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통권 제1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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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밑줄 긋는 시간]
나는 네가 아니지만

송미경 | 2015년 10월

다른 누군가와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요.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그 사람 마음을 다 알 수 없고 그 사람 역시 그럴 거예요. 그러니 차라리 우린 아주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불통을 각오하는 게 나을까요? 그래서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도움이 조금 필요하다고 인정해 버리면 차리리 조금 나을지도 모릅니다.

『어두운 계단에서 도깨비가』엔 다섯 편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나는 『내 동생 싸게 팔아요』 작품으로 임정자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 책을 소리 내어 읽고 또 읽는 바람에 거의 외워 버릴 정도가 되었지요. 아이들은 좋은 책을 만나면 자꾸 소리 내어 반복해 읽으려고 했습니다. 저 역시 새로운 책을 또 읽는 것보다 좋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반복해서 책을 읽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계단에서 도깨비가』의 다채로운 다섯 편 이야기를 읽고 나서 나는 세계와 가족과 이웃과 자연과 친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소통을 향해 발을 내딛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낙지가 보낸 선물」은 엄마에게 자주 맞는 남수가 나옵니다. 남수는 전골냄비 속의 산낙지를 구해 주려다가 빨판이 달린 신발을 선물 받습니다. 엄마가 혼을 내려고 달려올 때마다 빨판 신발을 신은 남수는 손이 닿지 않을 높은 곳으로 도망가 버리죠. 남수는 냄비에 갇힌 낙지의 처지를 불쌍히 여깁니다. 얼마나 뜨거울지 얼마나 무섭고 갑갑할지 느끼는 거죠. 엄마가 이해해 주지 않아도 남수는 여전히 살아 있고 통각을 느끼는 건강한 존재로 살고 있는 겁니다. 다른 존재의 아픔을 내 몸의 아픔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높은 소통의 경지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은 삶에서 아픔을 겪어본 자들만이 갖는 능력일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빨판 운동화는 남수가 엄마라는 권력에 잠식당하지 않고 버텨낸 순수한 삶의 응답일지 모릅니다.

「꽁꽁별에서 온 어머니」는 엄마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담은이의 이야기입니다. 담은이는 엄마가 어린 시절 기억을 잊고 사는 외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구인 엄마와도 대화가 힘든데 엄마가 외계인이었으니 오죽했겠어요. 그러나 담은이는 불통의 세계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엄마가 듣는 대로 사는 것이 어쩌면 더 편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상대가 무엇이라고 알아듣는지 보다 내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거죠. 그런 끈기가 결국엔 어린 시절을 까맣게 잊고 사는 엄마까지 구원한 셈입니다. 물론 문제 하나가 해결된다고 완전한 소통의 장이 열리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 끈기와 고집이라면 결국 또 뭔가를 스스로 이뤄낼 게 분명하죠.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소통은 듣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욕구를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간혹 너무 힘들면 해야 할 말을 그냥 목구멍으로 삼켜 버리기도 하거든요.

「어두운 계단에서 도깨비가」의 주인공 수민이는 층간 소음 문제로 혼이 난 뒤 기운 없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다가 도깨비 친구들을 만납니다. 하는 일이라곤 뛰놀거나 웃거나 쿵쿵대는 게 전부인 도깨비들이죠. 뛰기는커녕 조심조심 걷는 것도 통제받는 25층짜리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갑갑하기만 했습니다. 수민이는 자신과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존재들을 금방 눈치챕니다. 그래서 조금 전까지 신 나게 놀다가 계단이며 벽으로 감쪽같이 숨어 버린 도깨비들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겠죠. 생긴 것도 말하는 방식도 살아온 방식도 완전히 다른 도깨비들과 수민이는 놀고 이야기 나누고 사탕을 나눠 먹으며 소통을 체험합니다. 때론 그냥 대책 없이 몸 놀이를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깊이 대화하는 일일 때가 있죠.

「이빨귀신을 이긴 연이」에서 연이는 비오는 날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엄마들 틈에서 혼자 우산 없이 걷다가 웅덩이를 발견하게 되고 물웅덩이에 쑥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빨귀신에게 잡혀간 뿌뿌의 엄마를 구하러 길을 떠나죠. 연이는 곰치 할머니와 거북 할아버지, 청복 동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빨귀신을 물리쳐요. 소통할 대상이 부재한 연이는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싶지만 엄마는 늘 일을 하러 가야 하나 봅니다.

