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1월 통권 제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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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책 이야기

[그림책 이야기 방식 읽기]
눈 위에 쓰고 그리다

김영욱 | 2018년 01월

오늘도 눈이 왔습니다. 하루 종일, 눈, 그리고 맞이한 저녁, 눈이 쌓였습니다. 제 맨눈으로 저 창밖에 펼쳐진 어둠에 묻힌 눈을 봅니다. 검습니다. 이미 흰색이 지워졌습니다. 종일 내린 눈도 지나고 나면 한때의 추억. 올해도 지나고 나면 생의 한때로 기억되겠지요. 하여, 마음껏 추억해 보는 것도 이즈음의 마땅한 행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마음이야 아쉽고 서운하지만, 그 한구석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희망이 마치 흰 눈처럼 내리기 시작하여 뭉쳐지고, 달력에 남은 날짜가 줄어들수록 희한하게도 마음의 복판을 향해 점점 더 큰 눈덩이로 굴러들어오게 됩니다. 희망의 눈덩이가 제야의 종을 두드려 울릴 때까지 우리는 작별 속에서 만남을 기대하기 마련인가 봅니다.

눈은 어디까지 굴러갈 수 있을까요?

어릴 적 겨울이면 종종 품던 상상 속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쌓여서 밤낮없이 하얗게 놀고 하얀 꿈을 꾸고 일어나 다시 하얀 세상 속에서 하얘지는 순백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폭설’의 무자비한 성깔도 모른 채, 그저 마냥 낭만적인 하양을 꿈꾸던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눈행성』의 작가 김고은은 눈이 무척이나 많이 내리는 동네에 살았던 유년의 추억을 잊지 않고 ‘눈이 굴러가면 과연 어디까지 굴러갈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을 지니고서 펄펄 내리는 눈의 꼬리를 추적해 가는 한 편의 멋진 판타지 그림책을 완성했습니다. 그럼 우리도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눈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요? 오늘도 폭설주의보가 내렸는데, 눈은 어디에서 만들어져서 이토록 하염없이 겨울 산과 들판을 하얀 색으로 칠해대는 걸까요? 과학적으로 따진다면 눈은 지상의 수증기가 상승하여 공중의 찬 기운과 만나면서 생긴다고 설명하겠지만,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눈 행성은 우주로 날아가 이 행성 저 행성에 부딪치고, 이 혜성 저 혜성을 들이받으며 조금씩 부서졌어요. 부서지고, 부서지고, 부서지고…” 그리고는 “우리가 어른이 될 때까지 부서져 지금도 어디선가 부서지고 있을 거예요.”라는 『눈 행성』 말미의 글 텍스트를 힌트로 삼는다면, 엊그제 내린 눈도 오늘 내린 눈도 바로 눈 행성의 잔해라는 것이 되겠지요. 그럼 ‘눈 행성’이 뭐고 그건 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궁금해질 거예요. 당연해요. 그래서 그림책의 맨 앞부터 차근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속표지의 제목과 그림 아래 “눈이 너무 왔어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요.”라는 글 텍스트가 의미심장해요. 아이들 허리춤까지 쌓인 눈 속에 한 남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쌓인 눈을 원망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과 어우러져 뭔가 심상찮은 사건이 전개될 걸 암시하지요. 어른들 세계에서 눈은 제거해야 하는 어지간히 귀찮은 존재인 것이죠. 본문 첫 장, 펼친 그림의 왼쪽 집에 사는 김씨 아저씨와 오른쪽 집에 사는 이씨 아저씨는 눈 때문에 우선 눈싸움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 눈싸움은 그야말로 좁은 길을 가득 메운 눈을 서로 조금 치웠다고 벌어지는 기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꽤 우습게 전개되고 있어요. 이를테면 김씨 아저씨의 “내가 정확히 골목 중간까지 치웠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다 치우시오.”라는 주장을 받아치는 이씨 아저씨는 “그럴 리가! 내 보기엔 당신이 1미터 20센티미터는 더 치워야 딱 중간일 것 같은데.”라고 말합니다. 이 코믹한 기 싸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림 또한 어른들의 유치한 성품을 역시나 재미지게 그려내고 있어요. 일단 온갖 자가 다 나와 있고, 계산기가 나와 있고, 양팔 저울까지 나와 있는 좌우대칭의 그림 텍스트는 이들의 팽팽한 신경전을 심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이 두 아저씨는 골목에 서서 자그마치 1시간 30분 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김씨 아저씨가 80센티미터를 더 치우고 이씨 아저씨가 1미터 40센티미터를 더 치워야 하는 결론을 냅니다. 하지만 이 눈 치우는 일이라는 게 어지간히 피곤한 육체노동에 해당하는지라, 둘 다 금세 지치고 꾀를 부리게 만들지요. 아니나 다를까, 김씨 아저씨부터 작은 눈덩이를 슬쩍 굴리는데, 어라, 데굴데굴 잘도 굴러가지 뭐예요. 그걸 보고 가만있을 수 없는 이씨 아저씨 역시 발끝으로 눈덩이를 슬쩍 밀어 보고, 이제 두 사람의 눈덩이는 어느 것이 더 멀리 굴러가나 대결이라도 하는 양, 데굴, 데굴, 데굴, 그러다 마치 제짝이라도 만난 듯 철썩! 달라붙어 버렸답니다.

