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통권 제180호
속 깊은 책 이야기
책 너머 세상 읽기
더불어 책 읽기
열린어린이 선정 이달의 좋은 책
열린어린이 서평
주목 받는 새 책
열린어린이가 권하는
이 달의 책

속 깊은 책 이야기

[어린이 책 깊이 들여다보기]
폭력에 맞서 일상을 지키는 힘

박성애 | 2017년 11월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사회에 속해 살아간다. 타인의 환대와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소통을 배운다. 하지만, 이 과정에 공포와 불안이 개입할 때가 있다. 안온한 세계를 찢고 나타나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어떤 힘을 우리는 폭력이라 부른다. 폭력은 한 사람의 의사에 반하여 누군가의 힘이 강제적으로 행사될 때 발생한다.

날마다 우리는 사회 여기저기서 폭력을 마주하고 있다. 아이들은 가정, 학교, 사회에서 폭력의 피해자로 때로는 가해자로 드러나고 그 내용은 우리를 경악케 한다. 어떻게 어른이 아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해자들은 죄의식 없는 얼굴로 나타날 수 있는지. 끔찍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따라붙는 이러한 질문들에, 물러서지 않고 답하려 애쓴 청소년소설이 있다. 이창숙의 단편집 『저수지 괴물』과 이명랑의 단편집 『단 한 번의 기회』를 읽으며 이 시대의 폭력에 대해 말하는 작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려 한다.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

가끔은 폭력 사건을 개인의 문제로 이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게 하면 나와 사건을 분리시킬 수 있고 그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니. 이 마음 안에서 나는 가해자에게 눈을 돌려 그를 사회와 격리시키는 것으로 안정을 찾고자 한다. 이렇게 고통의 소리가 환기시키는 불안을 견디기 힘들 때면 사건을 직면하기보다 ‘작은 사건’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 시도는 피해자의 일그러진 일상을 축소하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 ‘그만 울라’는 외침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다른 일탈적 개인이 출현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무엇이 은폐되었는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나도 잠재적 피해자가 된다.

이때 작가들은 사건의 배경, 즉 폭력을 생산하는 사회에 주목한다. 겉으로 드러난 가해자가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보여 주는 증상이라면, 그 원인은 폭력을 생산하는 사회 시스템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의 폭력적 확장과 재생산을 묵인하는 사회는 사건의 배경이 된다. 이명랑의 「단 한 번의 기회」는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 권력 재생산 방식과 그 안에서 어떻게 개인의 폭력이 발생되고 용인되는지를 보여 준다. 작가는 오직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설정한다. 이 사회의 모든 아이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좋은 부모(부유한 1%의 부모)에게 선택되기 위한 단 한 번의 테스트를 받는다. 시험이 끝나고 1등부터 순위가 매겨지면 가장 좋은 조건의 부모부터 아이들을 선택할 수 있다. 꼭 자신이 낳아 기른 아이가 아니어도 괜찮다. 경쟁력 있는 아이라면 부모들은 자기 아이 대신 더 나은 아이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승리의 주문을 외친다. 승리의 주문을 외치며 녀석을 향해 카트를 밀고 돌진한다. 내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내게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단 한 번의 기회」, 13쪽)

‘나’의 아버지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이 경쟁에서 승리해 VIP의 가정에 입양되었고 그들만이 앉을 수 있는 특별석에서 아들의 경주를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는 ‘나’를 응원하기보다는 ‘나’의 경쟁력을 관찰한다. 아버지의 선택을 받기 위해 ‘나’는 경쟁자에 대한 폭력도 불사한다. 승리자에게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을 묻지 않는 사회, 빠르게 좋은 결과를 얻는 것에 무게를 두는 “일등주의” 사회에서 폭력은 쉽고 빠르게 타인을 배제하는 방법이 된다.1 그리고 이는 가정, 학교, 사회 전체에서 용인됨으로써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폭력을 재생산하는 사회에서 타인의 고통은 승리하지 못한 자들의 불평으로 폄하될 수 있으며, 희생자가 발생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애도 대신 그 가족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을 배경으로 창작된 이창숙의 「루이비똥」과 이명랑의 「이제 막 내 옆으로 온 아이에게」는 희생자 가족들의 절망을 배가시키는 우리 사회의 폭력적 면면을 드러낸다.