물웅덩이를 들여다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산 없고 쓸쓸히 혼자 서 있는 모습을 용감하게 들여다본 연이는 새로운 세계에서 물도깨비 뿌뿌를 만납니다. 이빨귀신이 엄마를 잡아 갔다고 울고 있는 뿌뿌를 보고 연이는 뿌뿌와 함께 뿌뿌의 엄마를 구하러 떠날 결심을 합니다. 연이와 뿌뿌는 심심해하는 곰치 할머니에겐 이야기를 들려주고 불면증인 거북 할아버지에겐 자장가를 불러 주고 돌탑을 쌓다가 청복 동자를 만나며 엄마를 구할 힘을 얻습니다. 무조건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진 걸 나눠 주고 마음을 움직여 가는 소통의 방식으로요. 또한 자신이 받고 싶었던 보살핌을 이웃과 친구에게 베풀고 그들을 통해 관심을 받는 해결 방식은 건강합니다. 우리의 구멍 난 욕구를 반드시 한 대상에게서만 채우려 들 필요는 없습니다. 소통의 갈망은 원하던 대상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혹은 세계를 통해 채워질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흰곰인형」은 출근길에 버려진 흰곰인형을 도서관으로 데리고 간 사서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곰은 도서관에 온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지만 온몸이 낡고 해지게 되지요. 그리고 마침 인형극을 준비하며 토끼인형을 만들어야 하던 사서 선생님께 자신을 토끼인형 재료로 써달라고 부탁해요. 받은 사랑을 그대로 누리려고만 하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곰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내어 주는 소통의 방식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다섯 편의 이야기를 읽은 뒤 나는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가 반드시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결핍이 있다는 것은 채워나갈 이야기들이 그만큼 도처에 깔려 있다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저는 가장 외롭고 쓸쓸한 시기, 세계와도 사람과도 소통되지 않던 시기, 심지어 나 자신과도 대화할 수 없는 절망의 시기에 작품을 써내려가곤 했습니다. 외로움이 클수록 절망이 깊을수록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수록 나는 더 끈질기게 소통하고자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엔 자력이 있어서 반드시 외로운 자가 외로운 자를 알아보고 소통하게 되고, 약한 자는 약한 자를 알아보고 위로하게 되며, 상처받은 자는 상처받은 자를 알아보고 서로 끌어안게 된다고요. 불통이라는 결핍은 그렇게 강한 자력을 형성해서 결국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진실되고 끈질기며 건강할 경우에는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불통의 문제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져준 이 책 안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면 바로 타인의 통각을 내 통각으로 느끼는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봅니다. 분명 이 세계 어딘가에서 내 외로움을 느끼는 타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견딜 만해지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요. 언젠가는 내 모든 이야기를 이해해줄, 내 모든 삶을 용서해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또한 난관에 부딪치게 될지라도 진정한 소통을 향해 내 존재를 던지는 체험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한 번의 만족스러운 소통만으로 우리의 인생 전체가 갑자기 전복될 순 없지만 완전한 소통을 경험한 존재는 반드시 또 그것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가 무엇인지 알면 가짜는 시시해서 견딜 수 없어지는 거니까요.

세계는 이렇게 단 한 번의 진정한 소통 때문에 변화될 거예요. 한 번은 반드시 두 번이나 세 번이 되고 결국 그것은 우리의 삶이 될 테니까요. 그러니 우린 전체를 바꾸기 위해 피곤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지금 한 걸음씩 내딛는 한 번의 경험들이 우리 삶과 세계의 서사를 뒤흔드는 사건의 발단일 테니까요. 이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불통에서부터 출발하는 걸로 해둡니다. 어쩐지 오랜만에 희망이 생기네요.
송미경 | 2008년 웅진주니어 문학상을 받으며 동화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일기 먹는 일기장』 『복수의 여신』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광인 수술 보고서』 『돌 씹어 먹는 아이』 『바느질 소녀』가 있고 『어떤 아이가』로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세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