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5월 통권 제1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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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깊이 들여다보기]
아름다운 것을 붙잡는 방법

신수진 | 2014년 05월

몸도 마음도 천근만근 무거울 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거워지고 싶어서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러 갔다. 영화에 대해 미리 알고 간 정보라고는 감독이 웨스 앤더슨이라는 것과 우연히 트위터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고작 1, 2초 정도나 나올까 말까 한, 휙 지나가는 생일 파티 장면이었는데, 짧은 순간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나올 수 있도록 엄청난 공을 쏟았다는 걸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피곤할 때 달디 단 초콜릿이 생각나는 것처럼, 그저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대책 없이 예쁜 이야기와 그림을 섭취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영화는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의 위태롭고 불안한 아름다움이 시종 일관 화면을 채웠고, 다양한 인간 군상이 벌이는 활극은 허무맹랑했지만, 도대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긴장하며 끝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주 쉽게 ‘동화 같은 이야기’라며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인간을 포함하여)이 파괴되고 사라지고 빛을 잃는 모습을 보여주는 감독의 솜씨가 어찌나 능수능란한지 넋이 나갈 정도였다. 그렇게 쉽고 친절한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50만 명 이상이 관람해 ‘아트 버스터’라고 불릴 정도라고 한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이렇게 수준 높은 관객들이 분명히 몇 십만 명 있는데, 책은 어쩌자고 이렇게 안 팔리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또한 한 소녀 독자가 동명의 책을 읽으며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 설정인데 말이다.

이야기의 스케일이나 제작 비용 등 모든 면에서 영화와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최근 출간된 그림책 『6번길을 지켜라 뚝딱』이 떠올랐다. 웨스 앤더슨 감독이 지키고 싶었던 ‘호텔’은 자본과 파시즘의 출현과 함께 사라진 낭만과 예술이었을 것이고, 김중미 작가가 지키고 싶은 ‘6번길’은 자본과 힘의 논리에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의 살 곳이다. 웨스 앤더슨은 시종일관 ‘여러분은 이미 사라져버린 환상을 보고 계십니다’ 하는 듯 엉뚱한 유머를 구사하며 관객을 허구의 세계에 붙잡아두지만, 김중미는 ‘도깨비와 자본가의 끝나지 않는 씨름 시합’이라는 판타지적 설정에서조차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좌판을 벌이고 음식을 나누는 현실적 상황을 불러들인다.

『6번길을 지켜라 뚝딱』은 원래 인형극으로 공연되었던 것을 책으로 다시 담아낸 것이다. ‘거꾸로 도깨비’가 주인공으로 활약한 인형극은 용산 참사가 일어났던 2009년 처음 무대에 올려졌고, 여기저기서 순회공연을 하며 인기를 얻었다. 도깨비의 힘을 빌려서라도 빼앗긴 마을을 찾고 싶거나 찾아주고 싶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던 탓이기도 하다. 인형극단이 찾아가지 못하는 수많은 동네와 이 인형극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그림책’으로 다가가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작업은 2014년에 와서야 드디어 이렇게 결실을 맺었다.

인형극에 푹 빠진 작가

김중미 작가가 인형극에 푹 빠지게 된 사연은 『모여라, 유랑인형극단!』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20년 넘게 꾸려온 인천의 ‘기찻길 옆 작은 학교’ 아이들과 함께 실제로 인형극을 만들어 해마다 공연을 올리고, 2007년 춘천 아마추어 인형극제에 나가 대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동화이다.
재개발을 앞둔 ‘희망동’의 한 미술교실에 모인 아이들은 저마다 힘든 사연들이 있다. 서로 마음도 잘 맞지 않는 이 아이들을 위해 미술교실의 ‘사부’가 생각해낸 것은 인형극! 그런데, 그냥 한번 해보자는 차원이 아니라, 아마추어 인형극 경연대회에 나가자는 목표까지 세워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인형극 대본을 완성하고, ‘무지개유랑인형극단’으로 이름을 정하지만 아이들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싸우고 뛰쳐나가기를 반복한다. 크고 작은 소동 속에 학교에서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인형극단 아이들은 협업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며, 춘천인형극제에 나가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다.

