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통권 제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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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청소년 만화경]
끝나지 않는 이야기

윤석연 | 2014년 10월

1. 나비의 노래

고통은 개별적이며, 상대적이지 않다. 모든 고통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 고통의 개별성과 절대성일 것이다. 비교 불가의 영역, 고통의 ‘크기’라든가 상처의 ‘깊이’라든가 하는 표현은 그저 그 고통과 상처를 짐작하기 위해 동원하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크기’라든가 ‘깊이’라든가의 표현은 어떤 고통이든 세월이 흐르면 잊히기 마련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만들어내고 유포하는 조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고통의 개별성과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살아내야 할 삶의 몫이 다르고 한 사람이 써 내려가야 하는 역사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통을 뭉뚱그리고 얼버무리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고향을 등져야만 했던 어린 소녀들, 꽃다운 나이에 전쟁터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위안부 할머니들. ‘모진 고초’와 ‘평생의 고통’ 역시 개별적이며 절대적이다. ‘위안부’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는, 하나하나의 인생에 제각기 다른 ‘모진 고초’와 ‘평생의 고통’이 있다.

“황금자 할머니는 1924년 함경도에서 태어나서 13살 때 일본인에게 붙잡혀 흥남 유리공장으로 끌려갔다. 3년 뒤 만주 간도로 끌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짓밟혀가며 고초를 겪었다. 날개가 찢긴 나비!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왔지만 대인기피증으로 인해서 가슴에 멍을 진 생애를 살아야 했다. 11평(36㎡)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난방비가 아깝다며 냉골에서 지냈다. 정부의 생활지원금도 쓰지 않으면서 팔순 나이에도 빈병과 폐지를 모아 팔고 그 돈까지 모으고 모았다. 그리고 세 차례 모두 1억 원을 장학금으로 기부하였다. 서울 강서구청에.

황금자 할머니는 2014년 1월 26일 병원에서 노환으로 영면하셨다. 90년 긴긴 세월, 모질고 길었던 세월. 나비의 노래를 끝내셨다.”

2014년 1월 27일, 한 일간지에 실린 황금자 할머니에 대한 기사이다. 기사는 그녀가 날개가 찢긴 나비!로 모질고 길었던 세월을 살았고, (죽음으로써) 나비의 노래를 끝냈다고 전한다. ‘나비의 노래’, 기사의 표현대로 한다면 날개가 찢긴 나비의 노래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된 황금자 할머니의 그 노래를 들은 사람은 있기나 한 걸까?

할머니가 영면하고 며칠 뒤인 2014년 1월 30일,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 일본군 위안부를 그린 만화가 전시되었다. ‘지지 않는 꽃’이라는 주제로 19명의 만화가가 참여하였던 한국만화 기획전, 그때 전시된 작품 중 하나가 『나비의 노래』이다. 이 작품은 아직 끝나지 않은 ‘나비의 노래’를 이야기한다.

2. 지지 않는 꽃

“이 만화는 허구가 아니다.”
작품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비의 노래』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위안부’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는 개별적이고 절대적인 한 사람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지옥보다 더한 전쟁이 끝났지만 또 다른 지옥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들)의 고통. 고통의 ‘크기’라든가, 상처의 ‘깊이’라든가 하는 따위가 아닌 한 사람의 생애, 한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이야기한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인 2014년 41회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의 주제는 전쟁,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에 출품된 한국만화 기획전의 제목은 ‘지지 않는 꽃’이다. ‘지지 않는 꽃’, 한 개인의 고통을 이 만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듯하다. 지지 않는다는 건, 개별적이며 절대적인 고통은 시간이 흐른다고 잊힐 수 없음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시간이 지나는 만큼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꽃은 때가 되면 피기 마련이고 또 지기 마련이다. 흘러가지 않는 세월은 어느 순간에 멈춰 버렸거나, 세월이 흐를수록 고통의 기억들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고통의 감각이 세포분열을 하듯 더 잘게 살아난다는 걸 뜻한다. 지지 않는 꽃, 이만큼 더 잔인한 인생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나비의 노래』는 그 잔인한 인생의 눈물과 아우성을 담고 있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전시된 작품들 중 『나비의 노래』가 잔인한 인생을 담고 있다면 『도라지꽃』, 『시선』은 잔인한 인생의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눈물과 아우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권의 만화는 우리가 흔히 말해왔던 ‘평생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전달한다. 평생, 흐르는 세월을 살지 못하고 순간 순간 예상치도 못하던 기억들에 사로잡혀야 했던 고통.

3. 끝나지 않은 이야기

한 사람의 인생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낸 시대가 보이고 역사가 보인다. 그 시대와 역사라는 것도 개별적이며 절대적이다. 같은 시대, 같은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의 삶 속에서 나와 같은 시대와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일 것이다. 그 사람이 견뎌온 세월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의 개별성과 절대성을 인정하고 공감하지 않는 한 누구에게도 같은 시대 같은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안부’ 할머니의 삶에는 식민지 한국사회와 전쟁, 여성의 굴레가 보인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 보인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사실이 아닌 허구로 여기는 가해자들이 있고, 고통의 개별성과 절대성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든 그 끝에는 말하는 이가 아닌 듣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완성하는 사람은 말하는 이가 아니라 듣고 공감하는 이이다. 듣는 이를 통해 이야기는 완성되며 시대와 역사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언제쯤 끝이 나고 같은 시대, 같은 역사의 기억들로 공유할 수 있을까?

1992년부터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가 열린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장기간 지속된 시위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부끄럽게도 기네스북에 오른 기록은 장기간 지속된 시위가 아닌 22년 동안이나 끝을 맺지 못한 이야기이다.

4. 진심어린 사과!

그리고 우리는 또 부끄럽게도 끝나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고 있다. 일본대사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화문 광장에서. 수요 집회도 광화문 광장도 노란색 물결이다. 이 이야기는 언제쯤 끝을 맺을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는 곧잘 일상의 이야기로 반복되고 만다. 마치, 22년 동안 지속된 수요 집회가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늘 같은 이야기의 반복을 지겹도록 이어가는 이들을 그저 기네스북에 오를 기록 정도만큼만 경이롭게 여길 뿐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들은, “이제 그만 해도 되지 않느냐?”며, “잊을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한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과 같은 시대를 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고 애써 그 고통의 개별성과 절대성을 부인하려 든다. 흐르는 세월을 살 수 없는 이들의 나약한 의지를 탓하고, 때로는 어느 순간 멈춰버린 기억 속에 갇힌 이들의 집요함을 욕한다. 다 들었다고 생각하고,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며 슬그머니 이제 그만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한다. “그게 당신을 위해서 이로울 거야!”

그래서 가끔 나는 내가 무섭다. 나 또한, 다 들었다고 생각하는,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슬그머니 이제 그만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하는 내가 무섭다. 만약, 내가 겪고 있는 개별적이며 절대적인 고통에 누군가 귀기울여 주지 않는다면 내 이야기는 과연 끝을 맺을 수 있을까?

『나비의 노래』는 단지 ‘위안부’라는 단어로만 정의할 수 없는 한 사람의 개별적이며 절대적인 이야기이다. 끝나지 않은, 나의 이야기이며 모두의 이야기이다. 순간순간의 눈물이며, 아우성이다.
윤석연 | 세상의 많은 작은 것들을 좋아하고, 좋은 이들과 수다 떨기를 좋아합니다. 혹시 글 쓰는 걸로 이 세상 선한 일들에 보탬이 된다면 꾸역꾸역 하겠다고 맡고 나서는 사람입니다. 펴낸 어린이 책으로 『4·19혁명』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