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2월 통권 제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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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밑줄 긋는 시간]
연극이 끝나고

송미경 | 2016년 02월

외로움 때문에 자신을 부정해 본 적 있나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나답지 않은 시절을 살아 본 적은요? 기억을 떠올려 보면 자의건 타의건 한 번 정도는 우리 자신을 연극 무대에 올려 본 기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운 좋게도 그 배역이 잘 어울려서 잠시 재미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 무대 의상은 헐렁해서 치렁거리거나 너무 꽉 끼어서 불편했을 거예요. 또 다음 대사를 기억해 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을 테고요.

코닉스버그의 작품은 『클로디아의 비밀』이 유명하죠. 나는 그 작품과 『내 안의 또 다른 나 조지』로 코닉스버그를 만났는데요. 『내 친구가 마녀래요』는 최근에야 읽었습니다. 이 작품을 어린 시절에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린 시절을 어른 시절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는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어린 나’가 내 안에서 튀어 나와 책을 읽는 기분이 듭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우리 동네 대표 모범생이었어요. 덜렁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언제나 반듯한 자세로 앉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했죠. 그러니까 나는 마녀 같은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나는 학교에 강아지를 데리고 가거나 친구의 거짓말에 속아 구정물을 마시는 어리숙한 아이였지만 말썽꾸러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전학을 왔어요. 함께 무용을 하게 되었고 같은 동네에 사는 바람에 같이 어울리게 되었어요. 전학 온 아이는 겉보기엔 예쁘고 얌전했지만 속은 똑 부러졌어요. 그 아이의 큰 집에는 어른들이 늘 자리를 비워서 언제든 우리끼리 놀 수 있었어요. 부모 없이 조부모 아래에서 자란다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철저한 예절 교육을 받으며 자라던 내게 내 멋대로 해도 되는 세계는 그야말로 환상이었지요. 그 아이는 어느 건물 옥상에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서 아주 커다란 광고용 풍선에 매달리게도 했는데요. 그때 발을 헛디뎠거나 줄을 놓쳤다면 나는 지금 살아서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한번은 학교에서 대회를 앞둔 우리 무용팀을 세워 놓고 교장 선생님이 격려의 말씀을 해주었는데요. 전교생 앞에 무용반 아이들이 나와 서려는 순간 그 아이가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맨 앞줄에 서자. 전교생이 우리를 봐야 해.”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어요. 나는 굳이 전교생이 나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용은 재미있었지만 몸이 다 드러나는 무용복에 타이즈도 부끄러웠고 말끔하게 묶어서 돌돌 말아 올린 머리도 어쩐지 부끄러웠으니까요. 그래서 난 뒷줄에 서겠다고 말했지만 그 아이는 다시 내 손을 힘껏 낚아채서 앞으로 끌어냈어요. 그리고 내게만 들리도록 말했습니다. “웃어!”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그 아이는 내게 예쁜 표정으로 말했어요. “난 내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건 참을 수 없어.” 내가 왜냐고 묻자 그 아이는 같은 말을 했고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 말을 반복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어요. 그 아이의 말은 내게 기이하게 다가왔어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죠.

엘리자베스는 외로운 소녀였습니다. 외동딸에다가 친구도 하나 없죠. 엘리자베스는 할로윈 파티를 앞두고 자신을 마녀라고 소개하는 제니퍼를 만납니다. 제니퍼는 입고 있는 옷도 표정도 하는 말도 음산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제니퍼와 마녀놀이를 시작하게 돼요. 제니퍼의 견습생 마녀가 된 엘리자베스는 초보 마녀 제니퍼가 정해준 규칙을 지켜나가죠. 진짜 마녀가 되기 위해서요.

제니퍼와 피의 맹세를 나누고 나무에 쪽지를 놔두면서 둘은 은밀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지요. 엘리자베스는 점점 제니퍼와의 마녀 놀이에 흠뻑 빠져듭니다. 양파를 생으로 먹거나 날달걀을 먹는 사소한 규칙들을 지켜 나가면서 무료하던 삶은 활력을 얻습니다. 때론 버겁지만 누군가와 함께 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게다가 그 모든 게 비밀이라는 것만으로도 엘리자베스는 가슴이 쿵쿵 뛰지요. 혼자 공주인 척하는 신시아를 골탕 먹이는 일도 조금씩 성공하는 듯하고요.

누군가 내 편이라는 사실이, 게다가 그 친구가 마녀라는 사실이 엘리자베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어요. 늘 혼자 오가던 학교 길도, 쓸쓸하던 외톨이 학교생활도 문제되지 않지요. 학교를 오가는 일이 모험처럼 느껴져서 매일 옷을 갈아입는 것마저 설레었으니까요. 엄마는 변화된 엘리자베스를 보고 꼭 딴 사람 같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엘리자베스가 어려서부터 안 먹던 날달걀을 먹어서라고 생각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다른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견습생 마녀라고요.