“책임자들은 감추려고만 하고 사람들은 상처 주는 말만 하고. 바뀌는 것은 없고. 몸도 마음도 힘들어.” (…) 비를 맞고 눈을 맞고 욕을 먹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엄마는 멈추지 않았어. (「루이비똥」, 143~144쪽)

“감추려고만” 하는 책임자들과 “상처 주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모욕을 당”한 이유는 피해자들이 침묵하지 않고 그 폭력의 과정에 대해 물었기 때문이다. 과정의 정당성을 묻는 것은 빠르고 효율적인 해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 특히 권력이 타인의 자발적 동의 없이 폭력적으로 그 힘을 드러내는 사회에서 불필요한 일로, 심지어는 불온한 일로 취급된다. 세월호 사건 자체와 세월호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2차 폭력은 사회구조적 폭력의 단면을 보여 준다.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의 얼굴(가해자의 얼굴)은 그에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동의한 사람들을 통해 사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작가는 “언론이나 교육 기관, 행정 기관이 깊이 관여”해 “기억 자체를”(이창숙, 「코털」, 189쪽) 바꾸고 진실을 은폐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학교나 뉴스 등을 통해 가해자의 목소리가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명랑의 「전설」에는 권력자와 그에 동의하는 인물들로 이루어진 학교 공동체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비록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선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지라도 구조의 폭력을 피할 수 없다. 권력자의 자녀들과 그를 비호하는 교사 조직으로 이루어진 학교는 사회 권력이 재생산되는 장소다. 이곳에서 폭력은 자연스럽고, ‘전설’은 불가능하다.

폭력을 재생산하는 사회는 내밀한 개인사로 치부되는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과도 닿아 있다. 이창숙의 『저수지 괴물』에 드러난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소음」의 미유, 「아빠의 도플갱어」의 ‘나’,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알바 천당」의 여성은 특정 개인에 의한 피해자들이다. 하지만 이 사건들도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발생한다. 아이를 인격으로 보지 않는 사회에서 남편 없이 홀로 육아를 맡은 「소음」의 미유 엄마. 성공적 사회인에겐 가정 내에서의 도덕성 따위를 묻지 않는 사회에 길들여진 「아빠의 도플갱어」의 아빠. 외적 성공을 최선의 성취로 보는 사회에서 미끄러진 개인이 더 약한 자를 향해 휘두르는 폭력을 보여 주는 「알바 천당」의 청년. 이들은 모두 일등주의 사회, 폭력 사회의 찌꺼기인지 모른다.

직면, 연대, 회의 : 그 자리에서 다시, 진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폭력 사건 아래엔 폭력을 재생산하는 사회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과 불안에 노출된 구성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작가들의 목소리를 ‘직면’, ‘연대’, ‘회의’의 키워드를 통해 들어 보자.

직면

이창숙 작품 「소음」의 미유는 엄마의 광적인 집착과 폭력 속에 방치되었던 소녀다.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엄마에 대한 사랑과 증오는 미유를 꿈과 현실의 경계로 몰아가고 폭력의 상처는 그의 현실을 증발시킨다. 이 상황에서 미유는 엄마의 얼굴을 그리면서 상처를 캔버스에 복기한다. 이에 미유는 “모두 잊어버렸다고 믿었던 그날의 상처”를 다시 “기억”하고(「소음」, 129쪽) 현실로 넘어올 수 있게 된다.

「저수지 괴물」의 소년은 어떤 폭력 사건의 충격 이후 세상과 담을 쌓고 자신의 방 안에 갇혀 살아간다. 하지만 소년은 갇힌 방 안에서도 창밖으로 저수지에 살고 있는 괴물을 주시하고 있다. 소년은 아마도 3년 전 사건을 통해 이미 이 사회 안에 똬리 틀고 있는 괴물과 맞닥뜨렸을 것이다. 소년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산자락의 고급 아파트 주민들은 교양 있는 사람들로 폭력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고급 주택을 지으려 산을 깎아 냈던 탐욕은 여전히 그들 안에서 저수지처럼 찰랑대고 급기야 거대한 괴물을 키워 낸다. 상처 입은 소년은 사람들의 탐욕과 괴물로 덮인 공간을 꿰뚫어 보는 인물이자 이들에 맞서 동생을 구하려 몸을 던지는, 그래서 괴물을 직면한 유일한 인물이다.

폭력의 상처와 근원을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게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다. 직접적인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니라 해도 폭력의 원인과 배경을 직면하고 관찰하는 일은 우리 모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지 모른다. 특히 사회적 폭력은 더욱 그렇다. 사회의 침묵 속에서 권력적 폭력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사건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들의 슬픔을 애도해야 한다. 「이제 막 내 옆으로 온 아이에게」에서 이명랑 작가는 사회구조적 폭력 속에서 희생된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사회가 구조해 줄 것이라 믿으며 죽어 간 이들의 고통에 직면하여, 들리지 않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독자들에게 요청한다. 애도함으로써 냉소를 그치고 폭력이 발생된 배경과 원인, 그 결과를 사유할 것을.

