없이 이용만 당한 채로 허무하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것은 사랑하는 친구라고 굳게 믿어왔던 이한테 당한 배신이라서 더욱 쓰라린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 세상의 강자와 약자를 연상시킨다. 예컨대 주인과 노예, 또는 사용자와 노동자를. 약자는 끝없이 고생하면서 일을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빈 그릇과 채찍뿐이다. 진실을 입 밖에 내는 순간, 감히 강자에게 항거하는 순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가혹한 폭력이고 죽음이다. 그렇게 무참하게 짓밟히고 속절없이 말살되는 존재…. 이런 해석이 많이 우울하므로 조금은 보편적이고 원형적인 쪽으로 해석해 보자면, 이 이야기는 존재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내 볼 수 있다. 겉으로 아무리 친한 듯 지내더라도 결국 고양이는 고양이이고 쥐는 쥐라는 것. 본성은 숨길 수 없으니 고양이와 쥐가 진정한 친구가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러니 함부로 타자나 적을 믿지 말고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 등등. 이렇게 해석하면 조금은 나아 보이지만, 이러한 교훈(?) 또한 무언가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는 마찬가지다. 자유보다 구속에 가깝고 긍정보다 부정에 가까운 그 무엇….

흔히 민담을 무한한 가능성의 이야기라고 한다. 꿈꾸는 모든 일이 맘껏 펼쳐지는 즐겁고 신나는 이야기가 민담이다. 그림형제 민담집도 그러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는 또 무어냔 말이다. 이렇게 김이 빠지는 이야기가 떡하니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말이다.

다시, 이것이 이야기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 또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다. 「개구리 왕자」에 이어 그림형제는 다시 한번 ‘이것이 이야기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림형제 입을 빌어서 말해 본다. ‘이야기가 엉뚱하고 말도 안 되는 거라고? 그래,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를 우습게 보지 말게나. 말도 안 돼 보이는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 속엔 우리네 세상사 현실이 무섭게 담기는 법이거든!’ 그렇다. 그것이 이야기다. 「고양이와 쥐」가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사를 냉정하고 정확하게 담아내면서 우리 자신을 비추어 주는 것이.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허튼 상상이 아니다. 그 속에는 세상의 진실이 담겨 있다.

「개구리 왕자」, 그리고 「고양이와 쥐」. 둘 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때, 그 색깔은 완전히 반대다. 그림형제는 먼저 앞뒤가 통 안 맞아 보이는 엉뚱한 이야기를 들이밀고서 ‘이것이 이야기다’ 하더니만 현실을 냉철하게 반영한 이야기를 내놓고서 다시 ‘이것이 이야기다’고 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림형제가 말하는 ‘이것이 이야기다’의 함의는 위 두 이야기를 연결시킬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한없이 엉뚱하고 자유로우면서도 극히 현실적일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이야기라는 말이다. 어설픈 지식으로 재단할 일도 아니고, 허탕하다고 섣불리 무시할 일도 아니다. 저 아래로부터 저 위까지, 이야기의 편폭은 한이 없다.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요컨대 그림형제는 「개구리 왕자」와 거기 이은 「고양이와 쥐」를 통해서 이야기를 위 아래로, 또는 양 옆으로 쫙 펼쳐놓고 있는 중이다. 그 사이에 어떤 이야기라도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그리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마음껏 노닐 수 있도록. 일컬어, 밀고 당기기! 그림형제가 부리는 ‘밀당’의 마법은 현란하기도 하다. 당연하다. 그들은 이야기의 고수이니까!

지금 이렇게 길게 풀어놓은 내 식의 해석이 그림형제가 던진 수수께끼의 답에 얼마나 근접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본다면 피식 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게 이야기니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이 비슷한 생각을 아예 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또한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게 이야기니까! 몰라도 저 깊은 곳에서는 어느새 알게 된다. 그게 바로 이야기다.


* 이 글에 실린 그림은 『개구리 왕자』(비네테 슈뢰더 그림, 그림 형제 글, 시공주니어, 1995), 『그림 메르헨』(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그림, 문학과지성사, 2007)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 편집부
신동흔 |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였고, 설화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건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상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구비문학 연구와 고전 재해석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한겨레 옛이야기 시리즈를 기획했으며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 『살아 있는 우리 신화』 등 펴낸 책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