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통권 제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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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나의 작품 나의 이야기]
때 묻지 않은 천진함과 순수함

김상근 | 2017년 11월

저는 생각이 많아질 때 길을 걸어요. 걸으면 뭔가 몸에 에너지가 돌아서 답답함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혼자서 생각하기에 좋거든요. 학교를 갓 졸업하고 길을 걸으면서 많이 했던 생각은 ‘나는 앞으로 뭐 먹고 살지?’ 대략 그런 물음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과거에 이랬으면 지금 이렇게 되었을까?’ 내지는 ‘지금 이런 일을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등 현재보다는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 더 많은 생각이 머물러 있었죠. 그래서 눈이 내리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도 보지 못하고 어디를 가려고 했었는데 지나치게 되는 제 모습들을 보며 ‘고민이 있으면 이렇게 바보가 되는구나….’ 싶었고 마음이 복잡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눈을 굴리며 어딘가로 가고 있는 두더지를 그리게 되었는데요. 그림을 그려 놓고 보니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두더지 같았고, 여러 생각과 고민이 많았던 저의 모습 같아 보였어요. 그리고 그 그림은 두 갈래의 이야기가 되었지요. 그중 하나가 『두더지의 고민』이고, 다른 하나가 『두더지의 소원』이에요. 『두더지의 소원』은 『두더지의 고민』과 연결 지점이 많아 두 권을 함께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이렇게 시작된 두 그림책은 같지만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어요. 두 권 모두 눈덩이를 굴리는 두더지가 나오지만 눈덩이를 전혀 다르게 대하고 있거든요. 『두더지의 고민』에서는 눈 자체를 고민에 비유해서 표현하고자 했어요. 두더지의 머리 위에 쌓였던 눈에서 최초의 작은 눈덩이가 만들어지고 점점 커져서 현재는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고민에 가려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게 되지요.

그에 반해 『두더지의 소원』에서는 새하얀 눈을 때 묻지 않은 아이의 천진함과 순수함으로 바라보았어요. 마을에 이사를 온 두더지가 새하얗고 낯선 세상에 혼자 남겨진 눈덩이를 발견하고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친구라 느끼며 마음을 나누게 되는데요. 눈덩이가 커지는 만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주고받았던 눈덩이 친구에 대한 두더지의 마음도 깊어지고 커지리라 생각했어요.

“두더지를 주인공으로 한 이유가 있나요?” 두더지를 주인공으로 삼아서인지, 작가와의 만남을 할 때 매번 같은 질문을 들어요. 저는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동물들의 세계를 상상하고 그려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첫 책이 된 『두더지의 고민』도 동물이 주인공이었으면 했어요. 자연스럽게 ‘그럼 어떤 동물이 제일 고민이 많을까?’를 생각해 보다가 왠지 어두운 땅속에 사는 두더지가 그럴 것 같고, 고민이 생기면 고민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갈 것만 같았어요. 나중에 눈덩이 속에서 친구들을 구조해 주기도 좋겠다 싶어서 두더지를 주인공으로 그리게 되었고, 그 두더지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 것이지요.

두 권 모두 마지막 페이지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헌사가 들어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특별한 경험과 애틋함이 제 안에 많기도 하고 사실 각 책에 담긴 사연들이 있어서이지요. 우선 『두더지의 고민』은 할아버지와 얽힌 이야기가 있어요. 작업을 한참하고 있던 겨울날, “할아버지, 이게 무슨 동물 같아요?”라고 물으면 “두더지네.”라고 웃으시며 제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셨던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어요. 제가 겪은 가족의 첫 죽음이기도 하고 완성된 책을 꼭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신 일이 너무 안타까워서 헌사를 그렇게 적었어요. 나중에 책이 나오고 할머니와 둘이 산소에 가서 책을 읽어 드렸어요.

『두더지의 소원』 때에는 한창 책 작업 중이던 겨울 어느 날 할머니께 전화가 왔어요. “손주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하시는 할머니의 전화에 내심 기쁘면서도 병원에 계셨던 할머니를 마감 때문에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했었죠. 그런데 거짓말처럼 사흘 후에 할머니가 의식이 없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제야 병원에 찾아가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붙잡고 어떤 회의감과 슬픔에 한참을 멍하게 서 있다 돌아왔어요.

작년 겨울은 밤하늘에 왜 그렇게 별들이 많은지 작업하다 할머니가 생각나면 나와서 별을 보며 할머니를 생각했어요. 소원도 빌고요. 그런 마음들이 그림에 조금씩이나마 담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책 속에서 두더지가 별똥별을 보며 빈 소원은 짐작해 볼 수는 있지만 정확히 나오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그 당시 제 소원은 할머니가 다시 건강해지는 거였어요. 정말 감사하게도 할머니가 의식을 찾으시고 차츰 건강을 회복하셔서 책이 나왔을 때는 할머니께 읽어 드릴 수 있었어요. 물론 많이 좋아해 주셨답니다.

사실 첫 책을 낼 때만 해도 독자를 생각하기보단 제 이야기를 글과 그림이 있는 책의 형태로 만들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책이 출판된 후 꾸준히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독자분들을 마주하는 자리를 가지게 되었는데요. 제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사람일까. 내가 건네는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는지, 전에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고 책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눌 수 있었어요. 아이들의 천진한 생각도 말이죠. 그 시간들이 『두더지의 소원』을 작업할 때 독자들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었어요. ‘아이들뿐 아니라 성인 독자들도 많이 책을 봐 주셨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만들었어요.

사실 이유도 있지요. 책을 작업하면서 우연히 어떤 사진을 봤는데요. 한 아이가 TV 화면 속에서 울고 있는 아저씨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작은 손에 휴지를 들고 화면 속 아저씨의 눈가를 열심히 문지르고 있는 사진이었어요. ‘아, 정말 예쁜 동심! 지켜 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과 있다 보면 그런 보석 같은 순간을 만날 수 있는데요. 『두더지의 소원』은 길에서 만난 무생물인 작은 눈덩이와도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아이의 천진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런 동심을 지켜보는 어른들의 이야기랍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에 산타는 없어. 눈덩이는 곧 다 녹을 테니까 어서 버스에 타렴. 내일 다시 만들어 줄 테니 빨리 자.”라고 말하는 어른들보다는 좀 더 따듯하게 아이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지지해 줄 수 있는 든든한 어른들이 조금이나마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주변에 아이가 없는 어른들의 마음 안에도 각자의 아이가 살고 있을 테니까요. 책을 통해서 세상 무엇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어린 날의 순수한 동심을 추억해 보는 위안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런 저의 마음들이 전달되었을까요. 가끔 독자들이 책을 읽은 감상이나 생각들을 제 SNS를 통해 보내 주기도 하는데요. 참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에 저 또한 위로가 되고 힘이 나요. 이 지면을 빌려 인사드리고 싶어요. “참 감사합니다!”
김상근 |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대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습니다. 작품으로는 『두더지의 고민』 『가방 안에 든 게 뭐야?』 『두더지의 소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