연대

이창숙의 「알바 천당」은 연대의 힘을 잘 보여 준다. 한밤중, 십대 소녀가 지키고 있는 편의점에 피 흘리는 여자와 칼 든 남자가 들이닥친다. 남자는 술에 잔뜩 취한 채 애인을 향해 칼을 겨누고 욕설과 협박을 쏟아 놓는다. 소녀는 너무 놀라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도 칼에 찔린 여자가 다칠까 그를 주시하며 여자를 도울 방법을 구상하고, 여자는 남자가 소녀에게 위해를 가할까 싶어 최선을 다해 방어한다. 숨은 조력자도 있다. 소녀에게 저녁 아르바이트를 부탁하고 아픈 어머니를 돌보러 집으로 돌아간 소년이다. 편의점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만난 상처 입은 여자와 아직 어린 소녀, 그리고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가난한 소년. 사회적으로 힘없는 이들의 연대는 남자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만든다.

연대는 피해자의 상처를 감싼다. 「루이비똥」의 ‘아빠’는 세월호에서 딸을 잃었다. 믿었던 사회가 가한 폭력 앞에서 그의 내면은 무너져 내렸지만, 광화문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을 통해 치유되기 시작한다. 「샘, 오늘 수업 못 해요」의 소년은 학교 폭력의 가해자이자, 폭력적으로 권력을 재생산하는 가정과 사회 속에서 자라 온,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피해자이다. 물질적 풍족함이나 노력 없이 주어지는 결과들도 삶을 놓아 버리고 싶은 소년의 충동을 제어하지 못한다. 자신을 향한 극단의 폭력, 자살. 소년이 자살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친구와 상담 선생님 덕분이다. 권력 재생산의 구조 밖에서 건강한 삶을 살아 낸 누군가의 손에 의지해 소년은 죽음 밖으로 걸어 나온다.

작가들은, 타인의 자발적 동의 없이 행해지는 권력의 폭력적 출현에 맞서기 위해 약자들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연대하지 않으면, 부드러운 얼굴 이면의 잔혹함으로 무장한 권력은 사회에서 타인의 얼굴을 지워 버릴 것이다. 권력의 자장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난, 혹은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는 이름 없고 목소리 없는 누군가를 발견해 내고 그들과 연결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회의

폭력에 직면하고 연대하는 우리는, 함께 회의(懷疑)할 수 있다. 억압하는 권력의 목소리에 대한 의심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들의 선택은 새로운 길이 된다. 이명랑의 「준비물」은 일등주의 담론에 따라 일등 하는 것만을 “호프”라고 믿는 사회의 불행한 얼굴을 보여 준다. “호프학원비”가 있어야만 아이들의 미래에 희망이 있다는 권력 담론은 부모들을 “한계”로 밀어붙일 만큼 폭력적이다. 부모도 아이들도 모두가 불행한 사회, 아이들은 ‘자식의 희망적 미래’를 위해 부모님들이 힘들게 모은 학원비를 훔치기로 한다. 진짜 희망에 투자하기 위해. 아이들은 권력이 제시하는 식민지적 희망을 내던진다. 아이들은 닳고 닳은 부모의 서랍을 열고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희망의 방향을 바꾼다. 이는 권력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회의한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희망이다.

이창숙의 「코털」도 회의하는 즐거움과 미덕을 잘 보여 준다. 코털의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 코털이 없는 소녀들은 절망하고 우왕좌왕한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기쁨의 건배를 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코털이라는 권력 담론을 회의한 결과, 지배적인 목소리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 담론에서 벗어난 개인의 특징을 ‘불필요한 것’,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는 일등주의 사회의 폭력에 대해 고발하면서도 작가들의 목소리는 어둡지 않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진리라 믿는 권력의 목소리를 회의하고 그 너머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준비물」과 「코털」의 아이들은 어른의 시각에서는 철없는 행위를 하면서도 긍정적이다. 적극적으로 회의하고 규정되지 않은 곳에서 희망을 찾으라는 작가들의 외침은 아이들의 목소리로 밝게 선포되고 있다. 곳곳에서 폭력을 마주하는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것은 이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닐까.

충격적인 폭력 사건이 드러날 때면 그 파장에서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원인 없는 증상은 없다. 성급한 마음에 떠밀려 환부에 임시 처방을 하고 가리는 일에만 골몰하면, 그래서 원인을 외면한다면, 상처는 사회 도처에서 계속 발생할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이 겪는 사회적 고통을 마주하려 한 용기 있는 작가들의 조언이 지금 당장은 불편하지만 꼭 들어야 하는 진단과 처방일지 모른다.

1 최재식, 「학교 폭력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대안」, 『대동철학』, 대동철학회 63, 2013, 119-145쪽 참고
박성애 | 아동문학 연구자로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