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통권 제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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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책 이야기]
수다쟁이 아빠의 이야기 선물

이승훈 | 2017년 11월

직장에서 바쁜 하루를 마치고 서둘러 집에 도착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예쁜 세 아이들이 지친 아빠를 반겨 주겠지?’ ‘따뜻한 밥과 국도 끓였겠지? 내가 좋아하는 생선을 구웠을까?’ 내 기대를 알아차렸는지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 지평이가 창문 밖으로 빼꼼히 내다봤다. 4학년인 지홍이와 세 살인 셋째 지인이에게 아빠가 도착했음을 알리나 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지인이가 달려와서 와락 안긴다. 그런데 눈은 아빠 손에 무엇이 들렸는지 살피기에 바쁘다. 지홍이와 지평이는 아빠 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간단히 눈인사만 하고, 각자 읽고 있던 책으로 눈을 돌린다. 아이들 엄마는 이제야 밥을 하고, 눈치 없는 지인이는 일터에서 돌아온 아빠가 씻기도 전에 그림책을 들고 와 무릎 위에 앉았다. ‘이럴 때 텔레비전이 있으면 좋겠다. 뽀로로라도 틀어 주면 조금 편할 텐데.’ 머릿속으로 생각해 본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대단한 가정교육 철학이 있어서 없앤 것은 아니다. 결혼하면서 샀던 텔레비전이 오래되어 가끔 말썽을 부렸는데 답답해하던 아내가 고물을 수집해 가는 트럭 아저씨에게 보내 버렸다. 잠시 텔레비전이 다시 생기기도 했다. 아이들 막내 삼촌이 독립하면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컴퓨터 모니터 겸용 텔레비전이었다. 추석에 아이들 외갓집에 내려갔다가 울산에서 남양주 우리 집까지 차로 텔레비전을 실어왔다. 그런데 먼 길 오면서 충격을 받았는지 멀쩡하던 텔레비전이 며칠을 못 넘기고 또 고장 나 버렸다. 그 후로 우리 집은 텔레비전 없이 지낸다. 텔레비전이 없어도 엄마, 아빠 스마트폰도 있고, 노트북도 있어서 세상의 흐름과 먼 것은 아니다. 노트북으로 매주 한 편씩 어린이 영화도 본다.

처음 텔레비전이 없어지고 나서는 맨날 ‘방콕’만 하며 두 아들 녀석은 집안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없애면 자연스럽게 사회성이 좋아지는 것일까? 다른 집에 가는 것을 불편해하던 녀석들이 제 발로 이웃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점점 아이들은 저녁밥 시간도 잊고서 느지막이 들어왔다. 짐작했겠지만 이유는 역시,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주말에는 대여섯 살이나 차이 나는 동네 형들 집에까지 가서 텔레비전을 보고 왔다.

하지만 매일같이 남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에 지쳤는지 텔레비전을 찾는 마을 순례도 뜸해졌다. 이제는 저녁이나 주말 우리 가족은 집안에서 카드놀이도 하고, 끝말잇기, 가벼운 몸싸움 등으로 시간을 즐기고 있다. 함께 놀다 지치면 자연스럽게 책을 보게 된다. 재미있는 만화책은 벌써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본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종이가 다 너덜너덜해졌다. 아이들은 이제 집에 더 이상 볼 책이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5년 전 운길산 아래로 이사 온 우리 가족은 두 해전 태어난 지인이까지 모두 다섯 식구가 작은 집에 살고 있다. 서울에 있는 직장과는 조금 먼 농촌 지역이지만 지하철도 가깝고, 특히 도서관이 동네에 있어서 쉽게 이사를 결정했다. 처음 이사 와서 우리 식구들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씨앗도서관을 자주 이용했다. 에어콘도 나오고, 책도 많고, 영화도 빌려 볼 수 있고, 이웃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모임도 있어서 작은 도서관은 한동안 우리 가족의 서재이자, 거실, 놀이터가 되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요즘은 학교 도서관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책 읽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제 눈으로 읽기보다는 아빠의 목소리로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사실 나도 아이들을 내 무릎에 앉히고,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 좋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책 읽기를 아빠와 함께하는 놀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전 지홍, 지평이가 앞다투어 책을 가져와서 서로 읽어 달라고 졸라 댈 때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아이들은 책보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요즈음은 두 아들이 아빠 대신에 막내 지인이에게 책을 읽어 주는 날이 많아져서 내 수고로움이 많이 줄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쉴 새 없이 들고 오는 책을 모두 읽어 주느라 점점 목이 아프고, 졸음이 몰려와서 나도 모르게 눈을 껌벅거리기도 했다.

