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2월 통권 제159호
속 깊은 책 이야기
책 너머 세상 읽기
더불어 책 읽기
열린어린이 선정 이달의 좋은 책
열린어린이 서평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열린어린이 서평

[이 달의 서평]
축복과 정성이 빚어낸 음식 이야기

김혜곤 | 2016년 02월

뜨끈한 우거지 된장국이나 쾌쾌하지만 구수한 청국장 맛이 코끝에 감도는 추운 날입니다. 이런 날이면 아무리 쿡방이 대세이고 셰프들의 화려한 요리가 우리의 눈과 코를 자극하여도 어린 시절 추운 밖에서 돌아온 나를 따뜻하게 녹여 주던 그 옛 맛이 그립기만 합니다. 그 시절 그 음식이 그리워 저도 상냥팔이 소녀처럼 먹고 싶은 마음을 담아 성냥 하나를 켭니다. 눈앞에 아랫목에는 청국장이 잘 떠지고 있고 다락에는 볏짚으로 엮은 메주가 잘 익어가고 있는 우리 집이 그려집니다. 이런 저런 음식 냄새와 하얀 김이 가득했던 부엌의 냄새, 그 냄새 사이로 번지는 엄마 냄새까지. 그 모습과 그 냄새를 담은 그리움이 책 속에서 후루룩 피어납니다.

따뜻한 가을볕이 제격인 할머니의 장독대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할머니의 장독대 위에는 말린 고추, 호박고지가 채반에 널려 있고 강아지들은 지들끼리 까불고 있네요. 부정한 기운을 막는다는 창호지 버선이 장항아리에 거꾸로 붙어 있는 정겨운 장독대 풍경입니다. 장을 뜨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이제 펼쳐질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어 만든 일곱 가지 전통 음식 한상 차림이 기대됩니다. 할머니는 요리를 배운 적 없어도 언제 어떤 음식을 어떻게 장만해야 하는지 신기하게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집 음식뿐 아니라 정기를 상징하던 장 담기에서 시작해 여름과 가을을 지나고 겨울을 준비하는 김장 김치까지 할머니의 활약은 계속됩니다.

늦가을부터 시작된 콩 수확과 메주 쑤기는 다음해 봄 장 담그기로 이어지지요. 여름내 캐낸 감자는 썩히고 걸러서 감자 가루를 만들고, 다시 뽀얀 감자 가루는 손자들 입에 쏙쏙 들어갈 따뜻하고 고소한 감자떡으로 변신합니다. 여름내 잘 여문 것들은 겨우내 두고두고 우리 밥상에 올리기 위해 씻고 절이는 과정을 거쳐 저장 식품 장아찌로 다시 태어나지요. 가을이면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따 껍질을 벗기고 처마 밑에 매답니다. 온 천지가 주홍빛으로 넘칩니다. 일 년 농사를 마무리하고도 할머니는 쉴 새가 없습니다. 지천에 널린 도토리를 주워와 말리고 빻고 거르고 내리는 일을 반복해 얻은 도토리 가루로 말랑말랑 탱탱한 묵을 쒀 먹지요. 찬바람이 불면 추운 겨울을 대비한 저장 음식 김장 김치 만들 생각에 며느리의 걱정이 그득합니다. 하지만 ‘울력걸음이 천리길’이라고 모두 힘을 합치니 산더미 같던 배추도 어느새 차곡차곡 김치 통에 담겨 쌓여 갑니다.

이렇게 깊은 세월의 맛을 만들기 위해 일 년 내내 할머니는 밭고랑을 다니시며 자연이 만들어가는 재료들에 할머니의 웃음과 한숨과 땀을 보태셨겠지요. 정성으로 잘 자란 먹거리들이 할머니의 손에서 맛난 음식으로 다시 만들어질 때 그 속에는 눈에 밟히고 마음에 얹힌 자식 걱정이 버무려지고 조물조물 할머니 표 음식을 먹을 손주들의 모습이 어우러집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가 밥상을 앞에 두고 모두 둘러앉았습니다. 저마다 고슬고슬 지은 밥이 소복하게 담긴 밥그릇을 앞에 두고 한 그릇 뚝딱 맛나게 먹습니다. 밥상에는 김장 김치도 그득하고 구수한 된장국에 이른 봄 잡힌 홍어를 그대로 삭혀 코가 뻥 눈이 번쩍하는 홍어 한 접시도 올랐습니다. 아이들은 감자떡과 곶감에 먼저 손이 가고 어른들은 도토리묵에 손이 갑니다. 한상 가득 차려진 자연의 바람이 만든, 할머니의 바람이 만든 바람의 맛에 모두들 넉넉하고 풍요로운 표정입니다.

사람과 자연의 힘이 모두 모아져야 하는 농사일을 마쳤다고 일 년 먹거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사람에 의해 만들고 빚어져 또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달콤하고 구수하고 매콤한 우리의 맛이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맛은 긴 시간 계획하고 준비하고 또 서서히 음식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몸으로 알고 마음으로 품어야 제대로 우러나나 봅니다. 자연의 선물인 햇빛과 바람과 물이, 사람들의 지혜와 노력과 지극한 마음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할머니에서 할머니로 이어진 우리의 맛이 살아나지요. 이 음식은 바로 건강은 물론 사랑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전설이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축복으로 잘 자라주고 사람이 사람에게 유익한 먹거리로 만들어 내는 일, 자연의 바람과 사람의 바람이 조화를 이뤄 만들어 낸 우리 전통 음식 그 깊은 맛 잔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김혜곤 | 오픈키드 독서교실 팀장. 우리네 삶도 참 우리 음식과 닮았습니다. 준비하고 열심히 만들고 또 묵묵하고 진득하게 기다려 주는 미덕의 삶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