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2월 통권 제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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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로 전하는 음악 세계]
바로크 음악과 바흐

박은경 | 2016년 02월

제가 감명 깊게 본 영화 중의 하나인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는 간호사인 한나가 전쟁 통에 온몸에 화상을 입은 영국인 환자를 간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나는 페허가 된 건물 한 쪽에 놓인 피아노를 발견하고 그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지요. 그때 연주한 곡이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아리아입니다. 실제로도 바흐는 불면증 환자를 위해서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작곡했고 이 곡의 연주 시간은 80분 가량입니다. 불면증 환자는 아리아 뒤에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30개의 변주곡을 들으면서 서서히 잠드는 것입니다. 바흐의 음악은 이렇듯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전해 줍니다. 이런 점에서 바흐 음악의 대가인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는 바흐 음악은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는 종교와 같다고 말합니다.

나뭇잎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 햇살이 비칩니다. 오늘은 저도 한나처럼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꺼내 연주해 보았습니다. 은밀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온 우주를 가득 채울 것 같은 생기가 넘치는 변주곡 하나하나를 연주하면서 바흐가 얼마나 섬세하고 낭만적이고 대인배적인 성품의 소유자였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독일 중부 튀링겐에 살았던 바흐 가문은 16세기 이후 약 200년에 걸쳐 50명이 넘는 음악가를 배출한 음악 명문가였습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아버지 역시 궁정 음악가였고 가풍에 따라 바흐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음악의 기초도 닦게 했습니다. 하지만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바흐는 소년 시절에 평탄하게 공부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무리하게 공부하는 바람에 노년기에 시력을 잃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큰형 집에 기거하였는데 큰형이 오르간 거장들의 악보를 보여 주지 않아 달빛 아래에서 몰래 악보를 베껴 쓰느라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랍니다.

바흐는 아른슈타트, 바이마르, 쾨텐, 라이프치히 등 일생 동안 여러 곳을 옮겨가며 일했습니다. 아른슈타트에서 성가대를 이끌 때는 원리 원칙대로만 하다가 단원들과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습니다. 자주 말썽을 일으키던 바순 연주자에게 멍청한 바순쟁이라고 소리친 일로 몽둥이 습격을 받은 일도 있었답니다.

라이프치히의 음악감독으로 선발되었을 때, 당대 최고의 음악가 텔레만을 초빙하려던 계획이 실패해서 그저 중간 정도 되는 음악가 바흐를 선임한 거라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라이프치히의 음악감독이 되어서 일하던 중에는 시의회와 갈등도 빚었지요. 바흐는 음악에 전념하는 음악감독으로 일하고 싶었던 반면 시의회는 업무를 원활하게 처리하는 행정가로서의 음악감독을 원했던 겁니다. 바흐와 그들간의 골치 아픈 관계를 보여 주는 일화가 있지요. 바흐가 「예수, 우리의 소망과 기쁨」 같은 유명한 곡에서 하듯이 오르간 앞에 앉아 손발로 반주하며 찬송가에 장식음 부분을 덧붙이는데 이 도시의 명사들은 노래를 언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평했던 것입니다.

이런저런 일화에서 보여지듯이 바흐는 생전에 그리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바흐는 서양 음악사의 어떤 작곡가보다도 영향력 있는 작곡가로 칭송받지만 그 당시에는 바흐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거예요. 낭만 시대의 작곡가 멘델스존이 작곡된 지 100여 년이 지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다시 연주하여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재평가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난곡이란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든 작품이지요. 독일 유학 당시 한 독일 친구가 일요일 아침에 바흐의 종교 음악곡인 「마태 수난곡」이나 「요한 수난곡」을 들으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던 것처럼 바흐의 음악은 울림이 큽니다.

바흐는 종교 음악뿐 아니라 세속 음악의 모든 장르를 아울러서 표현한 천재적인 음악가입니다. 바흐의 피아노곡으로 피아니스트들이 콘서트에서 즐겨 연주하는 「프랑스 조곡」 「영국 조곡」 「파르티타」가 각각 6곡씩 있습니다. 바흐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세속 음악 춤곡들을 가지고 모음곡을 만들었는데 유럽 여러 나라의 춤곡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느린 독일 춤곡인 알라망드, 빠른 프랑스 춤곡인 꾸랑트, 느리고 장중한 스페인 춤곡 사라방드, 빠르고 경쾌한 영국 춤곡인 지그 등이 그 춤곡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의 서양 음악이 전부 없어진다 해도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집』 두 권이 남는다면 그것을 기초로 다시 음악 체계를 세울 수 있으리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음악은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바흐는 음악을 새롭게 만들거나 발견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전 시대의 음악을 조합하고 최고의 음악으로 한 차원 올려서 다가올 미래 음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흐는 시대적인 추세나 유행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자신에게 맡겨진 음악적 소명을 다하면서,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진실된 소리에 깊이 몰두하였습니다. 사촌이었던 전처 마리아 바르바라 사이에 7명, 안나 막달레나 사이에서 13명, 합해서 20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기르는 북새통 속에서도 바흐가 그토록 많은 걸작들을 창조해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흐는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바흐의 음악에는 수학적인 공식이 있고 규칙이 있습니다. 그의 대위법과 푸가는 과학적인 논리 전개가 있고 그 속에서 음악적 서정성과 예술혼이 살아 움직입니다. 대위법과 푸가는 여러 개의 선율들이 같이 경쟁하듯이 움직이는 음악입니다. 하나의 선율에 화음이 반주로 들어간 음악이 아니고 여러 개의 멜로디가 법칙에 따라 움직이면서 어울리는 음악입니다.