더 이상 책을 읽어 주는 게 힘들 때 쯤 꾀를 내었다. “이제 그만 책 정리하자. 이불을 펴고, 불 끄고, 누우면 아빠가 옛날이야기 해 줄게.” 하고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쉽게 설득이 된다. 두 녀석 다 재빠르게 정리하고, 이를 닦고, 이불 깔고, 눕는다. 아이들이 가장 재미있게 귀 기울이는 이야기는 아빠의 실수담이다. 그중에서도 아빠의 ‘똥’ 이야기는 가장 인기 좋다. “『똥똥 귀한 똥』 『똥 봉투 들고 학교 가는 날』 『방귀쟁이 며느리』를 읽었으니까 아빠의 똥 이야기 해 줄게.” 방금 읽었던 ‘똥’ 이야기에 내가 경험했던 일, 할머니, 부모님께 들었던 일들을 덧붙여 들려준다. 아이들이 이불 속에서 킥킥대다가 못 참고 “우웩….” “우헤헤!” 하고 넘어간다. 아이들에게 똥이나 방귀 이야기는 언제나, 몇 번을 들어도 가장 재미난 이야기가 된다. 아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교실에서 ‘똥’ 싼 이야기는 아이들도 위로가 되는지 시키지 않아도 유치원 때, 1학년 때 자신들이 겪었던 ‘똥’ 에피소드를 쏟아 놓는다.

매일 ‘똥’ 이야기만 나누는 것은 아니다. 보통 그날 읽었던 책들이 잠자리에서 다시 옛이야기로 이어진다. 지홍이가 좋아하는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는 강아지에 대한 두더지의 과감한 복수 이야기다. 이 책은 당했던 억울한 일들과 시도했던 복수들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게 어떤 소심한 복수를 할지 아들들과 함께 이야기해 볼 수도 있다.

지평이가 좋아하는 『브레멘 음악대』는 아빠가 어릴 적 키웠던 강아지, 닭, 동물들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다. 또 세 아이 모두 『브레멘 음악대』 이야기를 거의 다 외우고 있어서 나란히 누워서 역할을 나누고, 어둠 속에서 연극배우처럼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낸다. 『행복한 우리 가족』은 조금 부끄럽지만 우리 가족이 이번 명절에 범한 교통 신호 위반, 얌체 같았던 행동들을 이야기하며 반성하게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재미에 쏙 빠지다 보면 아빠의 숨기고 싶은 과거, 어린 시절 할머니 모르게 범했던 좀도둑질까지 슬그머니 털어 놓게 된다. 아이들은 언제나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주는 가장 좋은 청자다. 피곤한 날 이야기 중간을 뛰어넘기라도 하면 지평이는, 지난 번 이야기와 다른 점을 따져 묻는다.

가끔은 아빠의 옛날이야기 대신에 지홍, 지평이의 요즘 이야기 시간을 열어 달라고 졸라본다. 쉽게 이야기해 주지 않지만 아빠가 계속 졸라 대면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있었던 재미난 일, 공상 과학 이야기, 웃음 가득한 친구들 소식까지 하나씩 풀려나온다.

나는 내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어도 좋겠지만, 먼저 웃음이 넘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어릴 적 아빠와 함께 나눈 재미있는 책과 이야기가 아이들 마음 한 켠에 살아 숨 쉬고 있다가 살면서 가끔 힘들고 지칠 때 꺼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밤에도 아이들에게 아빠의 ‘똥’ 이야기 하나 선물해야겠다.
이승훈 | 대학에서 기독교교육학과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지금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우리가 사는 마을』 『평생교육의 눈으로 학교 읽기』 『한국의 논점 2017』(공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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