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2월 통권 제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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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책 읽기 신나는 교실]
우리, 오래 오래 잊지 말자

박미영 | 2016년 02월

포근한 겨울이다. 눈이 오면 아이들과 이글루랑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도 같이 하기로 했는데, 몇 차례 눈발만 조금 날리다 말았다. 뭔 겨울이 이리 밍밍한지 모르겠다. 아이들과 한 약속을 지킬 수나 있으려나. 아이들은 학원 스케줄 빡빡한 방학이 딱히 신나지 않다고 말한다. 그나마 늦잠을 잘 수 있어 좋다나. 안쓰럽지만 딱히 뭘 해줄 게 없다. 아니, 한 가지가 있긴 하다.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줄 재밌는 책을 함께 읽는 것!

재미로 보면 송언 작가 책을 빼놓을 수가 없다. 매번 생생한 캐릭터와 맛깔스런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작가의 제자가 주인공인 경우는 더 재미있다. 어쩌면 그리 톡톡 튀는지. 그 만만찮은 아이들과 선생님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가는 걸 보노라면 어이가 없어 웃다가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한다. 몇 권은 벌써 아이들과 함께 읽었으니 아직 읽어 보지 않은 책을 골라야 한다. 한참 책장 앞을 서성이다 꺼내든 책은 『축 졸업 송언초등학교』다. 엉뚱하고 재미있고 따뜻한 이야기다. 게다가 곧 졸업 시즌이니까. 미리 읽어 오라고 아이들에게 책을 건넸더니 제목과 작가 이름만 보고도 기대감으로 표정이 환하다.

“『김구천구백이』에 나온 선생님이랑 닮은 거 같아요. 얼굴이 인자하게 생겼어요.” 신영이 말에 모두 그림을 들여다본다. 다른 그림 작가가 그렸는데 만화풍의 그림이 얼핏 닮았다. 집에서 각자 책을 읽어 온 아이들은 생각 보따리를 잔뜩 부풀려 왔다. 나는 아이들이 그 보따리를 펼치기 전에 얼른 준비해 둔 시를 한 장씩 나눠 줬다. 가끔 책을 읽기 전이나 후에 시를 한두 편씩 낭송한다. 내가 시를 좋아하고, 이렇게라도 아이들에게 시를 만나게 해 주고 싶어서다. 서로 읽겠다는 실랑이 끝에 언니들을 제치고 4학년 보미가 시를 낭송한다.


“선생님, 저 순미예요.”/ “오, 그래. 방학 잘 보내니?”/ “예. 외할머니 댁에 와 있어요. 그런데요, 내일 우리 반 학교 가는 날이잖아요. 내일 안 가면 결석이에요?”/ “괜찮아, 걱정 말고 잘 놀다가 와.”/ “예, 고맙습니다. 그런데요, 선생님. 지금 졸려요?”/ “비밀이야. 나 지금 잠자다가 일어났어.”/ “저도요. 오늘 아침 늦잠 잔다고 외할머니가 이불 걷어 갔어요. 저도 비밀이에요, 선생님!”

- 「전화 비밀」, 임길택

선생님과 친구처럼 비밀을 나누는 순미가 어쩐지 승민이와 닮았다. 승민이는 『축 졸업 송언초등학교』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실제로 작가의 옛 제자다. 뭘 특별히 잘하거나 돋보이는 아이는 아니지만 조용하고 강하다. 어쩌면 『김구천구백이』에 나오는 김브라보보다 더 질기다. 1학년 때 만난 백 살도 훨씬 넘은(선생님이 뻥 친 거다!) 선생님 꽁무니를 5학년이 될 때까지 졸졸졸 쫓아다닌다. 5학년 때,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 갈 때까지. 부모님이 말려도 소용없고, 친구들이 교실에 못 들어오게 가로막고 밀쳐 내도 소용없다. 김브라보가 배짱이 좋다면 승민인 지구력이 강하다. 주변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일편단심 송언 선생님만 바라보니까. 이쯤 되면 제목이 왜 ‘축 졸업 송언초등학교’인지 짐작이 갈 거다.

이 별난 제자가 자기 이야기를 동화로 꼭 써달라고 하자 “오야, 꼭 쓰마.”라고 대답한 선생님은 정말 약속을 지켰다. 승민이가 그 책을 보고 얼마나 놀라고 좋아했을지 내 가슴이 다 콩콩거린다. 별난 제자와 별난 선생님 이야기에 마음이 따뜻하다. 책을 읽고 아이들 마음에는 무슨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났는지 들어 본다. “책에 보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선생님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송언 선생님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맞아요. 책에 보면 승민이도 선생님이 착해서 좋다고 했잖아요.” “선생님은 승민이 말을 잘 들어주고 이해해 주고 친구처럼 대해 줘요.” 나는 여진이 말에 뜨끔한다. 말수가 적어 좀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여진이. 수다스런 나와 아이들 틈에서 눈만 끔벅이며 가만히 있을 때가 더 많아 늘 마음이 쓰인다. 처음보다 말수가 조금 늘어나긴 했지만 더 많이 귀 기울여 줘야지 속으로 다짐한다.

