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통권 제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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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그들과 우리들

박상육 | 2014년 12월

카인과 아벨

구약성서의 한 대목, 아담과 이브는 카인과 아벨을 낳는다. 카인은 농부, 아벨은 양치기로 자란다. 카인과 아벨은 그들의 신 야훼에게 제물을 바친다. 그런데 야훼는 카인이 바친 곡식은 받지 않고, 아벨이 바친 양만 기뻐하며 받는다. 취향 까칠하신 야훼. 신에게 선택받지 못한 카인은 질투로 눈이 멀어 동생 아벨을 죽인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다. 야훼는 카인을 벌하여 에덴의 동쪽 땅으로 쫓아낸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인과관계가 성글고 애매하다. 그래서 후대에서는 이걸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성서를 역사로 믿는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수천 년 전 신화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헛된 삽질이 또 있을까. 나아가 이야기의 행간 어딘가에 의미심장한 신의 뜻이 담겨 있을 거라는 무지막지한 믿음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신의 가르침은 간결하고 단순하다지 않던가. ‘질투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안 그러면 신한테 혼날 거야.’ 정도를 가슴에 새기고 넘어가자.

다만 여기서 눈여겨볼 건 따로 있다. 카인은 농경민(농부)이고 아벨은 유목민(양치기)이다. 카인은 정착민이고 아벨은 양치기이다. 몇몇 인류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농경민과 유목민의 갈등과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성서의 주인공들인 히브리 족이 유목민이어서 농경민(카인)을 천하의 나쁜 놈으로 묘사했을 거라나. 이 역시 먹물 냄새 나는 해석이기는 하지만 솔깃하다. 싸움판이 벌어졌다니 구경하고 볼 일이다. 유목민과 정착민은 왜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었을까?

천년 전쟁
                                 
인류는 기원전 5천 년경에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사실 농경과 유목을 판가름하는 건 절대적으로 자연의 몫이다. 황량한 사막이나 초원에서는 양떼를 몰고 다닐 수밖에 없고, 물이 풍부하고 사계절이 또렷한 평야에서는 논밭을 일구는 게 유리하다. 인간은 그저 자기가 사는 곳의 자연환경에 따라 선택될 뿐. 그런데 제각각 삶의 방식이 후대로 이어지면서 유목민과 농경민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다.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이 하나에서 열까지 서로 달랐다.

유목민 입장에서 보자면 농경민은 좀팽이 같은 족속이다. 농경민은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상을 반복한다. 자기들끼리 뭔가 복잡한 규칙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포로가 된다. 농경민은 배타적이기까지 하다. 손바닥만 한 땅과 욕심껏 채워 놓은 곡간을 지키기 위해 낯선 이를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정착민들 눈에 유목민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 주변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지 못하고 계획적이지도 않고 책임감도 없다. 계절에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느라 늘 굶주림에 시달리며 개고생을 하는 건 기본이다. 뭔가 지적 물적 자산을 축적하거나 유산으로 남기지 못하니 문명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두 세력은 틈만 나면 서로를 할퀴고 꼬집었다. 한때 아라비아와 몽골의 유목 부족이 세계를 휩쓸기도 했으나 결국 농경민의 압도적 승리. 오늘날 인류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과 과학기술로 영토를 개척해서 도시를 이루고 정착 생활을 한다. 역사는 승자의 몫으로 남는 법. 아벨은 잊혀지고, 카인은 살아남았다.

우리는 에덴의 동쪽에서 머무르며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집에서 먹고 자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회사에서 일한다. 관습과 법과 관계로 단단하게 짜인 체제는 어지간한 충격에도 끄떡 없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 덕분에 우리는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사회가 마련해 준 요람 안에서 하루하루를 안정적으로 살아간다, 대체로.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들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아벨의 후예들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며 잠시 아량을 베풀어 보자. 아벨의 후예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한줌 남은 유목민들은 기술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사막과 초원의 변두리에서 힘겹게 삶을 연명하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몇몇 무리들은 이 정착 문명의 틈바구니에 스며들어 있다. 과거 어느 날 그들의 거처가 농경지로 개간되었거나 두 세력 간의 싸움에 져서 전쟁 포로로 끌려왔을 거다.

그들은 평소 멀쩡하게 정착민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어쩌면 자신이 유목민의 후예라는 걸 모르고 지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떤 계기가 유전자 속 깊은 기억을 건드리면 그들은 유목 전사로 변신한다. 그들은 두 말 없이 자취를 감춘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흩어질 뿐.

아, 그들을 일반 여행자와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아 달라. 여행자들은 자신과 타자 사이에 경계가 또렷하다. 몇몇 여행자들은 여느 관광 루트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사막과 초원을 거닐기도 한다. 또 낯선 풍경과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잠시 마음을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정착지로 돌아와 안도한다. 여행자들은 그저 세련된 정착민들일 뿐이다.

아벨의 후예는 그러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 공간에서건 가장 쓸쓸하고 외로운 냄새를 귀신같이 찾아낸다.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 옆 낮은 집과 시장 모퉁이 아무도 찾지 않는 사진관과 공원 안 사육사도 안 보이는 동물원과 퇴락한 소도시의 삐걱거리는 이층집과 화려한 도시의 뒤편 하수구 냄새 가득한 골목…. 그곳에 그들은 여장을 풀고 철저히 홀로 머문다. 그 순간 그를 둘러싼 공간은 신기루처럼 희미해진다. 존재도 경계도 사라진 절대 고독!

그들은 태생적으로 정착 문명의 부스러기 루저들에게 연민의 눈길을 보내지만, 그렇다고 뭔가 개입할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다. 다만 창문 밖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더 낯설어지는 순간을 담담히 받아들일 뿐. 그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아니다. 이제 와서 봉인된 아벨의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는 게 무슨 소용이랴. 죽은 아이 거시기 만지는 꼴이다. 패자의 질투와 푸념에 일일이 시늉하느니, 아벨의 방식대로 정착 문명의 수레바퀴를 굴리면 될 일이다. 단, 승자의 패기를 만끽하려면 단서조항이 하나 붙는다. 그대는 정말 카인의 후예인가? 어느 순간 그대의 유전자 속 아벨이 눈뜨면 참으로 낭패스럽지 않겠는가? 만일을 대비해서 예방접종이 필요하다. 밑져야 본전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델 문도』 속 아벨의 후예들을 만나 보자.
박상육 | 오랫동안 어린이 책 관련한 일과 글 쓰는 일을 했고 지금은 『한겨레신문』 출판부에 있습니다. 늘 어디론가 떠나 은둔하고 싶어하나 여기 머물고 있는, 늘 무언가 욕망하나 성취와는 거리가 먼, 마음 방랑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