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1월 통권 제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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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그림책 만나며]
시작 다음, 야호!

이숙현 | 2018년 01월

까만 밤, 어디선가 불빛이 반짝반짝 한다면? 깜깜 어둠에 잠겨 있던 것들이 반짝, 반짝, 불빛 들어올 때마다 모습 드러내지 않을까. 불빛 색깔마다 서로 다르게, 불빛 비추는 자리마다 새롭게, 어둠이 켜지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누군가 이 불빛에 마음을 빼앗겨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선다. 가까이 다가가 잠시 불빛 둘레 머무른다. 마음 골짜기, 구석진 자리에 빛이 스며들며 잠시 잊고 있던 소중한 순간들과 반짝반짝, 마주하는 사람… 바로 나, 『시작 다음 Before After』 만난 나의 이야기.

그림책의 얼굴을 사진으로 처음 봤을 때, 나는 어둠 가운데 차례차례 켜지는 색색의 알전구가 떠올랐다. 초록빛 ‘시’, 귤빛 ‘작’, 붉은빛 ‘다’, 하늘빛 ‘음’, 반짝, 귤빛 Before, 붉은빛 After, 반짝. 알록달록 낱글자 알전구는 검정색 바탕의 깜깜한 어둠을 발랄하고 경쾌하게 밝히고 있었다. 마음을 파고드는 색 글자 불빛, ‘시, 작, 다, 음’에 이어 뒤표지에 박힌 글자들까지 무리지어 색색으로 깜빡였다.

시간이 흐르면 모습이 변해!
꼬물꼬물 애벌레가 훨훨 나비가 되고
커다란 나무에서 도토리가 열리고
닭이 달걀을 낳고, 달걀은 다시 닭이 되고…
다음에는 어떻게 달라질까?


눈으로 들어온 색 글자가 속삭이는 소리로 귓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 밤, 나는 지역 내 새로 생긴 아름다운 서점, 삼일문고로 내달렸다. 불빛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가 책을 찾았다. 다행히 책꽂이에 책이 있었다. 딱 한 권. 책을 뽑아들며 놀랐다. 보통의 그림책과 달리, 책이 무겁고 두꺼웠다. 책등만 보면 도감이나 이론서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하지만 폭이 좁고 약간 길쭉한 모양의 『시작 다음 Before After』는 그림책이었다. 글 없는 그림책.

온통 검정인 캄캄한 앞 면지를 지나면 대낮 같이 환하게 다가오는 흰색 종이 한가운데 떡하니, 놓여 있는 모래시계. 바닥에 작은 모래 산이 보인다. 아주 작은 모래 알갱이가 산꼭대기 위로 쏟아지고 있다. 모래시계를 살피는 눈짓과 책장을 넘기는 손짓 사이, 시간이 흐른다. 마치,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다음 장을 봐 주세요.’ 안내문처럼 바로 곁에 나와 있는 제목 글자, 시작 다음. 넘기면 밤하늘의 달과 한낮의 해가 나란히 펼쳐진다. 왼쪽과 오른쪽, 서로 다른 두 장면을 꿰뚫는 시간. 뒷장에는 꽃봉오리 하나가 활짝 핀 꽃 한 송이로 바뀌어 있다. 아, Before After, 머릿속에 번갯불이 번쩍, 한다.

이토록 단순하게, 그러면서도 다양하게, 시간의 변화를 보여 주는 책이 또 있을까. 도시의 건설 현장, 철골이 올라가는 장면이 우뚝 선 고층 빌딩 숲으로 바뀌어 있고, 뒤이어 밀림에서 나무줄기를 붙들고 있던 아기 킹콩이, 다 자란 모습으로 빌딩 숲 건물 꼭대기에 피뢰침을 붙든 채 비행기와 씨름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절로 달라지는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변화, 그것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도 가늠하게 하는 뜻밖의 전개. 단순히 그림을 살펴보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찾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대해 곱씹게 한다. 전(前)과 후(後)를 따져보게 한다. 왼쪽과 오른쪽이 첩첩산중으로 이어진 어느 장면에는 양쪽 가장자리, 낭떠러지 언덕 끝에 남자와 여자가 마주보고 서 있다.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머나먼 두 사람 사이는 뒷장에서 길고 긴 다리가 놓이며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남자는 오른쪽으로 건너가 여자 앞에 서 있다. 그럼, 다음은? 책장 넘기며 궁금해지는 그림책, 『시작 다음 Before After』.

