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2월 통권 제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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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그림책 만나며]
내일 또 올 거예요
――나만의 그림책 곳간을 열며

김봄희 | 2016년 02월


도서관에서 생활하다보면 주뼛주뼛 문을 열고 들어와 겨우 인사만 건네고 엉거주춤 서 있는 아이들을 종종 만난다. 이 아이들이 도서관 문을 처음 열고 들어오기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으리라. 물론 성격이 쾌활하고 어디에서나 잘 적응하는 아이라면 그 문 하나 열고 들어오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많다. 문 밖에서 심호흡 몇 번 하고, 열까지 세고, ‘할 수 있어’ 주문까지 외고 나서야 첫 발을 떼었을 것이다.

처음 도서관을 찾은 아이들과 먼저 간단히 서로 통성명을 한다. 그리고 도서관 소개를 한 다음 한 바퀴 돌며 책 배치 설명을 하고 나면 5분 남짓 걸린다. 큰 도서관이라면 한나절이라도 걸리겠지만 내가 일하는 도서관은 30평 남짓한 동네 작은도서관이다. 이 공간에선 아이들의 움직임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그러다보니 서로 교감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두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한두 번 보고 말 사이가 아니라면. 나는 먼저 아이가 뭘 원하는지 파악하려고 애쓴다.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나와 또 다른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지. 빠르게 5초쯤 판단 시간을 갖고 다음을 준비한다.

일반적으로 고학년 남자아이라면 사서와 눈 맞추고 얘기하는 것을 크게 부담스러워 한다. ‘조용히 혼자 책 보다 가게 해 주세요 제발!’ 이런 시선을 보내기 일쑤다. 저학년 아이들은 대부분 먼저 손 내밀고 챙겨주기를 원한다. ‘심심해요, 함께 놀아주세요.’ 이 아이들의 눈빛을 무시한다면 도서관 문 앞의 서성거림은 좀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아니 다시는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때 ‘이곳은 재미있는 곳이야’ 라는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는 강력한 카드가 필요하다. 그건 바로 재밌는 책 읽어주기! ‘이렇게 재밌는 책이 우리 도서관엔 얼마든지 있단다.’ 이런 일을 대비해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나만의 그림책 곳간’ 하나를 머릿속에 만들어 놓고 차곡차곡 그림책을 쌓아 놨다. 그 곳간에는 도서관에 자주 오는 아이들에게 세 번 이상 읽어 줬는데도 재밌다고 또 읽어 달라 하는 책! 몇 번 읽어 준 책인데도 처음 본 듯 깔깔대는 책! 책 속에 나오는 말을 따라하며 다시 한 번 공감하는 책들이 쌓여 있다.

내 곳간에 쌓인 그림책 중 보물 1호가 바로 권문희 선생님이 쓰고 그린 『깜박깜박 도깨비』다. 결코 밉지 않은 까먹기 대장! 그 이야기 속으로 폭 빠져들다 보면 낯선 공간의 어색함 같은 것은 깜박 까먹고 도서관 속으로 한 발짝 발을 들여놓게 된다. 『깜박깜박 도깨비』는 표지부터 재밌다.

“선생님, 얘가 도깨비 맞죠?” “그걸 어떻게 알았어?” “발이 없잖아요.” 도서관에 자주 온 익숙한 아이들과는 이런 대화가 오갈 테지만 첫 만남의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하지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표지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다는 걸. 그럴 땐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어갈 필요가 없다. 표지를 충분히 살펴볼 짬을 준 다음 넘어가도 늦지 않다.

속표지로 넘어가니 구부정하게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느릿느릿 걷고 있는 아이가 나온다. 표지의 밝은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바로 혼자 사는 아이의 외로운 모습이 보인다. 이 집 저 집 일을 거들어 주고 한 푼 두 푼 받아서 겨우겨우 먹고 사는 아이. 이 아이가 어둑해질 때까지 일을 하고 돈 서 푼을 받아 집으로 가는데 글쎄, 발 없는 도깨비와 딱 마주친다. “얘, 나 돈 서 푼만 꿔 줘.” “꼭 갚아야 돼.” “내일 꼭 갚을게.” 주인공 아이는 도깨비가 미심쩍기만 하다. ‘도깨비는 뭐든지 잘 까먹는다는데 돈 갚는 걸 까먹으면 어떻게 해?’ 하며.


그런데 다음 날 저녁 다행히도 도깨비가 돈 서 푼을 갖고 와 갚는다. 책 속 주인공도 책을 보는 아이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휴, 다행이다. 까먹지 않아서.’ 그렇게 다음 장으로 넘겼는데 글씨가 빼곡한 장면이 나온다. 글씨지만 그림 같기도 하고 만화 같기도 한 장면이다. 이런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책을 읽어 주기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어제 꾼 돈 서 푼 갚으러 왔다.” “어제 갚았잖아.” “어라 얘 좀 봐? 어제 꿨는데 어떻게 어제 갚아?”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날도….

