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통권 제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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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나의 작품 나의 이야기]
스스로 빛나라, 딱정벌레!

공지희 | 2017년 12월

지방 작은 읍에서 태어난 나는 몇 년 뒤 서울 한가운데 달동네로 이사를 했고 그 동네에서 어릴 적의 거의 모든 시절과 사춘기를 지나고, 어른도 되었다. 멀리 복잡한 시내가 보이고, 아랫동네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작은 장난감 블록 같은 집들이 빼곡 층층하고, 고불고불 좁은 길들 사이로 대문이 마주 보고, 계단 아래 낮은 지붕, 계단 위에 골목, 나무 아래 담장, 대문 옆에 쪽문, 공터 옆에 텃밭….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온갖 쓸모 있는 것들과 재미난 것들이 가득 차 있는 동네였다.

그 공간의 틈에서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과 가족들과 내가 살았다. 그 공간을 나는 ‘비틀랜드’라고 불렀다. 딱정벌레들의 나라. 비틀랜드에서 딱정벌레들은 많은 마법을 연마했다. 계단을 힘들지 않게 오르내리는 법, 벌레들을 살피는 법, 나무와 바위들을 이용해서 노는 법, 땅바닥과 흙빛을 살펴보는 법, 공터에서 비를 피하는 법, 작은 미로들을 짧은 시간에 통과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둘 이상만 모이면 온갖 기발한 놀이를 생각해 내는 재주들은 그 동네가 준 특별한 선물이었다. 친구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기, 창문턱이 닳도록 기대어 하늘을 보기, 친구네 집 방 안을 내 집처럼 드나들기.

어른이 되었을 때쯤, 내가 그곳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동화를 쓰고, 어린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자주 돌아다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천천히 걸어 보리라. 나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나 아름다웠구나…, 하면서.

하지만, 그곳 나의 산37번지, 비틀랜드는 거대한 아파트 촌으로 변해 있었고, 나는 슬프고 속상했다. 세상의 모든 동네는 어느 날 개발이 되고 아파트 촌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변해 가고 있는 것이 요즘 현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나의 산37번지가 그렇게 세상 가운데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 너무 억울했다.

학교 길을 함께 타박타박 걸었고, 산동네 언덕을 다람쥐 모양 내리락오르락 뛰어놀고, 부푼 풍선처럼 날아다녔던 내 어린 시절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내 책상 앞에서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동화를 쓸 때면 그 아이들은 언제나 내 앞에 나타나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작은 딱정벌레의 모습으로 활짝 웃으면서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나타났다. 말간 얼굴로 턱을 바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간방 히야와 나의 우상이었던 뽑기 언니와 술집 딸이었던 다락방 노라, 그리고 햇볕을 쬐며 앉아 상큼하게 웃던 해일 오빠와 산양을 키우며 동네 맨 꼭대기에서 먼 아래를 내려다보던 초록헬멧. 그 아이들은 내가 어른이 되면서 힘든 시간 내내 힘이 되어 주었고, 글을 쓰게 해 주는 요정이 되었고, 재밌는 이야기의 뮤즈가 되어 주었다. 나는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담아 두었다. 그래 언젠가는 꼭 쓰고 말 거야. 그리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나의 딱정벌레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는 시간은 짧지 않았지만, 그동안 나는 친구들을 만난 것만 같았다. 시간은 아주아주 오래 걸렸다.

용감한 히야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그 아이가 세상의 어떤 어둠도 비출 수 있는 밝은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우중충한 내 속내를 들여다 비추며 그 아이는 말했다. ‘세상에 작아서 슬픈 것은 없어. 상상해 봐. 작은 것을 이렇게나 크게 만들 수 있잖아.’

어른보다 든든했던 뽑기 언니는 여전히 낯빛이 까무잡잡했고, 눈빛은 맑고 빛이 났다. 뽑기 언니는 여전히 낙타를 타고 설탕을 나르며 달콤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그 황금빛 동그라미는 초라한 골목 귀퉁이에서부터 사막까지 크게 움직이며 나의 늙고 쓰디쓴 혀를 부드럽게 위로해 주었다. 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도 어른이 다 되었구나.’

단단하고 아름다웠던 해일 오빠는 빛을 다스리며 땀방울을 닦는다. 그리고 영롱한 보석을 내 어깨 위에 얹어 주어 나를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괜찮지? 이 빛깔이 너를 닮았어.’

노라는 아빠 양복을 입고 흔들흔들 춤을 추며 다가왔다. ‘자. 나처럼 해 봐. 힘을 빼야 해. 힘을 빼는 건 아주 중요한 거야. 그리고 이렇게 흔들려 봐. 부드럽게.’

듬직한 파수꾼 헬멧과 산양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 나그네처럼 여행 중이다. 그는 편지를 보내 주었다. ‘아이고! 바쁘다. 지켜야 할 것들이 정말 많아.’

잘 지내지? 나는 모두에게 안부를 물었다. 나의 딱정벌레 친구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지내고말고.’

『안녕, 비틀랜드』를 쓰는 동안 나는 계속 질문을 했다. 나는 다만 지금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는 걸까. 그게 다 일까. 산37번지가 사라진 동네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새록새록 올라왔던 그 시간. 그건 다만 어린 시절, 내 인생의 처음에 가까운 기억, 지나가고 묻혀 버린 시간뿐인 걸까?

그렇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은 신화적 시간이다. 시간의 순차 앞쪽 어딘가에 굳어 버린 화석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고도 선명하게 존재한, 늙어서 되돌아가는 순간까지도 현실 속에 당연하게 자리하는 존재였다. 켜켜한 시간 속에 반짝거리며 살아 있었다.

그 모양은 뒤죽박죽인 듯하지만 질서정연했고, 숨은 듯했지만 금방 찾아볼 수 있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내 시간의 주인공이었던 거다. 어린 시절의 나, 그 아이는 ‘지금의 나’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어린 시절은 일생 동안 내내 뮤즈가 되어, 창작의 원천이 된다. 어린 시절 나는 아름답거나 따뜻했던 기억이 많지 않다. 책을 볼 기회도 거의 없었고,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을 차곡차곡 접었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행복해지기 위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딱딱한 날개 속에 웅크리고 언젠간 날개를 펼칠 시간에 스스로 빛나리라 생각했다. 나와 똑 닮은 나의 친구들과 함께.

켜켜한 시간과 공간 속에, 언제나 내 가슴속에서 반짝거리던 나의 딱정벌레 친구들은 아마도 나의 천사였을지도 모른다. 『안녕, 비틀랜드』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려 주었으면 좋겠다. 우주 속의 나, 작은 것 같지만 우주 전체인 나, 영겁의 시간 속의 나, 언제나 즐거운 나, 스스로 반짝이는 나…. 그리고 지금 내 옆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이 세상의 모든 딱정벌레들에게는 다른 딱정벌레들이 꼭 필요하다. 함께 웅크리고 함께 날개의 힘을 기르며 함께 빛날 친구들이. 『안녕, 비틀랜드』를 쓰는 동안 행복했다. 그리고 다음에 다른 딱정벌레 친구들의 이야기를 쓸 때가 다시 오면, 나는 또 행복해지리라.
공지희 |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약수동 산37번지에서 자랐습니다. 2001년 대한매일 신춘문예에 「다락방 친구」가 당선되어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 『영모가 사라졌다』로 황금도깨비상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동화 『마법의 빨간 립스틱』 『착한 발자국』 『멍청이』 『오늘은 기쁜 날』 『이 세상에는 공주가 꼭 필요하다』 『안녕, 비틀랜드』를 썼고, 청소년소설 『톡톡톡』으로 제4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