열 살 난 둘째 아이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말란다. 자기가 말해 준단다. 책장도 함부로 넘기지 말란다. 신호를 주면 넘기란다. 하나, 둘, 셋! 하면. 그래 놓고 빨리 넘기라고 야단이다.

“문어에서 먹물이 나오잖아. 그게 잉크가 된 거고, 비둘기 깃털이 펜이 되고… 알았다, 이건 잉크랑 펜으로 쓰다가 타자기가 나왔다는 거네. 발명품, 맞지? 어, 비둘기 발목에 편지 있다! 비둘기 우표 붙인 편지가 비행기 타고 날아가나 보다. 맞네, 내 말!” 혼자 박수까지 친다. “저기, 비행기 날아간다. 그런데 어디로 가나? 아, 섬으로 가는구나. 화산섬? 우와, 카멜레온이다!” 글 없는 그림책인데 아이는 그림에서 끊임없이 글을 읽어 낸다. 말을 쏟아 낸다. 신나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한다. 아이야, 너의 ‘시작’을 아니? 엄마 뱃속에 자리했던 네 작고 작은 ‘시작’을 기억하니? 조그마한 입 달싹이며 옹알이하던 네가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너의 ‘다음’은 무엇일까? 네가 마주할 ‘다음’은 어떤 시간들일까….

교실로 들고 들어가 다섯 살 아이들에게 보여 주니 와글와글, 그림이 바뀔 때마다 여기저기서 내 말 들어 보라고 난리다. 여섯 살 아이들도 자기 이야기며 그림 속 이야기 들려준다고 여기저기서 들썩들썩. ‘견우, 직녀’도 떠올리고, ‘아기 돼지 삼형제’, ‘신데렐라’ 이야기도 읽어 낸다. 일곱 살 아이들의 입에서는 달에 처음 발자국 남긴 ‘닐 암스트롱’ 이름도 나오고, ‘진화’라는 단어도 나온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낮 다음엔 밤이잖아요.” 우리가 이런 것도 모를 줄 알았냐는 듯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들. 봄여름가을겨울 뒤에 또다시 어김없이 봄여름가을겨울이 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 모래시계 또 나왔네.” “모래 다 떨어졌다!” “선생님, 뒤집어 봐요!”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다시 시작, 다음 시간이 이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는 아이들. “이제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네. 너희들의 다음은 어떨까? 궁금하다. 학교 가서도 놀러 와!” 책 덮으며 반짝이는 눈동자들 마음에 담는다.

새삼, 몇 년 전 졸업을 앞둔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었던 ‘나에게 주는 상장’이 떠오른다.

레고박사상. 김하담. 위 어린이는 쌓기놀이터에 있는 레고를 가지고 제트기를 잘 만들어 이 상을 줍니다. 앞으로는 탱크를 만들 겁니다. 그런데 전쟁은 안 할 겁니다.
미소상. 이민하. 위 어린이는 날마다 웃으며 친구들에게 행복한 기를 전해 주기 때문에 이 상을 드립니다. 행복한 사랑을 나눠 주는 민하가 될 거예요.
최우수 연기상. 정휘진. 위 어린이는 연기를 잘하는 어린이입니다. 잘하는 연기는 우는 연기입니다. 근데 우는 연기를 하다가 진짜 울 수 있어요. 연기자 정휘진.


졸업식 전날 밤, 강당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상장을 가만가만 읽어 내려가다 몇 번이나 뺨을 훔쳤는지 모른다. 자신을 꼭 닮은 글씨와 그림으로 만든, 세상에서 하나 뿐인 상장 속에 아이들의 소중한 ‘다음’ 씨앗들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시작’을 돌아보면 고맙고 감사한 ‘다음’이 상장마다 어려 있었다. 훌쩍 지나 버린 시간만큼 부쩍 자라있을 아이들. 다들 어찌 지내고 있을까….