두 아이는 하늘을 날게 해주는 연고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재료에 넣을 두꺼비 한 마리가 생겨요. 모든 일은 이렇게 잘 진행되는 한편 어쩔 수 없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둘은 두꺼비에게 힐러리 에즈라라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힐러리 에즈라는 너무 사랑스러운 동물이었어요.

엘리자베스는 힐러리 에즈라를 사랑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와 제니퍼는 하늘을 날게 하는 연고에 넣을 재료를 모으는 중에도 틈틈이 힐러리 에즈라와 놉니다. 힐러리 에즈라가 오늘은 얼마나 멀리 뛰었는지 재어 보기도 하면서요. 힐러리 에즈라는 아주 맑고 사랑스러운 눈을 가진 동물이었습니다. 몇 달을 준비해 온 마법 연고를 만들던 날 제니퍼가 끓는 솥에 힐러리 에즈라를 넣으려던 순간까지 둘에겐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나의 어린 시절엔 학생들이 무척 많아서 학교를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가야 했어요. 학교가 오후반이면 미리 만나서 놀다가 가기도 했는데 그 아이는 우리를 비밀리에 초대했습니다. 우린 비밀스러운 놀이를 매일 했어요. 그러다가 학교에 가면 학교생활이 어쩐지 색다르게 느껴졌죠.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거나 우유 통을 정리하고 지우개를 털어 오는 반장 역할도 그 아이 집에 다녀온 날은 열 배나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어요. 그 아이는 장식장에서 아주 무겁고 기묘하게 생긴 주전자와 작은 잔들을 가지고 나왔어요. 그 아이는 잔에 집에서 만든 포도 주스를 채워 왔어요. 그 아이는 포도 주스에 설탕도 가득 붓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댔어요. 나와 친구 현은 마치 마법에 걸린 아이들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았죠. 그 아이는 저와 현에게 계속 마법의 주스를 따라 주고 자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학교에 가서 이상한 일들이 생겼습니다. 나는 자꾸 졸렸고 수업 시간 내내 현은 나를 보며 웃어 댔거든요. 노란 티셔츠에 보라색 주스를 잔뜩 묻히고서요. 그 다음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는 양호실에서 오후 늦게야 깨어났으니까요. 깨어보니 양호 선생님과 현의 엄마와 우리 이모와 담임 선생님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현은 술주정을 했고 나는 잠이 들었던 거예요.(우리는 그게 포도주였다는 걸 어른들이 말해 줘서 알게 되었죠.)

그 후 그 아이는 우리를 추방해 버렸습니다. 다시 그 아이 집에 놀러 갔을 때 그 아이는 더 이상 너희 같은 애들과는 놀 수 없다며 소리를 질러 댄 뒤 문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세게 문을 닫아 버렸어요. 추방당한 나와 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음엔 너무 속상해서 맥이 빠져 버렸죠. 게다가 그 아이가 한동안 우리에게 저주의 말 같은 걸 해대서 무섭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우린 곧 우리의 놀이로 돌아왔어요. 현과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와 놀기 위해 소꿉놀이를 하다가 지렁이를 일곱 토막 낼 일도 없었고, 위험한 난간에 매달릴 일도 없었죠. 연극 무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연기를 할 필요도 없어졌어요. 아주 평범한 놀이를 하는 즐거움을 다시 되찾은 거예요.

하지만 이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씁쓸해요. 나와 현은 그 아이를 우리의 평범한 놀이에 친구로 초대하지 못했고 결국 친구로 남지 못했으니까요. 다행히도 우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연극하지 않아도 되고 무대에 서지 않아도 되는 진짜 놀이와 진짜 우정과 진짜 삶을 제니퍼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마녀가 되지 못했지만 마녀 놀이를 하던 제니퍼를 친구로 변신시킨 걸 보면, 엘리자베스야말로 정말 멋진 마녀예요. 그러니까 우리 곁에 있는 지금 그 친구가 우리의 진짜 마녀인지도 모르겠어요. 아주 평범한 말을 하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이요.

당분간 나는 평범하고 지루한 것들을 더 오래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특히 아주 느리고 어리숙한 나를요. 그리고 나의 평범한 사람들과 어떤 꾸밈도 필요 없는 이야기를 천천히 함께 나눌 거예요.
송미경 | 2008년 웅진주니어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일기 먹는 일기장』 『복수의 여신』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광인 수술 보고서』 『돌 씹어 먹는 아이』 『바느질 소녀』가 있고 『어떤 아이가』로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세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