피아노를 전공하려고 선화예술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항상 시험곡의 단골 손님인 바흐의 「푸가」를 연주해야만 했습니다. 바흐는 선율이 하나가 아니고 보통 3개나 4개의 선율을 동시에 연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보를 보는 것도 성가시지만 열 손가락으로 여러 개의 성부를 눌러야 하고 암기도 어려웠습니다. 힘들게 공부해도 손가락이 꼬이기 십상이고 연주하다 한 번 놓치면 다시 시작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언제쯤이면 바흐가 시험곡에서 빠질까 매번 생각했지요. 하지만 학생을 지도하고 있는 지금은 상황이 뒤바뀌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바흐를 많이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과학적인 바흐 음악에서 기술적인 기초와 체계적인 귀의 훈련, 다양한 음악적 감정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흐가 활동하던 시기를 음악사적으로는 바로크 시대라고 부른다고 지난 원고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바로크 음악은 1600년부터 1750년 정도까지의 시대와 그 시대의 음악 양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크(Baroque)라는 말은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입니다.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바로크 시대의 새로운 움직임을 퇴폐적인 경향으로 인식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 바로크 시대는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이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근대 국가가 형성되었던 시대입니다. 절대 권력과 막대한 부를 가진 군주들은 찬란한 바로크 음악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궁정과 교회를 중심으로 음악이 창조되고 발전되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당연히 많은 음악가들이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지요. 이들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필요로 하는 음악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환경을 당연시 여기며 그 안에서 적응하며 살았습니다.

오페라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바로크 음악은 웅장하면서도 극적인 음악 양식이 특징입니다. 독주자가 출현하고 대가적 기교가 나타난 것과 더불어 소나타, 칸타타, 모음곡, 협주곡 등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였습니다. 소나타는 ‘소리가 나다(연주된다)’는 뜻인데, 처음에는 ‘부르는 노래’라는 뜻의 칸타타와 구별하여 기악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협주곡이란 독주자 한 명이나 또는 몇 명이 대규모 악단과 겨룬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정의는 클래식 음악이 발전하고 대가들의 손을 거치며 수정되고 확장된 것입니다. 바로크 음악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을 거쳐 유럽 전역 최고위층 왕실의 명예를 드높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호로는 영국의 셰익스피어, 밀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프랑스의 라신느, 몰리에르 등이 있습니다. 화가로는 네덜란드의 루벤스, 렘브란트, 스페인의 벨라스케즈가 있었습니다. 『햄릿』 『리어왕』 등의 셰익스피어 비극을 읽는다면 바흐의 극적인 피아노곡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또는 『한여름밤의 꿈』 같은 희극을 읽는다면 밝고 생기로 가득 찬 「이탈리안 콘체르토」를 들으면 한껏 멋이 나지 않을까요?

바로크 시대 화가 루벤스의 걸작 「메디치가의 최후」를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규모와 강렬한 색채, 역동적인 움직임 등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물론이고 미술사의 한 기둥이 되는 영혼의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집』 1, 2권이 제게는 그러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24개의 조로 각 권마다 24곡이 들어 있습니다. 다장조, 다단조, 올림 다장조, 올림 다단조, 라장조, 라단조 등의 순으로 쓰여져 있으며 각각 「프렐류드」와 「푸가」로 구성되어집니다. 「프렐류드」는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고 「푸가」는 2성부부터 5성부까지 다양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각각의 곡은 훌륭하고 완벽한 집과 마찬가지고, 각 조의 느낌을 경이롭게 표현해 내었습니다. 2권의 올림 다단조 「프렐류드」와 「푸가」는 제가 특히 사랑하는 곡인데 루브르에서 「메디치가의 최후」의 배경 음악으로 듣는다면 얼마나 눈물이 뚝뚝 떨어질까 상상해 봅니다.

보통 피아노 독주회 프로그램은 휴식 시간을 포함하여 90분 정도로 짜여집니다. 독주회 프로그램으로 한 곡 단독 연주 작품은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유일할 것입니다. 연주회장에서 세계 최정상급 바흐 스페셜리스트들의 연주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80분 가량을 쉼도 없이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도 위대하지만 듣는 관중들도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관중들은 그 시간 동안 바흐의 음악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도 더 듣고 싶다는 여운을 느낍니다. 지루하다는 인상은 거의 찾을 수 없지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갖가지 연주 기술을 보여 주고 즐거움, 경이로움, 울분, 격노, 고뇌, 안식, 평화 등 인류 보편의 감정들을 30개의 변주에 다 드러내놓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음악 안에서 인류에게 주는 사랑과 안식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 음악의 교훈이자 매력이 아닐까요?
박은경 | 선화예고와 서울대학교 음대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 길에 올라 만하임 음대와 뷔르츠부르그 음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영산아트홀 초청 젊은 연주자 독주회 시리즈, 헨델 서거 250주년 기념 음악회, 예술의 전당 리사이트홀 쇼팽 리사이틀 등의 연주회를 하였으며, 현재는 백석콘서바토리에 출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