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통권 제157호
속 깊은 책 이야기
책 너머 세상 읽기
더불어 책 읽기
열린어린이 선정 이달의 좋은 책
열린어린이 서평
겨울 방학 권장 도서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책 세상 나들이

[과학 세상 이야기]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과학 기술

김연희 | 2015년 12월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만신창이였습니다. 광복 이전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전쟁터와 강제 노역장으로 끌려갔지요. 일본이 그렇게 생색내며 세웠던 많은 산업 시설은 부서졌어요. 심지어 일본 사람들은 단 한 대의 기차도 남겨 놓지 않았고 발전소나 공장 기계 주요 부품들은 모두 빼 가거나 기계들을 부수었지요. 제대로 된 기계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25전쟁이 터졌어요. 이 전쟁으로 한국에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휴전 후 폐허에서 한국은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힘든 작업들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해방 후 재기를 위한 움직임

해방 직후 남한은 연구기관으로 중앙공업연구소(1946년), 중앙지질광산연구소(1946년), 중앙농업시험장(1945년), 중앙관상대(1945년)를 설립했어요. 물론 일제 강점기의 연구소들을 개편한 것에 불과했지요. 이들 연구소에는 장비도 기술도 연구 인력도 거의 없었지요.

휴전 후인 1954년 한국 정부는 국방부과학연구소를 설립했어요. 국방부과학연구소는 외국에서 군사 원조로 제공되는 지원을 바탕으로 다른 연구기관보다 월등히 우수한 시설과 실험 기기들을 갖출 수 있었어요. 그리고 우수한 이공계 대학 졸업자를 연구 요원으로 선발했지요. 이 연구자들에게 국방의 의무도 면제시켜주는 등 특별한 혜택도 주었어요. 이 연구소는 능력 있는 과학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여러 연구 훈련 프로그램도 마련하였어요. 이런 기구들과 인력으로 이 연구소는 탄약류와 병기, 군수용 금속 재료 및 화학 병기, 비금속 재료 및 군용 식품의 연구, 조사, 시험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또 물리, 화학, 식품, 기계, 금속, 전기 등 기초적인 과학과 공업에 관한 연구도 수행했지요. 1950년대 말에는 무기를 개량하는 일도 담당할 수 있을 정도로 진전을 보였어요.

다른 연구소들은 인력이나 실험 기자재와 기구를 확보하지 못해 연구소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어요. 중앙지질광물조사소(국립지질자원연구소의 전신)가 그나마 1956년 지질 광상조사보고서를 발간하는 결과를 냈지요. 이 연구소는 이를 계기로 지질 계통도 검토했어요. 이런 활동에 힘입어 1961년 강원도 지역의 석탄층을 발굴할 수 있었고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석탄 산업과 시멘트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어요.

현대 과학 기술 연구 기반의 확보

해방 후 연구 활동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지지부진했지요. 이런 한국 과학 기술계에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어요. 바로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었던 것이지요. 원자력연구소 설립은 국제 사회에서 원자력 활용과 관련한 국제기구 설립이 활발해졌던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원자탄을 만들었고 전쟁 중에 원자탄 투하를 경험했던 미국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목표로 하는 세계원자력기구를 1956년에 설립했어요. 이런 미국의 움직임에 맞서 소련(러시아를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 역시 국제기구를 만들어 세력을 넓히려 했지요. 두 나라는 그들 나라와 사이가 좋거나 협약을 잘 지키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는 나라를 경쟁적으로 자신의 기구에 가입시켰어요. 이런 미국과 소련의 원자력을 둘러싼 경쟁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원자력기구에 가입했고 협정에 따라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과의 협정에 따라 한국은 실험용 원자로 구입비를 미국에서 지원받게 되었어요. 미국 지원비만으로는 연구소를 만들 수 없었기에 국내 자본 3억 환도 투자되었지요. 그리고 이 연구소를 관리할 정부기관인 원자력원도 만들었어요. 드디어 1959년에 원자력연구소가 문을 열고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47명의 연구원이 이 연구소에서 활동했습니다.