그리운 얼굴들 헤아려 보는 사이, 마음에 쏙 들어온 그림책, 『야호, 우리가 해냈어!』. 동그라미 안에 정답게 붙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앞표지 속 동물들 얼굴이 아이들 얼굴 마주한 것처럼 반갑다. 반달곰 달곰이, 두루미 흰날개, 산토끼 깡총이, 오리 꽥꽥이, 여우 캥캥이, 부엉이 큰눈이.

이름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동물 친구들. 사슴 큰뿔이가 깊은 구덩이에 빠졌다는 소식에 모두 서둘러 길을 나선다. 먹을 걸 챙기고, 강을 건너, 물도 좀 마시고, 꽃밭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기도 하지만 컴컴한 숲길 마다하지 않고, 여럿이 마음 내고 서로 도와가며 큰뿔이가 빠진 구덩이를 찾아간다.

드디어, 다다른 구덩이. 저기, 저 아래, 큰뿔이가 보인다. “큰뿔아, 괜찮아?” “안 다쳤니?” “배는 안 고프니?” 걱정하는 친구들. 큰뿔이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준다. 먹을거리를 챙겨 내려 주고, 큰뿔이가 구덩이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작전을 짠다.

이 대목에서 잠시 그림책을 덮어 두고, “얘들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동물 친구들이 생각해 낸 방법 일러 주기 전에 아이들과 한 번쯤 나눠 본다면… 저마다 기발한 작전을 들려주지 않을까. 어쩌면 벌써 한걸음에 그림책 속으로 내달려, 달곰이, 흰날개, 깡총이, 꽥꽥이, 캥캥이, 큰눈이 곁에 바짝 붙은 채 큰뿔이를 도와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 그럼, 동물 친구들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마련한 작전은? 돌과 나뭇가지를 배낭에 담아, 내려 보내기! 친구들은 작전대로 부지런히 움직여 큰뿔이가 디딤대를 밟고 올라올 수 있게, 있는 힘을 다한다. ‘날이 밝아올 무렵’, 뿔이 조금 보이더니 구덩이 밖으로 빠져나온 큰뿔이. 친구들은 기뻐 소리친다. “야호, 드디어 큰뿔이가 나왔다!” 이윽고 큰뿔이네 동그란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 실컷 먹고는 쿨쿨 잠든 동물 친구들의 모습, 부드러운 결이 살아 있는 따스한 그림으로 평화롭다.

아이들 입에서 야호, 소리 터져 나오는 ‘다음’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구덩이 같은 시간에 빠진다 해도, 너무 늦지 않게 구덩이로 달려와 줄 친구들과 ‘다음’을 함께할 수 있다면! 서둘러 길 나서 주고 마음 보태 줄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어려운 시간들도 씩씩하게 헤쳐 나갈 수 있을 텐데…. 그림책 제목처럼 “야호, 우리가 해냈어!” 소리치며 더불어 기뻐하는 시간들 누리며 아이들이 자라날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나은 곳이 되지 않을까.

새해의 시작, 첫 달이다. 일 년 열두 달 돌아, 어김없이 다시 만난 1월. 새롭게 펼쳐질 시간의 ‘다음’ 내다본다. 오랫동안 품어온 ‘다음’과 드디어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고 바라면서…. 이제 곧, 우리 품을 벗어날 일곱 살 아니 여덟 살 아이들의 또 다른 ‘시작’에 마음 보태는 지금 이 순간. 주문처럼 나에게 속삭인다. 그래,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인 거야. 우리는 이어져 있으니까. 다음에서 다음으로 건너가는 거야. 시작 다음, 야호!
이숙현 | 경북 구미, 오래된 아파트 한 가운데 이야기 숲 옆구리에 끼고 있는 곳, 금오유치원에서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소중한 인연 엮으며 이야기 짓고 지냅니다. 여럿이 함께 그림책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좋아, 그림책 팟캐스트 ‘행복한 그림책 놀이터’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을 통해 동화 마당에 나왔으며, 지은 책으로 『초코칩 쿠키, 안녕』 『선생님도 한번 봐 봐요』 『날마다 달마다 신나는 책놀이터』(공저) 들이 있습니다.