하지만 작가가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열심히 해서 큰 상을 받았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부’와 아이들은 남들이 ‘몽상’이라고 할 법한 일을 벌여나간다. 시골로 이사를 하고, ‘인형학교’를 꾸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유랑극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하는 것이다. ‘아니, 이래도 돼요?’ 묻고 싶은 독자들에게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안 될 것 있나요? 저는 정말로 이렇게 살고 있는 걸요.’

조그만 옛 공부방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회화에서는 작품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압도적이어서 눈길이 가는 것도 있지만, 그림에 담긴 사연을 알고 나면 그림이 더 좋아지는 경우도 많다. 이중섭의 은지화만 봐도 그렇다. 가난하고 절실했던 화가의 마음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 은지화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은 아무래도 과정이나 사연보다는 결과를 중시해서 보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협업 결과이기도 하고, 약간 아쉽더라도 ‘마감’에 맞추어 결과를 내놓아야 할 필요도 있기 때문에 그림 하나하나의 완성도를 따지기보다는 얼마나 조화로운 책으로 완성되었는가를 보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 장 한 장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B컷들이 만들어졌는지, 얼마나 고된 수정을 거쳐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자료화한다면 책 만드는 과정만으로도 책 한 권은 너끈히 나올 그런 책들도 참 많다. 독자들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고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6번길을 지켜라』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온전히 감상하려면 『모여라, 유랑인형극단!』의 인형극 이야기에서 시작해 『너영 나영 구럼비에서 놀자』를 거쳐 오는 것이 좋다. ‘기찻길 옆 작은 학교’에서 김중미 작가와 함께 인형극을 시작했던 아이들이 자라서 ‘도르리’라는 창작집단을 꾸렸고, 그들이 처음으로 그림을 담당했던 책이 강정마을 이야기인 『너영 나영 구럼비에서 놀자』이다. 평면적 일러스트레이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6번길을 지켜라』에 이르러 이들은 인형을 만들고 무대를 세팅하고 사진까지 찍어 자신들의 세계를 구현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힘을 합치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오랜 동안 수많은 공연을 준비하며 수없이 인형을 만들었던 손길들은 그림책 작업이라는 새로운 과업도 잘 수행해냈다. 물론 시간은 걸렸지만. 사진을 찍은 유동훈 삼촌(공부방 교사)은 “작은 방에서 뚝딱 인형을 만들고, 뚝딱 동네를 만들어내는 도르리의 모습이 마치 도깨비들 같았습니다.” 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은 그럴 듯한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인천 만석동 6번길에 있는 작은 집, 옛 공부방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20년 전부터 아이들은 그곳에서 함께 노래하고 놀고 공부해왔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고 ‘도르리’라는 이름의 창작집단을 만들어 동화책과 그림책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은 공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공부방 교사가 되어 있는 청년들이다.

나는 도르리의 청년들이 열 살 남짓한 초등학생 무렵 노래 공연을 하는 모습부터 최근 훌륭한 인형극 스태프로 일하는 모습까지를 지켜볼 수 있었다. 피를 나눈 조카들이 어느새 훌쩍 자란 것을 보아도 별 감흥이 없는 무딘 인간이지만, 기찻길 옆 공부방의 청년들이 어느덧 늠름한 20대로 성장해 당당히 제몫을 하며 어린 동생들을 이끄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곤 한다. 그래서일까, 『6번길을 지켜라 뚝딱』은 김중미 작가가 처음 펴낸 그림책이라기보다 ‘도르리’ 청년들이 힘을 합친 첫 그림책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자신의 아이까지 가난하게 키울 각오를 하고’ 가난한 동네로 들어가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며 수많은 아이들을 묵묵히 지켜봐온 작가가 있다. 그리고 그 작가의 아이를 비롯해 수많은 아이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가 재개발되고 사라져 끝내 흔적이 없어져도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러기에 남들이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을 때에도 그 가치를 담은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몇 번의 계절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영화도 좋지만, 『6번길을 지켜라』처럼 소박한 그림책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지키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절박함’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신수진 |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어린이 책 편집자로 일했고, 지금은 제주로 이주해 프리랜서 편집자와 자유기고가로 살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으로 살면서, 휴식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과 글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가진 재주를 잘 쓰고 싶어 합니다. 여전히 제주 곳곳을 탐험하는 일이 좋고, 손님이 오시면 두 팔 벌려 환대하며 멋진 곳으로 함께 떠나자고 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