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2월 통권 제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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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짚는 책]
사관과 사초

김현영 | 2016년 02월

실록을 편찬하는 기초 자료인 사초, 즉 시정기 가장사초를 작성하는 사람들을 사관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이 사관에 임명되고 사관은 어떤 일들을 하는가? 얼마 전에 퇴임한 대통령이 국정 기록을 집에 가지고 가서 논란이 된 사초 논쟁도 사초의 개념을 넓게 해석한 데서 나온 잘못이다. 요즈음에도 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면 국정 기록들을 정리하여 국가기록원에 보관한다. 넓은 의미에서 그러한 국정 기록 자료들을 사초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그러한 자료들은 역사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될 수는 있지만 사초라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에는 조선 시대 사초와 같은 성격의 자료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일상적인 지시나 행위를 기록한 것이라든가 국무회의 기록, 국회의 속기록 등이 모두 넓은 의미의 사초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신문의 사설 같은 것이 조선 시대 사관의 사평(史評)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사관은 예문관(藝文館)의 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 등 8명의 전임사관을 가리킨다. 사관들은 정7품, 정8품, 정9품에 해당하는 하급 관직이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거 시험인 문과를 합격한 엘리트 관료들 중에서도 글씨를 잘 쓰고 똑똑한 인재들을 골라 뽑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사관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사관은 문과에 합격한 사람 중에 다시 사관에 추천되는 것을 말하는 한림천(翰林薦)을 거치고 역사서와 글씨에 대한 테스트를 거쳐서 임명되었다. 검열이나 대교, 봉교를 거친 인물들은 국왕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의 주서(注書) 또는 홍문관의 수찬(修撰) 등으로 승진하였다. 이러한 청요직, 즉 중요한 직책을 거친 인물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는 한 높은 관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예를 들면 관원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전랑(銓郞)을 거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여섯 판서를 말하는 삼공육경(三公六卿)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는 것이다.

조선 왕조 오백 년 동안 사관의 지위와 위상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기본 임무는 변함없었다. 사관이 쓰는 사초는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국왕이나 권세 있는 권력자에 대해서도 잘못을 짚어 사평으로 기록함으로써 역사적 판단을 하도록 하였다. 그로써 권력자들이 역사를 두려워하게 하는 징계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로 인해서 국왕이나 권력자들은 자신과 관련된 내용을 사관들이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살피기 위해 사초를 보고 싶어 하고 이를 고치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안전장치로 사평을 쓴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또 실록을 편찬한 후에는 그 사초들을 씻어내는 세초를 하게 하였다. 조선 전기 사림파들이 피나는 투쟁을 거쳐 쟁취한 것이 바로 그러한 사초 무기명 원칙과 세초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관들이 쓴 가장사초 중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인조대 정태제라는 인물이 쓴 사초와 영조대 윤동승의 한간비초(汗簡秘草), 김몽화의 비사(秘史)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사초의 특징은 가장사초로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자신의 사평을 더한 것이다. 정태제의 사초는 얼마 전에 정태제의 무덤을 이장하다가 무덤 속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극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영조대의 두 가장사초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사초가 남아 있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무기명이나 세초를 원칙으로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예외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실록청이 개설된 후 원본을 제출하고 또 한 벌을 더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겠다.

이 중에서 정태제의 사초는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 국왕인 인조가 청 황제에게 항복을 하고 청나라의 연호를 쓰게 되면서 그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무덤에 함께 묻지 않았나 생각된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어서 청나라에 항복을 하고

청의 연호인 ‘숭덕(崇德)’을 쓰도록 강제를 받았지만, 청나라 오랑캐를 반대하는 척화파들 대부분은 여전히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정태제의 사초가 무덤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여겨지는 것은 정태제가 인조에 의하여 비명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의 손윗동서였다는 점이다. 만주의 인질 생활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와 강빈은 부왕인 인조에 의하여 철저히 제거된 것이다. 정태제 자신은 그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것도 정태제의 글들을 무덤 속에 가지고 가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관은 가장사초에서 각 기사를 정리하여 쓰고 그 기사 뒤에 한 단 내려서 자신의 견해를 사평이라는 형식에 담아 서술한다. ‘사관왈’ ‘사신왈’이라고 하여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다. 사평은 대개 국왕의 인사에 대한 그 사람의 인물평이 중심을 이룬다. 인물평은 그 사람에 대한 칭찬보다는 비판이 많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평가는 매우 주관적이어서 비판을 당하는 당사자들이 수긍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가혹하고 자기 당파의 사람에 대해서는 후한 평가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선조실록』과 『현종실록』 『경종실록』은 기존의 실록을 두고 다시 수정 실록으로 보완하기도 하였다.

실록청이 개설되어 시정기와 가장사초를 모아서 실록을 편찬할 때에 가장사초에 수록된 여러 사관들의 사평은 어느 정도 채택이 되고 실록에 수록될까 궁금하다. 남인에 속하였던 김몽화가 쓴 가장사초 비사에는 40일 분에 지나지 않는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20건이나 되는 사평을 서술하였다.『영조실록』과 비사를 비교해 보면 김몽화의 사평 20건 중 『영조실록』에 수록된 것은 단 4건에 불과하였다. 사평 채택율이 20%에 불과한 것이다. 『영조실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정조 초년에 설치된 실록청은 정조 초년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여 노론, 소론과 남인 정치인들이 두루 참여하였지만 남인인 김몽화의 사평 채택율이 높은지 낮은지는 잘 알 수 없다.

조선 시대의 사관은 국왕의 일상을 기록함으로써 국왕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사평을 통하여 어떤 일에 대한 비판을 함으로써 뒷날의 역사적 평가를 기다렸다. 봉건적 조선 왕조에서도 사관과 역사 기록의 중요성은 강조되고 그것이 지켜져 왔다. 민주 사회인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러한 정신을 살려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도 소통과 화합이 강조되는 것은 그만큼 국민들 사이의 의견에 분열이 있고 상하의 의사 전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 본문에 사용한 사진들은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와 『조선왕조실록』 그림을 사용하였습니다.
김현영 | 1955년에 태어났습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정보화실장으로 일하면서 조선 시대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논문으로는 「조선 시대 문서와 기록의 위상 : 사초와 시정기에 대한 재검토」가 있고, 지은 책으로는 『조선 시대의 양반과 향촌 사회』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 시대 사회사』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