그럼 하염없이 구르고 굴러 집채보다 더 커지고 빌딩보다 더 커지고서도 하염없이 제 덩치를 키워 가는 눈덩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본문 여섯 번째 그림을 보면 어째 분위기가 심상찮습니다. 건물보다 더 큰 눈덩이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뒤따라오는 그 눈덩이를 피하기 위해 역시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는 택시며, 빌딩 위쪽 전광판에서 알려 주는 괴생명체 눈덩이에 관련한 새 소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초리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입초리가 불안한 사태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언론도 나서서 ‘날 새는 끝장 토론, 눈 행성 외계 생명체설’이란 헤드라인을 달고 보도에 열을 올리고, 공포의 수위는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 공포감은 바로 이어진 다음 장면에서도 읽히는 바, 가령 악성 소문과 황당한 추측들의 난무 속에 놓인 사람들의 표정으로 너끈히 읽혀집니다. 여기에 끼워 넣은 “눈 행성에 깔린 무너진 건물만 수백 채!”, “눈 행성이 아이들을 납치한다는 제보 잇따라…” 등등의 그림 속 글 텍스트 정보들도 지구가 눈 행성의 위협을 받고 있는 다급한 상황임을 알려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김고은 작가는 온갖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눈 행성 제거에 나선 지구 방위대의 활동과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땅 밑으로 피난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는 데 좀 더 과감한 상상력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지면에서 이 패기 넘치는 작가의 유쾌하고도 기발한 상상력의 세부까지 전부 다 언급해서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글쎄요. 이런 과감한 상상력을 긴장감 놓을 수 없는 이야기 얼개와 보기만 해도 우스운 그림체로 풀어놓는 김고은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녀가 쓰고 그렸다는 『일어날까, 말까?』 『딸꾹질』 『우리 가족 납치 사건』도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듯, 작가가 몹시 궁금해집니다.

남극의 생명체를 상상하며

그림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한번쯤 봤을 그림책 『리디아의 정원』에 그림을 그린 화가 데이비드 스몰이 그림을 그리고 전직 교사 출신의 작가 토니 부제오가 글을 쓴 『엘리엇에게 엉뚱한 친구가 생겼어요』를 펼쳐 봅니다. 과학적 지식이 밑바탕에 깔린 그림책에서 스몰의 그림체는 역시 담담하고, 부제오가 안내하는 펭권의 세계는 마냥 추운 곳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반듯한 꼬마 신사 엘리엇은 어느 토요일 아침에 수족관에 함께 가자는 아빠의 제안을 받습니다. 속으로는 시끄러운 꼬맹이들로 우글우글한 수족관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군말 없이 아빠를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고, 수족관에 온 부자. 아빠가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읽는 동안 엘리엇은 혼자서 펭귄관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동물의 신사로 흔히 알려진 펭귄에 애착을 갖고 있던 엘리엇답게 펭귄관을 한참 돌아본 엘리엇이 아빠에게 돌아와 하는 말, “저… 펭귄 한 마리 가져도 될까요?”는 잡지에 한창 몰두해 있던 아빠의 오해로 말미암아 “물론이지.”라는 승낙으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엘리엇이 말한 펭귄은 아빠가 건네준 단돈 20달러로 살 수 있는 인형은 아니었습니다. 신이 난 엘리엇이 챙긴 것은 진짜 진짜 살아있는 펭귄. 그렇다고 눈치 빠른 엘리엇이 아빠에게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았으니 이 둘 사이에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이미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엘리엇은 자신의 새 친구 펭귄에게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고 이 두 대양을 잇는 남아메리카 남단 끝자락에서 80만 마리의 펭귄을 발견한 대항해의 이름을 따서 ‘마젤란’이란 이름을 지어 줍니다. 그리고 시작되는 이 둘의 비밀스러운 동거는 어쩔 수 없는 펭귄의 생태와 식생을 유지시켜 주려는 엘리엇의 노력으로 인해 오래 지속될 수만은 없게 되는데요. 작가 둘은 여기에서 아빠의 비밀을 노정시켜 결국엔 엘리엣이 무안한 감정을 갖지 않도록 서사를 배치해 두었습니다.

