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8월 통권 제1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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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서평]
조선 시대 청년의 내:일 찾기

윤나래 | 2013년 08월

어느 유명한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일(My Job)’이 없으면 ‘내일(Tomorrow)’이 없다고요. 멋진 말이지요. 그러나 모든 이가 내:일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러는 내 일을 찾지 못해서, 혹은 찾긴 찾았는데 당장 내일이 급급하여 미처 쫓아갈 수가 없어서 내:일대신 다만 내일을 사수하는데 만족해야 하는 때도 있지요.

조선 시대 후기, 서리 집안에서 태어난 ‘이자상’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평민보다는 위지만 양반보다는 아래인 중인 신분인 그에게는 양반집 자식들처럼 부지런히 경전을 공부해봐야 결국 아버지처럼 서리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이 애비처럼 서리라도 되거라’ 늘 말씀하셨지만 자상은 ‘서리라도’ 되라는 말이 언제나 야속했지요.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를 안고 있는 젊은이에게 고작 양반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며 살라는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한 말이었을 겁니다. 자상은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는 어쩔 수 없어 꾸역꾸역 경전을 읽었지만 평소에는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읽을 거리들을 찾아 읽었습니다. 당시에는 소설을 새빨간 거짓말이라, 음란한 것이라,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소설을 보는 이들은 주로 아녀자들이었지요. 하지만 자상은 그리 여기지 않았습니다. 소설이야말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생명력 있는 이야기라 생각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자상은 운종가에 나왔다가 이야기 들려주는 노인 김옹을 보게 됩니다. 김옹은 정조 임금 때 사람으로 아주 유명한 전기수입니다. 낭독 솜씨도 빼어났고 이야기를 짓는 솜씨까지 갖춘 진짜 이야기꾼이었지요. 자상은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 그의 낭독 솜씨에 푹 빠졌습니다. 이야기가 가장 흥미진진해지는 대목에서 입을 꼭 다물어 사람들이 엽전을 던지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하는 그의 요전법에도 감탄했지요. 자상은 눈이 번쩍 뜨여 김옹에게 찾아가 전기수가 되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김옹은 자상을 매정하게 내쳤지만 그날로 자상은 『심청전』을 구해 연습하며 이야기판을 따라다녔습니다. 비로소 꿈을 찾은 젊은이의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쫓겨나 옷 보따리만 달랑 들고 무작정 김옹을 다시 찾아간 자상은 김옹의 가르침 아래 전기수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에 들어갔지요.

전기수가 되려면 우선 글을 잘 읽어야 하고 목청이 좋아야 합니다. 흉내도 잘 내야하고 사람들 앞에 서려면 배짱도 두둑해야 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 길거리에서 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벌이가 일정치 않을뿐더러 글을 모르는 백성이나 집 안에만 있는 여자들에게 주로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명예를 얻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요.

처음 이야기판에 섰을 때의 무안함, 스승을 얕잡아보는 이업복에게 패하여 맛본 굴욕감, 규방으로 출장 낭독을 가느라 여장을 해야 했던 당혹스러운 순간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리가 되었더라면 겪지 않았어도 될 일들을 자상은 달게 겪었습니다. 훌륭한 전기수가 되고 싶다는 꿈은 날로 단단해졌지요. 그런데 그런 그의 꿈에 큰 장애물이 생기고 맙니다. 전기수들이 규방을 드나들며 음행을 저지른다는 말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면서 도성에 있는 모든 전기수들을 유배 보내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지요. 자기가 직접 지은 이야기를 가지고 이야기판에 서겠다는 새로운 꿈을 키우던 자상도 결국 충청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자상은 유배지에서 스승 김옹과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례로 여의고 고통과 슬픔 속에서 『임경업전』을 완성하여 다시 한양으로 올라옵니다.

다시 이야기판에 선 그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속에서 울고 웃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이야기판 한가운데에 있었지요. 안정적인 내일을 접어두고 그가 선택했던 전기수의 삶, 비단길 대신 고생길을 선택했다 할지라도 그 삶을 어리석다 할 수는 없겠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분명하던 때 거리로 뛰쳐나가 이야기판에 선 자상의 이야기를 읽으며 반드시 스스로 찾아야만 할 내:일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윤나래│ 오픈키드 컨텐츠팀. 천 번을 흔들리느라 아픈 청춘이 어른이 되는 내일이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