조금씩 큭큭 대던 아이들이 한 페이지를 다 읽어 줄 무렵엔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한다. ‘와 좋겠다’는 부러움이 쏟아지고 금방이라도 그런 도깨비를 만나러 갈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인다.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아이들의 들썩임은 환호로 변해간다. 그도 그럴 것이 돈 갚으러 온 도깨비가 아이 집에 있는 찌그러진 냄비를 보고 새 냄비를 줬는데 그 냄비가 바로 맛있는 게 척척 나오는 요술 냄비였던 것이다. 또, 닳아빠진 다듬잇방망이를 보더니 새 방망이를 챙겨오는데 그 방망이는 바로 무엇이든 뚝딱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다. 새로운 게 나올 때마다 주고받는 말이 점점 길어진다. 주고받는 말 속에 섞여 있는 아이와 도깨비 그림도 인상적이다. 실루엣처럼 까만 면만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속에 황당해 하는 아이의 표정과 활짝 웃는 도깨비 표정이 모두 담겨 있다.

마지막 장면 또한 압권이다. 혼자 살던 외로운 아이는 도깨비 덕분에 좋은 옷 입고 잘 살게 됐는데 정작 도깨비는 울고 있다. 자기 집 살림이 바닥이 났는데 그게 모두 자기가 헤프게 썼기 때문이라고 하늘나라에 가서 벌을 받게 됐다며 눈물 콧물 범벅이 돼서 말이다. “너한테 꾼 돈 못 갚아서 미안해. 냄비랑 방망이도 못 갖다 줘서 미안해. 벌 다 받고 오면 꼭 갚을게. 흑흑”

여기까지 읽어 주면 아이들은 도깨비가 사랑스러워 못 견딘다. 날마다 뭔가를 갖다 주며 좋아했던 도깨비 얼굴과 더 이상 줄 수 없어 슬퍼하는 도깨비 얼굴이 머리 위로 둥둥 떠다니는 냥. 처음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의 경직된 표정은 차츰 사라지고 자기 이야기가 마구 쏟아져 나올 때도 있다. 재미난 그림책 한 권이 낯선 곳에서 긴장됐던 마음을 풀어 주고 좋은 관계를 맺어 주는 다리 역할을 한 셈이다.

하지만 책 한 권으로는 부족하다. 그럴 때 곳간 속에서 또 한 권 책을 꺼내와 확실한 승부를 건다. 박재철 선생님이 쓰고 그린 『팥이 영감과 우르르 산토끼』는 주인공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책이다. 입도 눈도 우락부락한 팥이 영감은 그 얼굴만 봐도 절로 크고 굵은 목소리가 나온다. “이놈들~” 하고 말이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팥이 영감네 팥을 배불리 따 먹는 입 큰 산토끼들과 그들을 붙잡으려는 팥이 영감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한 손엔 호미를 들고 우락부락한 표정을 지으며 토끼들을 잡으려 하지만 얼마나 날쌔고 개구진 산토끼들인가. 잡힐 기미는 보이지 않고 팥이 영감만 꽈당 넘어지고 만다. 여기까지 보면 토끼들이 참 얄밉기도 하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팥이 영감이 눈에다 곶감 박고 코에다가 대추 꽂고 귀에다가 밤 꽂고 입에다가 홍시 물고 얼굴에는 까맣게 숯칠을 한 다음 팥밭에 벌렁 누워서 꼼짝도 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습을 본 토끼들이 슬퍼하며 한 마디씩 한다. 팥이 영감이 죽었다. 어찌어찌 죽었나? 눈알이 터져서 죽었다. 코피가 나서 죽었다. 귀가 막혀 죽었다. 불에 타서 죽었다. 그림을 보던 아이들이 빵빵 터진다. 그렇게 깔깔댈 수가 없다. 그 무섭게 보이던 팥이 영감이 이것저것 꽂고 대자로 누워 있는 그림도 재밌고, 토끼들의 대화도 재밌는 웃음 포인트다.

이제부턴 팥이 영감의 반격 차례다. 토끼들이 슬퍼하고 있는 틈을 노려 결국 모든 토끼들을 생포하고 의기양양 집으로 돌아가는 팥이 영감. 집에 있는 가축들의 표정이 압권이다. 잡힌 토끼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돼지도 닭도 병아리도 헤벌쭉 웃고 있다. 그렇게 잡아와 봤자 어차피 팥이 영감이 또 당하고 말걸 하는 표정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토끼들의 꾀에 속아 넘어간 팥이 영감은 결국 토끼들을 모두 놓치고 만다. 잠깐 어두워질 뻔했던 아이들 표정도 다시 환하게 펴진다.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은 모두 토끼편이 되어 토끼를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아나 달아나’ 하며~

“어때? 재미있었니?” “네.” “또 책 보러 올 거야?” “내일도 책 읽어 줄 거예요?” “그럼 물론이지.” “내일 또 올게요.” 저학년 새로 온 친구들에게 신경 쓰고 있는 사이 ‘건들지 마’ 라며 온몸으로 저항하던 고학년 남자 친구도 눈은 딴 데 가 있지만 엉덩이는 제법 가까워져 있다.

이렇게 도서관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관계를 맺었다. 재미지게 만난 첫 만남. 첫 그림책을 아이들은 기억할까.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차츰 도서관에 오는 발걸음이 잦아지고 물마시고 싶을 때, 똥 누고 싶을 때 언제든지 편히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쉼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욕심껏 책을 권하고 싶진 않다. 단지 책이 재밌다는 것을 알게 하고, 좋은 관계를 맺게 하고 싶은 욕심은 있다. 그것이 도서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일 테니깐.

김봄희 | 고양시 책놀이터 작은도서관에서 아이들과 책으로 소통하며 지냅니다. 가끔씩 공기놀이나 딱지치기, 산가지 놀이도 하며 아이들의 숨통이 되고자 합니다. 아이들 웃음소리로 넘쳐나는 도서관 만들기를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