이 그림책 속의 글 텍스트 혹은 그림 텍스트를 무심하게 넘겨 버렸다면, 결론부에 등장하는 아빠의 친구 쿡 선장이 생뚱맞게 생각될 수 있겠지만, 꼼꼼한 관찰력을 지닌 독자들이라면, 이야기의 도입 부분에서 아빠가 읽는 잡지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인 점에도 한번쯤 관심을 두었을 테지요. 이처럼 이 그림책 곳곳에는 이야기를 돕는 과학적 상식이 액자 식으로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물론 평소 과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펭귄의 이름이나 아빠 친구인 거북이의 이름, 수족관 벽에 걸린 마젤란에 대한 설명이나 엘리엇의 집 2층 벽에 걸린 배 액자 등등을 통해 금세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겠습니다만, 혹시라도 그렇지 못한 독자들을 위한 배려로 작가들은 그림 속에 혹은 대화 속에 과학적 지식을 간략하게라도 담아 놓았답니다. 음, 그러니까 뭐랄까요? 이 그림책은 완벽히 정보 그림책으로 분류될 수는 없지만, 정보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애쓴 이야기 그림책으로 보면 될 것 같네요.

그림책을 덮고 제 어린 시절을 잠시 떠올려 보게 되었어요. 다름 아닌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과학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때문인데, 당시 영어로 된 그 잡지를 구독한 건 제가 아닌 아버지였고, 내용을 읽을 수 없던 제가 그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은 높은 해상도를 자랑하는 사진들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참으로 열심히 읽었던 시절이었거든요. 물론 저는 그 잡지를 구독하게 된 아버지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른 채로 그림책을 공부하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언제 기회를 봐서 여쭙고 싶어졌거든요. 사실 저는 『엘리엇에게 엉뚱한 친구가 생겼어요』를 읽으면서, 저와 아버지의 관계를 아주 잠깐이지만 돌이켜볼 수 있었어요. 아들의 비밀 친구를 너그러이 용납해 주는 엘리엇의 아버지, 아버지에게도 비밀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들 엘리엇, 이 부자의 관계가 은근슬쩍 부러워지더군요. 이 부자에게 공통분모가 있다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서로에 대한 관용일 텐데, 그림책을 읽는 어른들이 많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희 아버지는 여전히 그림책을 어린이들의 전유물로 생각하시고 있으니까요.

일 년이 조금 넘게 매월 두 권의 그림책을 선정하여 제 나름대로 읽은 느낌과 생각들을 글에 담아 왔는데, 이제 작별이라고 하니 조금은 서운하고 섭섭한 생각이 드는군요. 늘 좋은 어린이책을 소개하고 더 많은 독자들과 책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애쓴 『열린어린이』에게 감사의 말씀을 건네는 것과 함께 새로운 변신으로 더 멋지게 거듭날 것을 기원 드리며 이 글을 마칠까 해요. 끝으로 같은 책이라도 그림책은 인생에 세 번은 읽어야 한다는 야나기다 구니오의 말을 인용하며 인사드립니다. “그림책을 늘 곁에 두고 즐겨 읽지 않은 어른이 어떻게 어린이에게 그림책을 권할 수 있겠습니까?” 무술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김영욱 | 서울에서 태어나 교육학과 영문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아동문학과 문화콘텐츠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 편집부에서 일했고, 어린이책 기고가로 활동했습니다. 지은 책으로 동화 『책벌레 대소동』, 에세이 『그림책, 음악을 만나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 『우리는 핀볼이 아니다』 『알 카포네의 수상한 빨래방』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