“선생님이 예의상 오래오래 잊지 말자고 했는데 정말로 매일 찾아가는 승민일 보면 순수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요.” “근데, 나는 승민이가 좀 이상한 아이라는 생각도 들던데?” “끈질겨요.” “무지 귀여워요.” “엄청 규칙적인 아이 같아요.” “사람을 좋아하는 거 같아요.” “커서 뭔가는 될 거 같아요.” 예상치 못한 아이들 말에 웃음이 빵 터진다. 게다가 송언 선생님이 실제로 100살이 넘었다고 믿고 있어 다시 한참 동안 웃었다. 4, 5학년이라 다 컸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럴 때 보면 승민이랑 별로 다를 게 없는 순수한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어떤 장면을 재미있게 읽고 밑줄을 그어 왔는지 궁금하다. 이 시간이면 늘 서로 먼저 얘기하고 싶어 안달이다. 할 말 가득한 보미가 얼른 나선다. “125쪽에 보면 지난 5년 동안 승민이가 선생님을 쫓아다닌 걸 그림으로 그려 놨잖아요. 승민이가 성장하는 모습도 보이고, 이 시절을 이렇게 지냈구나 하는 걸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 장면 더 있는데요. 승민이가 선생님한테 편지 쓴 거요. 그 편지를 보니 『키다리 아저씨』가 생각났어요. 그 책에도 주인공이 아저씨한테 편지를 쓰잖아요.” “그러게. 키다리 아저씨랑 왠지 느낌이 비슷하네.” “저도 승민이가 선생님한테 편지 쓴 게 재밌었어요. 편하게 친구한테 쓰는 것처럼 적어서 부러웠어요.” 선생님한테 하트 뿅뿅 날리는 승민이 편지를 신영이가 소리 내어 읽어 본다.

“4학년 때 선생님 반 여학생들이 승민이가 교실에 못 들어오게 막는 장면이 사자와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거 같았어요.” 여진이 말에 다른 아이들도 한 마디씩 거든다. “그건 좀 너무하는 거 같아요. 여러 명이 한 명을 따돌리다니 좀 심했어요. 송언 선생님이 이걸 알았다면 마음 아팠을 거 같아요.” “어쩌면 알면서도 애들 스스로 해결하라고 모른 체 했을 거 같아요.” 보미는 요즘 학교에서 일명 ‘오징어대원’이 아이들을 한 명씩 따돌리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속상해 했다. 어느새 왕따 얘기로까지 번지자 아이들 표정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승민이 친구들도 질투가 나서 그랬을 거야. 근데 부모님도 제발 선생님을 그만 찾아가라며 승민일 말리잖아. 부모님은 왜 그랬을까?” “너무 찾아가니까 걱정되어서요. 그렇지만 엄마는 아이 입장보다는 자기 입장만 생각한 거 같아요.” “아빠가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한 거 같아요. 승민이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텐데 엄마는 무조건 가지 말라고만 하잖아요.” 아이들은 선생님이 좋아서 찾아가는 승민이가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말리는 부모님과 친구들한테 불만이 많았다. “그렇게 부모님이 그만 찾아가라고 하고, 다른 아이들한테 공격을 받으면서까지도 승민이는 왜 자꾸 선생님을 찾아갔을까?” “애틋하고 보고 싶어서요.” “1학년 때 좋았던 추억 때문에요.” “책에 보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움직였다’는 대목이 있잖아요.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랬던 거 아닐까요?” 보미의 말에 신영이 얼굴에 생기가 돈다.

“저도 슈퍼에서 4학년 때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는데 ‘신영아!’ 하며 반가워하셨어요. 순간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 선생님을 많이 좋아했구나?” “네. 딸처럼 귀여워해주셨어요. 그땐 발표도 잘 못했는데 그 선생님 덕분에 발표도 잘하게 되었고, 공부도 재미있게 가르쳐 주셨어요. 토요일에는 영화도 보여 주고요. 근데 5학년 때 선생님은 천사와 악마를 왔다 갔다 했어요. 으~~.” “전 1학년 때 선생님이 기억에 남아요. 그냥 착하고 친근한 말투가 좋았어요.” 보미 말을 듣고 잠시 기억을 더듬던 여진이는 “전 2학년 때 남자 선생님이요. 만화에 나오는 이름이랑 비슷한데 심재두 선생님이요. 애들이 자두라고 놀리기도 했어요. 우리보고 흰 머리를 뽑아 달라고 해서 뽑아 준 적도 있어요. 친근해서 좋았어요.” 그나마 아이들 기억 속에 좋은 선생님들이 자리하고 있어 다행이다.

승민이는 이제 송언 선생님 품을 떠나 졸업을 했다. 그러나 승민이 마음속엔 선생님과 지냈던 시간이 따뜻하게 남아 있으리라. 우리 아이들 마음속에 좋은 선생님들이 남아 있듯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나서 이런 좋은 기억들을 만화로 그려보기로 했다. 여진이와 보미는 승민이 이야기를, 신영이는 4학년 때 선생님과의 추억을 떠올려 만화로 그렸다. 만화를 그리느라 열심인 아이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얘들아, 우리도 오래오래 잊지 말자.’
박미영 | 수다쟁이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하고, 앤처럼 사람들이랑 수다 떨며 노는 걸 좋아합니다. 동네에서,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재미난 책을 읽고 알콩달콩 옥신각신 지내는 지금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