원자력연구소가 한국 과학 기술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아요. 먼저 과학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는 이 연구소에서 활동할 연구원을 양성하기 위해 1956년 4월부터 연구생들을 지속적으로 유학 보냈던 거지요. 그 결과 1963년에 이르면 유학생의 수는 189명에 이르게 되었고 이들은 주로 물리학, 화학 분야를 미국에서 공부했고, 이 중 125명이 정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당시 한국의 전체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국민의 세금으로 유학을 보낸다는 일 자체가 매우 특별한 혜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유학생들 가운데에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연구자들이 적지 않았어요. 원자력연구소가 이들을 모두 연구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요. 그들 가운데에는 다른 분야의 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외국으로 떠나거나 아예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또 귀국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원자력 분야가 아닌, 대학이나 다른 곳에서 연구하는 일도 생겨났어요. 이는 원자력연구소를 위해 양성한 연구자들이 한국 과학 기술 전반의 연구자로 활동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원자력연구소가 미친 영향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인 겁니다. 과학 기술 진흥 운동이 일어난 계기가 되었지요. 신문들은 선진 각국의 원자력 정책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가져올 기술 혁신에 관련된 기사를 경쟁적으로 싣기 시작했지요. 정부도 미국 정부가 제공한 사진과 모형으로 최초의 원자력 평화 이용에 관한 전시회를 1956년 9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에서 개최했어요. 이 전시회는 주로 원자력이 의료에 이용되고 생물학과 농학 연구에 도움을 주는 등 농공업에도 널리 응용되어 인류 복지에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내용을 중심으로 했어요. 원자탄이나 원자력의 이용에 따른 위험성은 완전히 제외했지요. 비록 한쪽에 치우친 내용이기는 했지만 이 전시회는 많은 사람이 관람해 원자력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에 기여했어요.

원자력연구소에 의해 과학 기술의 관심이 높아진 결과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설립 배경이 되었어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흔히 키스트라고 부르는데요, 이 연구원은 1965년 베트남전에 우리 군인들을 파견하는 협정의 대가로 세워졌어요. 이 연구소는 고체물리연구실, 조선 및 해양연구실, 식량자원연구실, 응용미생물연구실을 포함해 11개의 부속 연구실을 갖추었어요. 설립 초기 이 연구소는 매우 특별한 조건을 내세워 해외의 한국 과학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연구원들에게 집은 물론 매우 높은 수준의 월급을 약속한 것이지요. 외국에 있던 많은 한국 과학자들이 돌아왔고, 그들은 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산업체가 요구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였습니다.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과학 기술 교육의 본격적 시작

원자력연구소와 정부기구인 원자력원이 문을 열기 전후해 문교부(지금의 교육부)는 해마다 전국 과학전을 열어 초・중등학교의 과학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려 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과학 기술을 담당할 연구원들을 키워내기 위해 필수적인 전문 과학 전공 교수들이 매우 적었기 때문입니다. 석사 박사 인력이 10명 정도밖에 없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어요. 전쟁과 분단으로 말이지요.

당시 대학교의 과학 기술 담당 교수들은 대부분 대학교만 졸업했어요. 그들의 실력은 좋지 않았지요.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들의 실력을 개선시켜야 했지요. 이를 위해 대학교수를 재교육시키는 작업이 추진되었어요. 많은 교수가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대부분 1, 2년의 과정을 마치고 1959년경 귀국했고, 대학 교육의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어요. 실험실도 제대로 갖추게 되었고요. 특히 공학, 의학 및 농학 분야의 교육이 활성화하기 시작했지요.

이처럼 대한민국은 40년간의 식민지, 전쟁, 분단으로 아무것도 없던 해방 이후 한국의 과학 기술 풍토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연구 인력을 새로 양성했고, 과학 기술을 위한 새로운 연구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연구들은 대부분 경제 개발과 성장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과학을 통해 강하고 부유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여겼고, 과학이 기술과 한 분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과학 기술에 관한 생각들이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은 특히 과학을 자연의 원리 탐구 분야로 생각하지 않는 나라 가운데 하나로 평가됩니다. 또 이런 환경이 노벨상 수상과 거리를 멀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본문에 사용한 사진들은 문화재청 공공누리 자료를 사용하였습니다.
김연희 | 서울대학교에서 한국과학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서울대학교 연구교수로 있습니다. 한국 역사 속에서의 자연 이해와 자연 이용 기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서양 과학과 우리 전통 과학이 만났을 때의 이해 방식에 관해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창덕궁에서 만나는 우리 과학』과 『강은 어떻게 흘러가나』 『고종 시대의 과학 이야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